2019년 말 이세돌 9단이 프로바둑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뉴스프로그램에서 은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는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사실 이게 예술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일종의 게임이 된거 같다. 그런 점이 굉장히 아쉽다."3TV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바둑은 예술과 같은 것으로 배웠다. 바둑은 둘이만드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인공지능과의 대결이)무슨 작품이 되겠나. 제가 배웠던 예술 그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더 이상은 하기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대상을 분류해요. 그렇게 범주화하면서 약간 오류가 있어도 무시하고 데이터를 카테고리로 관리하죠.
그렇게 관리를 하니까 고정관념이 생겨요. 그런 고정관념들이 일을 빨리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요소들은 배제하게 돼요. 어쩔 수 없죠. 머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유한하니까. 그런데인공지능은 그렇지 않죠.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합니다. 인공지능이그렇게 해서 둔 수를 보고 ‘진짜 좋은 수인데‘ 하고 감탄하면서 분석해 보면 그게 가장 기본에 충실한 수인 거예요. 바둑뿐 아니라우리가 쓰는 언어 자체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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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계절 변화를 감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싹튼 꽃,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 모퉁이를 돌았을 때 뺨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차 같은 것으로 사계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해 두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과학 실험도똑같습니다.

그러니 의미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술술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음독音讀, 즉 소리내어 읽기를 감당할 수 있게 써야 합니다. 쉬엄쉬엄 중간에 한숨 돌리며 읽어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글이나 리듬이 나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파열음이 많은문장은 음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음독할 수 있는 문장은 독자의 머리(뇌)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갑니다. 몸으로 스며들어 독자의 신체 일부가 됩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글이 이미 독자의 몸의한 부분이 된 시점에 독자는 무심코 과거에 읽었던 책의한 구절을 입에 담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심코‘입니다. 몸 깊숙한 곳에서 그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저의 뇌 안에 존재하는, 한없이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는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있던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작은 조각들은거기 처음 저장되었을 때부터 제게 쭉 "빨리 설명해 봐" 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몇십 년째 그러고 있는 조각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제가 가진 이해의 틀에는 아무래도 수납할 수 없었던 ‘반증 사례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예컨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아! 이게 그건가?!" 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 때가 찾아옵니다. 몇십 년이나 제대로씹어 삼킬 수 없어서 목구멍에 걸려 있던 작은 가시를 쏙하고 씹어 삼킬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죠. 바로 이 "이게 그거잖아"의 납득 방식을 저는 매우 좋아합니다.

이때 ‘이것‘과 ‘그것‘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좋습니다. 철학 명제와 문학의 한 구절이 일치한다거나 최근 정치 이론의 한문장이 노가쿠‘의 문구와 똑같다거나 종교의 계율과 구기운동 규칙에서 정하는 금기가 같은 것을 발견한 순간 "아! 이게 그걸 말하는 거구나 하며 느끼는 상쾌함은 글로 담아 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쩌면 자기가 이전에 입에 한번 담았던 말에 주저앉는 것이나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성숙해진다는 것은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루는 일입니다. 쇄신, 즉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려면 이전까지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사념과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을 품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새로운 사념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휘꾸러미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를 손수 찾으면서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연히 확실하고

"士別三日, 即更利目相待"(사별삼일, 즉갱괄목상대)라는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모름지기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성숙관‘입니다. 사흘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진정한 자기‘ 같은것에 주저앉고 매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배운다‘는 식의 화법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배움이 정말로 일어나면 ‘나‘라는 주어는 더 이상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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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에서 리좀은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 줄기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자신들의 철학적 접근 방식을 설명하기위해 리좀이라는 단어와 식물학적 이미지를 차용했다. 대부분의 지식체계가 하나의 중심 주제에서 하위 개념 또는 하위 범주로 가지를 뻗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리좀의 은유는 그와 반대되는 지식 체계를 시각화한다. 리좀(뿌리줄기)은 뿌리, 기둥, 가지가 있는 수직적이고 선형적인 나무 구조와 달리,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호 연결되어다방향으로 작동하는 수평적 사고 모델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식, 문화, 사회는 모든 지점이 서로 연결될수 있는 횡단적 네트워크로 간주된다. 단일한 기원이나 원인을 찾기보다는, 현실을 다양한 요인과 힘, 현상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이해한다. 이 ‘리좀식‘ 사고는 지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수목식‘ 사회 위계 구조에 저항한다.

철학계에서 공동 저술은 흔치 않다. 더구나 공동 저자들이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식물학 이미지를 빌려 철학 이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보다 더 이례적이다. 새로운 사고의 틀에는 새로운 은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설명하고자 했고,그 방식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불변하는 단일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혁명적인 방식이길 바랐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을 "유목적 전쟁 기계"라 표현하며, 사방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인위적 권력매커니즘을 해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종종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공간적은유로 표현한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대비, 땅과 세상의 구분 또는 은신처, 오아시스, 사막과 같은 용어는 아렌트의 문체적 특징이자,인간 행동의 본질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요약하는 데 중요한 도구이다. 그중에서도 사막 은유는 가장 강력한데, 아렌트가 말하는 사막은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정치적 공간이 사라질 때 생겨나는 황폐한 공간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처럼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여기는 것이 정치의 본질을 놓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자체로 정치적 존재가 아니며, 정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 공적이고 공통된 공간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사막은 바로 이러한 공적 공간이사라진 결과이다. 정치가 부재할 때 사막은 확장된다.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바람은 모래 폭풍처럼 불어와 남아 있던 건강한 상호작용의 공간과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세력에 맞서 살아 있는 작은 오아시스까지도 덮쳐 버린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회피와 오락이라는 신기루에 빠져, 귀신처럼 떠돌며 사막의 삶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막, 신기루, 오아시스, 모래 폭풍 등 다양한 은유를 통해 아렌트는 상실감과 길을 잃은 현대인의 상태를 걱정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의 사회적 공간, 즉 ‘사이 공간‘을 지켜내는 것이다. 신기루나거짓된 대안적 오아시스에 현혹되지 않고 사막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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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단돈 6파운드에, 누군가에게 보내졌던 190년의지나간 시간을 샀다. 나에게 빈티지란, 누군가의 누적된시간들과 만나는 더없이 귀한 시간. 그리고 그것이 시공간을넘어 다른 나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어지럽고 묘한 또 다른시작인 것이다. 단순히 스타일을 사랑해 물건을 구입하는것만은 아닌, 그런 조용하고 다소 나만의 비밀 같은 이유에서,그렇게 빈티지 사랑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여서 나를 느린 다정함으로 이끌어주고,
조심스러운 섬세함을 가지게 해주는 이곳의 불편함이 그저사랑스럽다.

‘누가 새로운 걸 먼저 알아채는가보다는, ‘가까이에 있는것들이 얼마나 매일매일 새로운가‘를 알아채는 게임에 나는 더관심을 갖는 편이다.

사실 나는 빵의 모든 것이 좋다. 냄새도, 각기 다른 질감도,
봉긋함도, 때론 묵직함도, 따뜻한 컬러와 우드의 어울림도,
뜨거워 김이 나는 것도, 혹은 딱딱해 꼭 침으로 녹여내되새김질하듯 단맛을 끌어내는 과정도 좋아한다. 무엇보다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 번잡스럽지 않은 선량함이 제일로좋고 그런다. ‘빵을 좋아하면 외로운 것‘이라고 누군가말했다. 그래서 외롭다면, 나는 그 외로움을 누구보다 달게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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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것들에 대한 존중,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집착. 속도와 성장 같은 것에 연연하지않는 느긋함,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태도. 이런삶의 방식이 어디에나 배어 있었다. 수백 년 전의 모습을지키며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촘촘한 규제의 그물에 갇혀 살겠구나, 내 집이어도 내 땅이어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이 도시의 주민들은 그런 부분에대해 나름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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