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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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산사 진입로와 같아서 환상적인경관을 맞으러 가기 위한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제공한다. 대문 열고 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덕 너머에 있다는 것은, 연극으로 치면 서막이고 음악으로 치면 잔잔하게 흐르는 전주곡 같다.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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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움직임의 동기‘에 주목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없다. 나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는지보다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가장 눈부신 열정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것일까. 그 해답을 우연히 강연 중에 찾은 적이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테마로 강연을 하면서, ‘당신을 결과와 관계없이 가장 몰입하게 하는 블리스(bliss, 내적 희열), 당신의 모든 슬픔을 잊고 몰두하게 하는 것은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의 기쁨을이야기했고, 학생들은 만화, 농구, 노래 등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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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이것은 정확한 사실이 반영된 서술이 아닙니다. 잃을게 쇠사슬뿐일 리가요. 잃을 것 많습니다. 온세상을 얻을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게 왜 필요한가 하면, 이 문장이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그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만들기때문입니다. 철학이 문학화가 된 겁니다.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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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 깊은 절망과 더 높은 희망
정경심 지음 / 보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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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재난은암이든 사고든 재해든 그 무엇이든삶을 리셋하는 효과가 있다대개 회복까지는지리한 시간이 걸리기에오롯이 지나온 삶에 대한 대차대조의여유가 주어진다이렇게 리셋을 하고 나면 비 갠 뒤의마른 땅처럼삶의 토대가 더 단단해진다그러니 이제 새로 짓기만 하자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었던 집을.

아무리 안타까워도다 이해할 수도다 나눌 수도 없다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도예수와 열두 제자도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그것이 우리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아무리 안타까워도모든 것을 다 공감할 수도다 내어 줄 수도 없다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고난의 시간이며 결핍의 시간그 고독조차 섣불리나눌 수도 이해할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면나는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살 수 있다사 년 아니 더 길어질지도 모르는 고난 이후에도나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그러나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르리라마음속에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하리라평생 누구라도 한 번 겪을까 말까 한한 시절 누구라도 한 번 겪을까 말까 한시련으로 단련되어 정금같이 나아갈 것이다그에 합당한 십자가를 지워 주신 것이니내 마음을 쓰시라고 고개 들고 나아갈 것이다.

삶의 두 얼굴이것도 삶이다소중한 삶이다지는 것도 깨지는 것도 잃는 것도 모두삶의 필수적인 일부이다이기고 때리고 얻는 것만 의미 있다고말한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고통조차도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보물 같은 한때의 경험과 추억으로기억되리니 나는여기서 겪은 고통과 상실과 부자유를그만큼의 기쁨과 성취와 자유로 갈음하리라.

날벼락처럼 모든 것을 앗겼으나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내게 무엇이 남았나를 생각해 보았다명예 타이틀 지위는 모두 잃었으나나 자신은 앗길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것임을그 진리를 아주 늦게 아주 힘들게그러나 경외롭게 깨달았다나는 나이며 나의 고유함그동안 나를 구성했던인성 자존감 지성 판단 믿음 등은오직 나의 것이며 아직 건재하다이제 하나씩 건져 올려 향후 내 삶의재료로 만들어 갈 꿈에 부푼다그래 나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포기하지 말고 가 보는 거야 이 길 끝까지결국 이생에서도 나 그리고 저 생에서도 나고유하며 결코 소멸되지 않는 존재는 나이니까.

삶은 멈추지 않는 파도와 같고시작과 끝이 없는 둥근 모양이라고어디서 시작하든어디서 끝이 나든그 궤적은 연이어 있는 것이라고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그 깊이에 버금가는 높이는 필연이라고그러니 가장 낮을 때 포기 말고가장 높을 때 경계하라고 하지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구덩이와 아찔한 절벽으로 가득하다고인정할 밖에.

하도 하도 안되다 보니하도 하도 역시나이다 보니이젠 혹시나도 내려놓고앞서가며 최악을 미리 준비하며마음을 다지다 보니갑자기 날아든 아주 작은굿뉴스에 죽은 줄 알았던재가 된 줄 알았던마음이 반응한다아 소박해진 기쁨의 역치최악 속에서도 살아지게 마련이다.

마음을 내려놓자고수천만 번 아니수억 번을 다짐했다내려놓자내려놓자다 내려놓자그런데 어느 순간마음이 불끈한다이 지독한 악과 대치하여나는 끝 간 데 없는 시험을견디고 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일 거예요그러나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당신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언젠가 괜찮아지겠지요그때는 괜찮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겠죠괜찮다고 말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그날이 오면 당신은 내 눈만 보아도내가 괜찮은 줄 알 테니까요그날이 오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그때가 언제일지 알지 못하지만반드시 올 것을 믿기에나는 미리 괜찮다고 말해도정말 괜찮다고 생각해요당신은 그러니 믿어 주고 견뎌 주세요그저 내 말을 받아 주세요.

예전에 나는 화를 못 이겨 그에게
‘함부로‘ 말했다거칠게 날아드는 화살로 고슴도치가 되면서도그는 피하지 않고 다 맞았다사나운 퇴장과 고요가 찾아오면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좀 더노력하리다"라고 그는 말했다위로보다는 부끄러움을 불러왔던그의 인내를 먹으며 나는 성장했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당신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위로도 반성도 내가 하겠다고그리고 우리는 둘 다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시간아무리 힘든 중에도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지그리고 사람들은 말을 해시간이 약이라고무정하고무심하고무감한모든 것들이 약이 되는 시간잠시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고모든 것을 잊어 보자망각에 나를 맡기고시간의 회복력을 믿어 보자.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물구나무서서 바라보려면무한한 인내와 힘이 필요하다무심한 중력이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위에 얹히면세상이 제 편인 듯 보여도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은언젠가 엎어져야 할 세상이기에물구나무선 이여,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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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순간이다 - 삶이라는 타석에서 평생 지켜온 철학
김성근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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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은 야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지도자로서 수없이 많은 선수를 만나고 가르치며 인간의 잠재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 깨달았고, 자식을 위해 더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을 가슴에 새겼다.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되는 승부 속에서 시련, 위기, 좌절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인생을 배웠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한계도 거북이처럼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끝내는 넘어설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별반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 걸음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김성근은 이 책을 통해 ‘인생은 순간순간의축적‘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담담한 응원을 건넨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는 그런 기회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니, 기회라기보다는 마치 순리처럼내게 찾아온 일들이었다.
그러니 매일의 순간순간을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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