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 깊은 절망과 더 높은 희망
정경심 지음 / 보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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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재난은암이든 사고든 재해든 그 무엇이든삶을 리셋하는 효과가 있다대개 회복까지는지리한 시간이 걸리기에오롯이 지나온 삶에 대한 대차대조의여유가 주어진다이렇게 리셋을 하고 나면 비 갠 뒤의마른 땅처럼삶의 토대가 더 단단해진다그러니 이제 새로 짓기만 하자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었던 집을.

아무리 안타까워도다 이해할 수도다 나눌 수도 없다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도예수와 열두 제자도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그것이 우리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아무리 안타까워도모든 것을 다 공감할 수도다 내어 줄 수도 없다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고난의 시간이며 결핍의 시간그 고독조차 섣불리나눌 수도 이해할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면나는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살 수 있다사 년 아니 더 길어질지도 모르는 고난 이후에도나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그러나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르리라마음속에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하리라평생 누구라도 한 번 겪을까 말까 한한 시절 누구라도 한 번 겪을까 말까 한시련으로 단련되어 정금같이 나아갈 것이다그에 합당한 십자가를 지워 주신 것이니내 마음을 쓰시라고 고개 들고 나아갈 것이다.

삶의 두 얼굴이것도 삶이다소중한 삶이다지는 것도 깨지는 것도 잃는 것도 모두삶의 필수적인 일부이다이기고 때리고 얻는 것만 의미 있다고말한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고통조차도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보물 같은 한때의 경험과 추억으로기억되리니 나는여기서 겪은 고통과 상실과 부자유를그만큼의 기쁨과 성취와 자유로 갈음하리라.

날벼락처럼 모든 것을 앗겼으나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내게 무엇이 남았나를 생각해 보았다명예 타이틀 지위는 모두 잃었으나나 자신은 앗길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것임을그 진리를 아주 늦게 아주 힘들게그러나 경외롭게 깨달았다나는 나이며 나의 고유함그동안 나를 구성했던인성 자존감 지성 판단 믿음 등은오직 나의 것이며 아직 건재하다이제 하나씩 건져 올려 향후 내 삶의재료로 만들어 갈 꿈에 부푼다그래 나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포기하지 말고 가 보는 거야 이 길 끝까지결국 이생에서도 나 그리고 저 생에서도 나고유하며 결코 소멸되지 않는 존재는 나이니까.

삶은 멈추지 않는 파도와 같고시작과 끝이 없는 둥근 모양이라고어디서 시작하든어디서 끝이 나든그 궤적은 연이어 있는 것이라고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그 깊이에 버금가는 높이는 필연이라고그러니 가장 낮을 때 포기 말고가장 높을 때 경계하라고 하지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구덩이와 아찔한 절벽으로 가득하다고인정할 밖에.

하도 하도 안되다 보니하도 하도 역시나이다 보니이젠 혹시나도 내려놓고앞서가며 최악을 미리 준비하며마음을 다지다 보니갑자기 날아든 아주 작은굿뉴스에 죽은 줄 알았던재가 된 줄 알았던마음이 반응한다아 소박해진 기쁨의 역치최악 속에서도 살아지게 마련이다.

마음을 내려놓자고수천만 번 아니수억 번을 다짐했다내려놓자내려놓자다 내려놓자그런데 어느 순간마음이 불끈한다이 지독한 악과 대치하여나는 끝 간 데 없는 시험을견디고 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일 거예요그러나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당신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언젠가 괜찮아지겠지요그때는 괜찮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겠죠괜찮다고 말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그날이 오면 당신은 내 눈만 보아도내가 괜찮은 줄 알 테니까요그날이 오기를 묵묵히 기다립니다그때가 언제일지 알지 못하지만반드시 올 것을 믿기에나는 미리 괜찮다고 말해도정말 괜찮다고 생각해요당신은 그러니 믿어 주고 견뎌 주세요그저 내 말을 받아 주세요.

예전에 나는 화를 못 이겨 그에게
‘함부로‘ 말했다거칠게 날아드는 화살로 고슴도치가 되면서도그는 피하지 않고 다 맞았다사나운 퇴장과 고요가 찾아오면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좀 더노력하리다"라고 그는 말했다위로보다는 부끄러움을 불러왔던그의 인내를 먹으며 나는 성장했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당신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위로도 반성도 내가 하겠다고그리고 우리는 둘 다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시간아무리 힘든 중에도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지그리고 사람들은 말을 해시간이 약이라고무정하고무심하고무감한모든 것들이 약이 되는 시간잠시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고모든 것을 잊어 보자망각에 나를 맡기고시간의 회복력을 믿어 보자.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물구나무서서 바라보려면무한한 인내와 힘이 필요하다무심한 중력이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위에 얹히면세상이 제 편인 듯 보여도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은언젠가 엎어져야 할 세상이기에물구나무선 이여,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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