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하동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후 4시 무렵. 통영을 벗어나 섬진강이 보이면서부터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통영은 바다를 끼고 있는 복잡한 소도시였지만 하동은 너른 들판과 빙 둘러싸인 푸른 산이 여행의 피곤함을 단박에 씻어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평사리 입구에서 저녁을 먹고 어둑해질 무렵 최참판댁에 도착했기 때문에 동네 구경은 아침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교장샘과 하동군청의 인연으로 드라마 <토지> 세트장인 최참판댁에서 하룻밤 자는 특별 대접을 받았다. 저녁을 먹고 사랑채 마루에서 이어진 하동군청 문찬인 과장님의 해박한 악양면 평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박경리 선생이 평사리를 <토지>의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동(河東)은 섬진강의 동쪽에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란다. 그리고 악양은 지리산 줄기인 형제봉이 중국의 악양을 닮았다 하여 정여창(조선 초기 성리학의 대가로 연산군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으며 무오사화로 유배되고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됨) 선생이 섬진강가에 악양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던 데서 유래했다.
악양이라고 발음했을 때 느껴지는 강한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악양(岳陽)이라는 말에는 작고 따사롭다는 뜻이 들어 있다. 악양은 한일 합방 후 의병 활동이 많았고, 한국 전쟁 때는 남부군이 조직된, 우리 근현대사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땅이다. 박경리 선생도 악양은 이상향의 땅이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악양은 한나라당 텃밭에서 민노당 군의원이 당선되는 신기한 동네라고...
평사리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아니 거느리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최참판댁의 아침 6시 무렵.
최참판댁 마당에 서 있으면 56만 평이나 되는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드넓은 땅에서 <토지> 속 인물들의 흥망성쇠가 나온다.
우리가 최참판댁을 이용한 시간이 저녁 7시 30분부터 아침 7시까지라서 다른 방문객이 없어서 조용했다.
딸아이와 나는 윤씨부인이 기거하던 안채에서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고소산성에 올라가기 전 최치수의 방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 틈에 우리 딸이 끼어 있다. 대학생 언니들을 사귀어서는 졸졸 따라다니며 잘 놀았다.
서희 어머니 별당아씨가 기거하던 별당. 사랑채하고는 다르게 연못도 있고 예쁘다.
최참판댁 아래로는 용이네집, 월선이네 주막 등 소설 속 인물들이 살던 평사리를 그대로 재현해놓아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었고, 어디선가 임이네가 악다구니를 하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최참판댁을 뒤에서 감싸고 있는 고소산성이다. 고소산은 지리산의 산줄기로 해발 300미터 정도 되는데 동학의 마지막 격전지였다고 한다. <토지>에서 구천이가 밤마다 헤매다 돌아오는 산이기도 하다. 아침도 안 먹고 오르느라 힘 좀 뺐지만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고소산성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악양면 들판을 끼고 흐르는 섬진강이 시원하다. 그리고 아름답다.(아름다운 이 강을 그냥 내버려 두시라!!) 섬진강과 평사리 마을은 소설 속에서처럼 시끌벅적하지 않고 고요해서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하루 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고소산성에서 내려와 아침을 먹으러 가는 중이다. 이번 여행지인 통영과 하동은 8년 전에도 한 번 들렀던 곳이라 예전 모습과 비교되곤 했는데 평사리의 변신에 깜짝 놀랐다. 8년 전 평사리는 최참판댁 기와집 몇 채만 지어진 시골 마을 그 자체였다. 동네 입구에는 할머니들 몇 분이 나와 과일이랑 푸성귀를 팔고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한옥체험관, 평사리문학관, 식당,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관광 단지가 되어 있었다. 소설 <토지> 속의 평사리 사람들처럼 현재 평사리 사람들도 최참판댁 덕분에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사리는 <토지>의 마을 그 자체였다. 문학 작품 하나가 마을과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
고소산성에서 내려와 아침상을 받고 있는 우리 딸. 주차장에서 쭈욱~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읍내장터라는 식당이 나오는데 이번 여행길에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는 게 우리 딸과 나의 평이다. 여기서 먹은 음식은 자연산 재첩국 정식~
그리고 이 아줌마의 친절함과 마음 씀씀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동 여자들의 30%가 섬진강 건너 전라도에서 시집 왔다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걸 보니 이 분도 그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고추무침과 매실장아찌가 정말 맛있어서 집에 와서도 내내 생각났더라는...
하동은 언젠가 가족과 함께 다시 가보고 싶다.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내가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을 다 돌아보지 못해 아쉬움이 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