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두 번 소설 토지학교 수업이 있는 날마다 다른 일이 꼭 겹치곤 한다. 5월 8일 어버이날에도 수업이 있어서 친정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만 했다. 5강을 맡으신 분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30년 동안 계셨던 김형국 교수님이었다.
박경리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지런히 놓인 돌이 예쁘다. 이 돌은 선생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나가셔서 직접 주워다 깔았다고 한다. 돌을 밟을 때마다 그 분의 손길이 느껴져서는 뭉클해진다. 요즘 선생의 집 마당도 서서히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연휴 때문인지 차가 많이 막혀서 교수님이 30분이나 늦게 오셨다. 5강의 제목은 박경리 주변에서 오고 간 말, 말, 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미리 준비된 강의록을 살펴보니 남편도 들으면 좋을 것 같아 직원들에게 허락을 받은 후 불러서 함께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에 대한 첫 인상은 단정함과 깐깐함 그 자체였다. 도시 계획을 하는 분이 박경리 선생과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지부터가 궁금했다.
교수님은 <토지>가 드라마로 나오고 있을 때 처음 소설을 읽으셨다고 한다. 당시 나온 3부를 세 번이나 읽은 후 군부 세력에 의해 폐간된 <뿌리깊은나무> 최종호(1980년 6,7월 합병호)에 <토지> 속 주요 인물들의 행적 연대기를 현대도시이론으로 추적한 <소설 토지의 주인공들과 오늘의 도시 생활>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원주에 와서 처음 박경리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은 당신이 기록해둔 주인공의 연보와 꼭 일치하는 걸 확인하시더니 문학평론가 중에도 <토지>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평을 쓰는 이가 있다는 말로 교수님을 칭찬하셨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 박경리 선생과 김형국 교수님은 어머니와 아들 같은 인연을 맺었고, 토지 개발로 단구동 집이 헐리게 되었을 때 교수님의 활약 덕분에 선생의 집이 지켜질 수 있었다.
합죽선에 박경리 선생이 친필로 적어준 시가 있다며 보여주셨다. <토지> 4부를 쓰던 무렵 선생의 심경이 드러난 시 같다고. 빈 들판에/ 비들기/ 한 마리/ 가을비에 젖는다.
<토지> 5부가 완간되었을 무렵 단구동 토지개발사업이 한창이었고, 선생의 집도 수용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생의 집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문인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토지개발공사에서는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즈음 단구동을 찾았다가 불도저 소리가 낭자한 꼴을 직접 목격한 교수님은 서울로 돌아와 토지개발공사 관계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토개공 부사장이 문학을 좋아하는 분이었고, 단구동 집이 지금처럼 보존될 수 있었던 것. 문학의 가치를, 그리고 선생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일인가 모르겠다.
시끄러웠던 단구동 집 수용 과정 때문에 감정이 많이 상해 있던 박경리 선생은 토개공 부사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냉담했는데, 넉살 좋은 토개공 부사장의 한마디에 바로 마음이 풀리셨다고 한다. "선생과 토개공은 동업자입니다. 선생은 소설 <토지>를 팔아 살아가고, 우리 토개공은 대지 조성 사업으로 꾸려갑니다." 단구동 집을 둘러싸고 내내 말로 상처를 받던 선생의 마음을 녹인 것도 바로 마음을 알아주는 말이었던 것이다. 토개공은 그후 선생이 매지리 토지문화관을 조성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은 선생이 써놓은 토지문화관 조성 연혁이다.
천구백구십육년 한국토지공사(사장 이호계 김윤기)의 뜻깊은 출자금 사십억원과 작가(박경리)의 희사금 칠억오천만원, 김형국 교수의 노력을 기간으로 삼아 토지문화재단을 구성하고 토지문화관 건립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건물 부지는 토지공사 현장소장(김재성)이 선정하였으며, 설계는 동우건설(임금배)이, 시공은 현대건설(김충식)이 맡아 천구백구십팔년 십일월 준공을 보게 되었다.
얼핏 도시계획이 문학과 거리가 먼 분야처럼 보이지만 문학적 감수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도시의 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문학에서 위로를 받듯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도시라면 그곳에서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 관련자 중에 문학을 좋아하는 이가 없었다면, 그리고 김형국 교수가 없었다면 내가 박경리 선생의 단구동 집에 앉아 강의를 듣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개발도 도시를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4대강처럼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행복도 위로도 없을 것 같다. (2010년 5월 8일 강의)
강의가 끝난 후 조별 활동으로 원주시의 도시 계획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조에서는 박경리문학공원을 사색이 가능한 공간으로 넓고 여유 있게 설계했다.
도랑물이 흐르는 넓은 공원에 도서관과 창작이 가능한 공간도 하나씩 만들어놓아서 누구든지 산책길에 들러 책도 보고 글도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시민들이 직접 가꾸는 텃밭을 만들었는데 박경리 선생처럼 농사를 지으며 생명을 느끼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다. 우리 조장님이 결석을 해서 얼떨결에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 김형국 교수님은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수업중에 장욱진 화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길래 집에 와서 찾아보니 나무숲에서 나온 어린이 미술관 시리즈 중 <날고 싶은 화가 장욱진>을 쓰신 분이었다. 그 외에도 장욱진 화백에 관한 책이 여러 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