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부탁으로 계간 <한국자연공원> 봄호 원고로 쓴 글임.

예전에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국립공원과의 인연으로 만들어지고 자라고 살고 있으니 국립공원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탄생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근무하고 있고, 나는 그런 남편을 치악산국립공원에서 만났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딸과 4학년인 아들은 모두 치악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고, 남쪽 바닷가 다도해상국립공원이 있는 완도에서 몇 년을 뛰어놀며 자랐다. 강원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전국을 누비며 살다가 우리 땅으로는 좁다며 작년엔 남편의 미국 국립공원 연수를 틈타 온 가족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미국 서부 지역 9개 국립공원을 둘러보고 왔다. 현재는 맨 처음 우리 가족이 탄생했던 원주에 다시 정착해서 살고 있다. - 가족 소개 -

2009년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뜻깊은 해였다. 남편이 미국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인 자이언과 브라이스 캐년에서 3개월 동안 미국 국립공원 레인저들과 함께 근무를 했는데 그 덕에 우리 가족도 미국 국립공원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근무를 마쳐갈 무렵 남편은 혼자 보기 아깝다며 가족들을 불러들였고, 영어도 잘 못하면서 지도 몇 개만 들고 미국 서부 여행을 단행했다. 나도 갑작스런 여행이었기에 국립공원의 역사가 미국의 옐로스톤에서 시작되었다는 정도의 아주 짧은 귀동냥만 한 채 떠났을 뿐이다.  

내가 미국의 국립공원 55개 중 이름이라도 들어본 곳은 그랜드 캐년, 요세미티, 옐로스톤 정도였다. 자이언과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도 남편이 근무를 해서 알게 된 곳일 뿐 미국 국립공원에 대해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가서 보니 국립공원을 빼놓고는 미국 서부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부 지역에 대표적인 국립공원들이 몰려 있었다. 우리는 캘리포니아 주, 애리조나 주, 유타 주, 네바다 주에 있는 9개의 국립공원을 순례할 계획을 세웠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 자이언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캐피톨리프 국립공원→ 아치스 국립공원→ 캐년랜드 국립공원→ 데쓰밸리 국립공원→ 세콰이어 국립공원 순으로. 

이렇게 많은 국립공원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미국 땅의 거대함이었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해야 다음 행선지에 닿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반나절 운전만으로도 국토 종단이 가능한 땅에서 살던 내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지도상으로는 두어 시간이면 갈 것 같은데 네다섯 시간을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워낙 넓은 땅을 한 장의 지도 위에 그려 넣다 보니 축척의 감이 우리랑은 다른 듯했다. 맨처음 방문한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황무지 지역을 서너 시간 달려도 집 한 채, 차 한 대 만나지 못할 때는 두렵기까지 했다. 

미국의 3대 캐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랜드 캐년,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을 여행할 때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억 년 전으로 와 있는 착각이 들곤 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지형들을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면서 지구 형성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평선과 맞닿아 있던 그랜드 캐년은 평지 같아 보이지만 해발 2000미터가 넘는다고 했다. 191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그랜드 캐년은 직접 가서 보니 그랜드(Grand)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거대한 협곡이었다. 콜로라도 강물이 드넓은 평원을 수십억 년 동안 깎아서 만들어놓은 작품이 바로 그랜드 캐년이기 때문이다. 계곡까지의 깊이가 1500미터나 되는데 지금도 계속 깎여서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제일 짧은 협곡 트레킹 코스도 1박 2일을 잡아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깊은지 그 길을 걸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 보니 안내판 하나도 더 꼼꼼하게 챙겨보곤 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과는 지형도 다르고 체계도 많이 다른 듯했지만 아이들이 지리 공부를 하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탐방안내소(Vsitor Center)가 몹시 부러웠다. 우리가 방문한 모든 국립공원에는 탐방안내소가 곳곳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립공원에는 탐방안내소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여행객이 공원 입구에 있는 탐방안내소에 먼저 들러 정보도 얻고 여행 계획도 짜고 있었다. 그랜드 캐년 탐방안내소는 우리가 가 본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외부에 있는 대형 설명판엔 공원에 대한 역사나 지질학, 야생 동물에 대한 정보들이 실려 있어서 예습을 많이 못하고 여행을 간 우리 가족에게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남편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레인저인지라 미국의 국립공원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탐방안내소는 공원에 대한 소개와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교육에도 한몫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던 주니어레인저 프로그램은 국립공원마다 각각 다르고 독특하게 운영되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간단한 책자를 하나씩 받아서(보통은 무료였지만 자이언에서는 1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함) 해당 국립공원에 대한 공부를 한 후 레인저의 검사를 통과하면 선서를 하고 주니어레인저 뱃지를 받았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다 하려면 최고 3~4시간은 공원 안에 머물면서 지시한 임무를 이행하고 명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하고 퍼즐도 맞추다 보면 방문한 국립공원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고, 국립공원과 환경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게 된다. 선서를 하고 주니어레인저 뱃지를 받는 과정에서 뿌듯함을 느낀 우리 아이들도 방문하는 국립공원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했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와 국립공원을 이어주는 데 큰 몫을 하는 훌륭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에 우리나라 국립공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립공원에는 탐방안내소 내에 책과 기념품을 파는 서점(Book store)이 같이 있었다. 미국은 아무리 오지에 있는 국립공원이라 해도 서점이 꼭 있었는데 규모의 차이는 좀 있었지만 국립공원 혹은 환경과 관련된 책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그렇게 훌륭한 서점이 있다는 게 정말 부러웠다. 서점에는 다양한 기념품들이 많았지만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은 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에도 이런 서점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국립공원과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거대한 규모나 교육적인 측면과 함께 진정으로 나를 감동시킨 것은 작은 흔적도 소중하게 다루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정신이었다. 국립공원 지정 초기의 사무실 건물이나 역사 박물관을 겸한 기념품 판매장 같은 건물도 낡고 보기 싫다고 해서 함부로 철거하지 않고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또 아무리 유명한 국립공원이라도 주변에 인공적인 시설이나 요란한 편의 시설 같은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국립공원에 놀러가면서 먹을거리 걱정은 안 할 정도로 주변에 식당이나 가게가 많다. 하지만 미국의 국립공원 지역에서 그런 풍성한 먹거리를 기대했다간 쫄쫄 굶을 수도 있다는 걸 두어 군데 국립공원을 방문해 보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도시를 만나면 제일 먼저 마트에 들러 간단한 식료품들을 샀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불편함마저 즐기도록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미국의 9개 국립공원을 여행하는 동안 신기하고 혹은 낯설고 혹은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수없이 경탄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초록으로 뒤덮힌 우리나라의 국립공원들이 내내 그리웠다. 눈을 들어 보면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질리지 않고 계절마다 다른 빛깔과 느낌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우리만의 아름다운 자연이 한국인인 나와 궁합이 딱 맞는구나 싶었던 것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을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미국 여행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를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어느덧 1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집을 나서면 늘 치악산 국립공원을 바라보며 고마움을 느끼곤 하는데,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품어주는 혜택만큼 사람들도 자연을 돌아보고 사랑한다면 우리의 국립공원도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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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10-04-0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 다녀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여행기를 반도 쓰지 못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론 더이상 여행기를 쓰지 못했다. 남편의 부탁으로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간신히 쓴 글이다.

엘리자베스 2010-04-0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드 캐넌의 광대함에 그만 넋을 잃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언젠고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소나무님의 글을 읽다보면 참크래커 먹는 기분이 들어요. 담백하면서도 자꾸 손이 가는...

순오기 2010-04-06 23:02   좋아요 0 | URL
엘리자베스님이 소나무집님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분이셨군요.
내 이질녀가 원주에 살아서 작년 8월에 다녀왔는데, 언제 기회되면 뵐 수 있을지도...^^

소나무집 2010-04-07 08:50   좋아요 0 | URL
저도 혹 기회가 된다면 배낭 메고 1박 2일 꼭 해보고 싶은 곳이에요.
참크래커 저도 좋아해요.^^

순오기 2010-04-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아빠도 알라디너셨군요. 반가워라~ ^^
벌써 다녀온지 일년이 되어가네요. 일목요연한 정리가 돋보였던 페이퍼가 중단돼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니 좋은데요.

소나무집 2010-04-07 08:54   좋아요 0 | URL
엘리자베스님이 울 아파트에 사신답니다. 처음 원주에 관한 페이퍼 올렸을 때바로 달려와서 비밀 댓글을 남겼더라구요. 가끔 만나구요, 어제는 아들들 머리 깎으러 미용실도 같이 갔어요. 알라디너가 원주에 많으니까 순오기님 언제 오시거들랑 모두 모엿! 할게요.
지우아빠는 책만 사는 알라디너죠.^^ 미국 다녀온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어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놀러다닌 이야기 쓰기가 미안스러워서 중단했는데 못 쓰고 말았어요. 계속 쓰라는 아이들의 협박도 있고 해서 조만간 다시 기억을 떠올려 볼까 싶어요.

토토랑 2010-04-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부러워요.. 저두 아이들 크면 꼭.. 데스벨리랑 국립공원들 가보고 싶어요~
소나무집님 페이퍼보고 다시금 활활!! 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짜 함 세워봐야겠어요

소나무집 2010-04-12 08:46   좋아요 0 | URL
네, 꼭 가보세요. 꿈을 꾸고 계호기을 세우면 진짜 이루어질 거예요.
저희가 그랬던 것처럼요.

꿈꾸는섬 2010-04-0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전에 소나무집님 페이퍼 기억나요. 정말 멋진 사진들도 많았지요. 그때 글 올라오는 거 참 많이 기다리며 읽었어요.ㅋㅋ

소나무집 2010-04-12 08:46   좋아요 0 | URL
멋진 사진들이 많아서 계속 여행기 올려야 되는데 마음속에서만 생각하네요.

같은하늘 2010-04-08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구... 전 소나무집님을 안지 얼마 안되어 모르는 일인데 찾아서 봐야겠어요. 어디 있나요?^^

소나무집 2010-04-12 08:47   좋아요 0 | URL
미국 여행 카테고리 안에 모아놓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