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연애하다’라는 이벤트 제목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남자들이었다. 20대 내 주변에서 서성거렸던 남자들에 대한 기억.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20대를 기쁘게도 우울하게도 만들었던 추억 속의 그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대학 시절 나는 좀 과격하고 터프한 걸 멋있어라 했다. 취향도 성격도 여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남자들이 내 주변에 있을 때 난 ’연애’라는 말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내 주변을 맴돌며 연애와 관련된 신호를 보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난 그 남자들이 항상 있는 사람들인 줄만 알았다. 학교에 가도, 집에 가도(오빠가 다니는 학교 주변에서 오빠랑 자취한 덕에) 남자들이 들끓었으니까.
책과 연애한 이야기를 하라는데 뜬금없이 남자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대학 시절의 난 책을 읽는 것도, 책을 사는 것도 참 좋아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지금도 그 버릇 못 버리고 있지만. 그래서 내 주변을 서성대던 남자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나를 어여삐 여겼거나 혹은 내가 좋아했던 그들에게 내가 준 건 마음이 아닌 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책은 내 인생의 가느다란 소통로이면서 지치지 않는 중매쟁이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한 이후 거의 들여다본 적이 없는 김지하, 양성우, 신경림, 박노해, 김광규, 황지우... 등의 시집은 지금도 여전히 나의 책꽂이 몇 칸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시집은 80년대 대학 주변 서점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투사가 아니어도 이런 시인들의 시집을 주고받았다. 꺼내 볼 것도 아니면서 지금껏 그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은 제목만 바라보아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아련하게라도 추억하고 싶은 젊은 날이.
시인이 될 것도, 시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시를 읽던 그 시절 문지나 창비 시선은 돈이 넉넉하지 않은 대학생의 마음을 전하기에 딱이었다. 지금이야 시집 한 권에도 만원 가까이 하지만 20년 전에는 학교 앞 서점으로 달려가 2000원이면 유명한 시인의 마음과 인생을 통째로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시인의 마음인 척하며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도 있었다. 늘 나에게 친절했던 선배나 동기들에게 메모 한 줄 써서 내밀 수 있었던, 사소했지만 아름다운 물건, 그게 바로 시집이었다.
남자들이 우글대던 대학을 졸업한 후 나의 본격적인 연애는 짝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슬프게도 정작 내가 진짜 연애를 하고 싶은 남자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이미 연애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찍이서 바라만 보았던 남자들과 나 사이에도 늘 책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남자랑 연애를 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 선물할 책과 연애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쓸쓸하거나 외로운 마음을 가득 담아 밑줄을 긋고, 또 메모를 하면서...
K를 처음 만난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책보다는 정치, 경제에 더 관심이 많은 K에게 난 늘 문학과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지금 그가 기억나는 것은 헤어지던 날까지도 난 그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어색하게 그 책을 들고 지하철을 타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왜 그리 미련스럽게 책을 선물했는지... 만약 책이 아닌 다른 것을 선물했다면 나의 연애는 좀더 일찍 성공했으려나?
또 한 남자, 짝사랑인 줄 알면서도 끈길지게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던 S는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오빠를 통해 S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던 나는 그가 다니던 회사로 책을 보내기 시작했다. 매달 똑같은 책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S에게 보냈고, 한 권은 내가 읽었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어 그 책을 읽었는지 확인하곤 했다. 꽤 오랫동안 책을 보냈던 것 같은데 무뚝뚝한 그가 내게 건네준 건 쓸쓸함뿐. 그런데 지금도 알 수 없는 건 왜 S가 책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한 건지... 결혼하기 전에 물어봤어야 하는데. 여기저기 뜨르르르 소문났던 그 짝사랑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남자들에게 선물했던 수많은 책들을 생각하면 책선물을 받은 적은 의외로 많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신촌 홍익문고 2층이었는데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그의 손엔 책이 들려 있었고, 내게 책을 먼저 선물하는 선수를 쳤다. 오우, 세상에! 내가 그토록 책선물을 하며 연애를 걸고자 했던 남자들은 다 떠나갔는데 나에게 책선물을 하며 연애를 걸어오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음, 인연은 따로 있었음이야! 책은 그렇게 내 곁에서 나의 마지막 연애를 더 따끈따끈하게,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혼과 함께 나는 더이상 남자들에게 책선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과의 연애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며(알라딘 플래티넘 멤버십을 일년 내내 유지할 정도로) 책과 연애중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의 연애사에 줄기차게 함께 했던 책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꼭 해줘야 할 것 같다. "책아,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