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 창비아동문고 233
김소연 지음, 장호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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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 참 예쁜 이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열네 살이나 먹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대로 '아기'로만 불릴 뿐이다. 1910년대 우리 역사에서 여자의 이름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시집 가버리면 그만인 여자에게 제대로 된 이름은 크나큰 사치였을까? 누구의 며느리로, 누구의 안사람으로, 누구의 어머니로만 의미가 있었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외치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 생각하면 이름 하나 얻은 게 뭐 그리 소중하랴 싶지만 우리네 할머니 중 이름다운 이름 하나 없이 세상을 살다 간 언년이나 막딸이가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보자.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주민등록에 이름이 없어 정씨나 김씨로 기록된 할머니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얻은 명혜는 어쩌면 우리 여성사에 있어 혁명인지도 모른다.

'명혜'는 그냥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수많은 '갓난이'나 '아기' 속에 묻힐 수도 있었던 한 여자를 온전한 인격을 갖춘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명혜가 이름을 얻지 못했다면 서울에 있는 여학교에 갈 수도 없었을 것이고, 식민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겪으며 주관이 뚜렷한 여성으로 거듭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혼보다 공부가 더 하고 싶었던 명혜의 용기는 당시로선 정말 대단한 것이었음을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동생 명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내는 세상을 알면 알수록, 아녀자는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고 믿는 아버지 송참판을 설득해 서울로 유학을 떠나는 명혜는 당시 사람들의 눈엔 정말 유별나게 보일 뿐이다. 아들 명규는 일본 유학까지 보내지만 딸이 신식 이름을 호적에 올리고 여학교에 가는 것을 마땅찮아 하면서도 끝내 허락하는 이유가 개화된 세상에 시집을 잘 보내기 위해서다. 이게 달라진 세상에 아버지 송참판이 적응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명혜는 여학교에 들어가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친구 낙경과 병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여의사를 만난다. 그러는 과정에서 명혜의 운명은 슬슬 변해간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란 부잣집 딸의 눈에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 민족 여성들의 삶이 보인다. 더구나 독립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은 명규는 명혜에게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눈을 감는다. 명혜는 아픈 민족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품는다.

미국 유학을 가야만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시대에 아버지 송참판은 또 한번 넘어야 할 산이었다. 집안을 이끌어갈 아들을 잃은 송참판은 날개 꺾인 새처럼 힘을 잃는다. 더구나 독립 운동을 하다 죽은 아들은 군수를 꿈꾸던 송참판의 족쇄가 되고 만다. 명혜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아들을 잃고 집안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변하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 안씨부인이다. 안씨부인은 송참판의 끈질긴 반대를 물리치고 명혜의 유학길을 열어준다. 여자는 그저 남편 따르는 법만 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안씨부인의 변화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기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게 한 결코 작지 않은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명혜가 유학을 떠나는 걸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작가는 그 후 명혜가 돌아와 어떤 의사가 되었노라고 알려주는 친절함은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여성이 명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남편과 부모님, 그리고 시부모님께 고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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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혜,가 생각나요. 명혜라는 이름에도 삶의 애환이 많은 애잔함이 묻어나구요.
저도 아직 이름으로 불려요. 옆지기나 시고모님이나 친정어른들이나.. ^^

소나무집 2007-07-11 08:59   좋아요 0 | URL
결혼하고 처음엔 시아버지께서 이름을 부르는 게 좀 민망하더니만 지금은 좋네요. 어떨 땐 아이들도 엄마 아빠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 부작용도 있어요.

씩씩하니 2007-07-1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의사가 되었을지..느껴져요...민초들을 위해서 자기 의술을 소중히 부릴 줄 아는 그런 의사가 되었을테지요.
이상하게..남자보다는 여자가 변화에 쉽게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 같아요..
저희 할아버지도 아빠가 한학만 공부하면 된다고 중학교를 안보낸다구 하셨대요...
할머니가 야반도주를 시키고 할아버지 몰래 쌀 팔아 학비를 대셨다지요...
교직생활로 당신의 삶을 살아가신 아빠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밑거름을 뿌려주신 것이 바로 할머니셨던 셈이에요..
참 많이 들어온 책인대..아직 읽진 못했어요..이번 주가 가기전에 읽어보아야지...ㅎㅎ

소나무집 2007-07-1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큰딸과 같이 읽어 보세요. 여자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본인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