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워낙 인기가 좋길래 한 번 살짝 쳐다보았는데, 확실히 처음 프롤로그부분에서는 나를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가스통 바슐라르를 추모하며' 라니. 와우. 이런 류의 책은 사실 소위 말하는 '아는 만큼 보이는 책' 이다. 이런 말을 끄적거리는게 좀 웃기긴 하지만.. 어느 독서에서든 배경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뽑아낼 수 있고, 혹은 뽑아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지적 역량을 무한히 펼쳐서 비교를 하든지 대조를 하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의 놀람이 중반부 이후에서는 점차 당황스러움으로 바뀌는 것 있지. 중간 중간에 논리적 비약이 엿보이고 (심지어 문맥상으로도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다.)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엄밀하지 않은 티가 난다. 저자 미셸 투르니에는 원래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이 책이 인문 서가에 꽂혀있지 않고 소설 서가에 꽂쳐 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이 책의 내용이 어떤 건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구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을 범주로 묶어서 낸 책, 이라고. 이 문장 또한 엄밀하지는 않지만 일부의 진실을 품고 있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불의 정신분석.

방금 언급한 책이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이라면, 과연 얼마나 알아야 책의 내용을 골수까지 뽑아먹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다는 것의 정의 자체도 확립되어져있지 않고, 내 멋대로 안다, 라는 말을 독서를 많이 해서 지식이 많다, 라고 규정한다고 할 지라도 출판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수많은 저작물들이 쏟아져나오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수많은 책을 다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물론 나는 안다는 것의 정의를 저렇게 내리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그러나 어쨌든 아는 만큼 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일부 찾아보는게 좋지 않을까. 책에서 '가스통 바슐라르'를 추모한다고 써져있으면 적어도 가스통 바슐라르가 누구인지 정도는 훑어보는게 좋지 않겠나. 그래서 이 책을 여기다가 묶어놓는다. 여기서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가스통 바슐라르는 원래 과학자였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겪으면서 철학에 뛰어들게 된 학자다. 상대성 이론을 겪으면서 과학자에서 철학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좀 역설적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만큼이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겠지. 그 후에 엠페도클레스의 사원소설에서 착안하여 불, 물, 공기, 흙에 관한 상징과 이미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목시켜서 책을 썼으며 이 책은 그 책들의 첫 번째이다.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서 얇기 때문에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여기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신을 자처한 사나이, 그리고 끝내 화산에 뛰어들어 광기로 얼룩진 삶을 마감한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혹은 샤르트르의 '상상력' 그리고 '상상계'를 읽으며 빅토르 위고와 로르샤흐 테스트의 사이에서 이미지와 상징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킨 가스통 바슐라르의 제자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읽어도 좋겠다. 물론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은 어렵다. 매우 어렵다.

 

 

 

사르트르와 카뮈.

 샤르트르는 흔히들 많이 알고 있는 실존주의에 관한 철학자이지만 실제로 그는 이미지는 의식이다, 라는 문장으로 결론내리는 상상력 연구에도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사실 그의 상상력, 그리고 상상계에 바슐라르나 뒤랑과 같은 사람들이 조금은 빚지고 있다고 말해도 완전히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그리 쉽지 않고 맛으로 따지자면 숭고함을 뺀 쓴 사탕에 다름 없겠지. 이때 우리는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미셸 투르니에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에서 쓴 방법 그대로 일종의 범주를 만들어 대립시키거나 비교시키는 것이다. 그가 머리말에서 이렇게 비교시키는 방법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달았다, 라고 언급하지만 사실 이런 방법은 그리 새롭지는 않다. 이전에 자크 데리다도 대립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철학을 끌어와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내 지식이 얕으니 만만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만 걸고 넘어지면 미셸 투르니에는 말과 소를 대비시켰지만 범주의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 확장시켜서 샤르트르와 그의 친구였었던 카뮈를 비교시킬수 있겠다. 그런 결과로 아마 이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샤르트르와 하이데거와 같은 쌍으로도 충분히 한 쌍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 책이 어려워질테니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아니 친숙한 카뮈를 골라잡았다. 아, 물론 카뮈의 철학적 깊이가 얕다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실 이름만 들어도 뭔가 속에서 올라오지 않는가?

 

 

 

천국에서 지옥까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샤르트르에게는 카뮈보다 더 친근하고 깊이 있는 관계였었던 사람이 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여자다. 계약 결혼으로 워낙 유명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앗, 그러면 샤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묶어서 책을 쓴다면? 하는 생각으로 나온 책이 이 책이 아닐까? 심지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이니 적절히 찐득찐...큼큼 여하튼 내밀한 관계까지 보여주니깐 독자들의 (특히 나같은) 몰입도를 올려줄 수도 있겠고 말이지. 그러고보면 이 책은 2006년도에 이미 발간된 책이다. 위의 샤르트르와 카뮈가 2011년도에 나온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지.. 역시 남자와 여자 관계로 묶어서 적당히 철학이라는 조미료를 뿌리면 멋진 요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절대 샤르트르의 수많은 연인[...]들과 그들과의 일에 대한 고백[..]을 찾아본다고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젠장. 빨리 여자친구를 만들든지 해야지. 없는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헉 글내용이 산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나중에 천천히 읽어볼 생각으로 묶어둔 것이니...

 

 

 

아.. 춥다... 그래서 솔로는 웁니다... 그런데 솔로보다 더 싫은 것은 이제 다시 바빠진다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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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2-06 10:00   좋아요 0 | URL
다시 왜 바빠져요???응??

저는 가스통 바슐라르를 많이 좋아해요,,,쥘베르 뒤랑이 바슐라르의 제자였군요!!오호~~

가연 2012-02-06 18:22   좋아요 0 | URL
ㅎㅎ 일을 다시 시작해야되니깐..

네, 질베르 뒤랑이 제자라더군요.. 바슐라르의 철학세계는 정말 아름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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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인민의 탄생.

 

 

 

 

 

1.

 

 

  일전에 막을 내린 인기가 드높던 ‘뿌리 깊은 나무’ 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드라마라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못 보신 분을 위해서 잠깐 한 줄로 요약하여서 이야기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떤 고난을 겪었는가, 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훈민정음을 잘 이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 시대, 그러니깐 세종대왕이 갓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천대받던 문자였지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야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과 중국의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널리 알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사대부들의 반대와 지도부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의식부족으로 실제로 한글이 조금씩 이용되게 된 시기는 반포 후 100년이 지난 뒤였고,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에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현대 한글의 아버지인 주시경 선생이 연구를 거듭하고 나서였지요.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더라도 어쨌든 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는 드라마적인 과장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제법 준수하게 한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를 잘 드러내었던 수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제가 감명 깊게 본 부분은 바로 세종과 세종의 한글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극중에서는 밀본이라고 이름 붙여져있습니다만)의 수장인 정기준(극중에서는 정도전의 동생의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기준은 세종에게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겨우 말합니다. ‘그대가 준 문자를 통해서 백성은 지혜를 가지게 되겠지만 그만큼 더 지배층에게 쉽게 속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웃으면서 정기준의 말에 반박합니다. ‘때로는 백성들은 질 것이고 때로는 이길 것이나 그것은 상관없다. 그것이 역사다. 네 말 대로 백성들이 속더라도 결국에는 글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우고 또 싸워나갈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정말 감명깊게 본 장면이었습니다만 볼 당시에는 감명깊다, 라는 생각만 했을 뿐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인민의 탄생 - 공론장의 구조 변동’ 을 읽으면서 그 부분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저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2.

 

 

  처음 이 책의 ‘책머리에’ 부분과 ‘서론’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으며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사회과학을 교차시켜서 풀어나갈 것인지 기대가 되었었지요. 자신만만하게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서양산 이론에서 우리나라는 극복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과거를 죽였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근대가 과연 조선시대에서 어떻게 기원하였는지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탐색 여행을 펼치겠다고 합니다. 서론 중간 부분에 저자가 유길준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고 언급하기에 ‘아, 저자는 마치 여행기처럼 유길준의 생을 더듬어 자연스레 근대의 인민의 탄생을 밝히려나보다.’ 라는 생각도 했었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저의 기대는 뒤의 ‘개화기 인민’부터 시작되는 챕터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저자에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라는 생각 말이지요. 사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져서 발간된다고 하여 실망감을 조금 덜어보려고 했었지만, 각각의 권에서 다루는 것이 '근대적 인민의 탄생 과정' 과 '인민의 시민으로의 전환 과정' 이니 이 책의 논리 전개나 나중에 나올 책의 논리 전개가 크게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수많은 이론들을 적용시키지만) 결론적으로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의 맹아가 틔워졌다.’ 라고 말이지요.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료를 가져오지만, 중간에 저자는 기존 역사 연구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거시사와 미시사가 제대로 통합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행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이르러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서 연구를 하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자신만만함에 비하여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다지 독창적일 것도 없는 내용이며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짐작할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나라와 비교해봐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에 비해서 훨씬 풍부한 내용으로 책이 채워져 있지만 그 뿐입니다. 설령 저자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책 내부에 이미 모순이 심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민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 책 읽는 인민의 탄생, 곧 문해인민의 탄생 때문이라면 왜 책에서는 외국의 예를 들어서 그들도 일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독해’ 라는 능력이 배양되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할까요?

또한 한 가지 꼭 언급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책 머리에’에서 밝혔다시피 서양에서 들어온 사회과학의 무분별한 적용이 우리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서양산 사회과학이 아닌 다른 준거틀을 사용하여서 우리나라의 근대를 분석하는 게 옳겠지요.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버마스부터 시작해서 베네딕트 앤더슨, 미셸 푸코 등 담론장 혹은 공론장과 관련된 서양 학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이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한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서양산 사회과학을 벗어나기 위해서 쓴 책에 서양산 사회과학으로 주장을 펼친다니 말입니다.

 

 

3.

 

 

  사실 이 책이 이런 한계, 혹은 모순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라는 개념과 인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을 가지고 그 개념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근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를 파악하겠다는데 서구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면 다르게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야심차게 말했던 서양산 사회과학이 찢어놓은 한국 사회를 제대로 분석해내겠다는 논지는 처음부터 내부에 오류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분석되어지는 게 옳을까요? 물론 이렇게 비판을 한다고 해서 그러면 근대가 어떻게 맹아를 틔웠는지 알기 위해서 유교적 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 속해 있는 사람은 외부를 보지 못하는 법이며, 좀 더 자세히 수학적으로 부연한다면 A와 B라는 두 집합이 있고, 집합 사이에 B는 A라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과계가 있다고 할 때, B로 A의 모든 면을 판단하는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미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선이라는 집합에 포함되어있는 유교라는 집합을 가지고 조선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명제 ‘서양산 사회과학이 무분별하게 적용되었다’ 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서양산 사회과학을 적용하여 우리나라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근대의 인민으로 탄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던가, 아예 새로운 틀을 찾는 것이 옳겠습니다. 새로운 틀은 서양산 사회과학적 이론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론이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유교처럼 내부에 이미 속해있던 틀도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느 틀이든 소위 말하는 서양산 학문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화, 혹은 현대화는 일종의 서양화, 와 동일시 된지 오래며, 이런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변 국가들의 예를 끌어들여오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하는 것이 그나마 최상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의 중간부분에 보면 베트남이나 일본을 비교대상으로 가져와서 함께 분석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사실 정말 이 책에서 필요한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 근대인가?’ 라는 질문에 먼저 엄밀히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근대’ 라는 개념을 서양에서 들어온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내용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겠지요. 뿌리깊은 나무, 를 앞서 언급하였지요. 세종이 말했습니다. 백성은 지고 또 지겠지만 문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워나갈 것이라고. 제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했던가요, 저 대사 안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다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입니다. 저 대사야말로 근대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근대는, 그리고 현대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 등과 같은 어려운 말은 모두 옆으로 제쳐두고, 우리가 우리의 말과 함께 편지든, 블로그든, 트위터든 어떠한 것이든지 자유로이 우리의 말을 쓰며 싸워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나가는 시대, 라고 말이지요.

 

 

 

 

 

 

 

 

 

 

 

 

 

 

p. s. 아이구 추워죽겠네요..

p. s. 2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 중에도 이 책의 부제와 똑같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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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네히트 2012-02-01 09:37   좋아요 0 | URL
저도 뿌나가 생각났었는데요^^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2-02-03 21: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 뿌. 나.를 정말 재미있게봤었었지요
 

 

 

 

먼저 이번 신간 평가단 도서부터..

 

인민의 탄생.

인민의 탄생이라는 책인데.. 인간적으로 너무 재미가 없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나는 흥미있는 책만 구입하니깐.. 이런 애물단지같은 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이전에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같은 책도 처리하는데 정말 난감했지만 이번에는 더 곤혹을 겪는 기분이다. 이전에 리뷰를 쓸 때는 그래도 그나마 조금은 아는 부분이라서 조금 주절거릴수 있었는데 이 책에 관해서는 저자도 모르고 내용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책의 앞부분만 읽은 것으로 봐서는 하버마스의 분석틀을 가져와서 제목 그대로 인민의 탄생에 관하여 역사적 연원부터 시작해서 읊고 있는 책 같은데 애초에 나는 하버마스의 이론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게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모르는 상태이다. 앞에서 모르는 내용을 강의하면 수업시간에 잠이 온다던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별로 나에게는 흥미를 주지 못해서 읽다가 그만두다가 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단점은 했던 말 또하고 했던 말 또 설명하고.. 혹시나 독자들이 못따라올까봐 친절하게 설명해주려는 의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려고 하지만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은 문단이 반복되면 기분이 참.. 내가 잘 몰라서 책이 재미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잘 쓰여진 책이 아닌지 구분이 안간다.

 

 

 

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

가진 적립금을 모아서 산 책인데 나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처럼 제법 두꺼운 부피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말 얇은 책이다. 음.. 김훈의 '흑산' 보다 판형은 크지만 조금 덜하거나 비슷한 정도의 두께다. 사실 그래서 읽기 편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워낙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기에 제대로 책장을 넘겨보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우울할때는 인문학 책을 읽기가 좀 힘들다. 하버마스에 대해서 워낙 모르니깐 이왕 알아보는거 다른 현대 철학자들도 알아봐야지 하는 기분에 구매를 했는데 잘 한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전에 책 소개를 할 때 생각했던 것 처럼 제법 알차보이기는 하다.

나는 이런 책들 정말 좋아한다, 풋.

 

 

 

 

 

우주, 진화하는 미술관.

으아.. 이 책은 서점에서 조금씩 본 책인데, 표지에 사실 낚여서[..] 좀 읽어봤었다. 사실 표지만큼이나 화려한 그림은 뒤에 별로 없더라, 풋. 하지만 스케일도 크고 큼직큼직하며 자세한 그림들이 많이 실려있어서, 무엇보다도 총천연색의 알록달록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많아서 읽기 편했다. 아무래도 우주에 관한 것은 글보다 그림이 훨씬 와닿기 쉽거든. 은하에 대해서 백날 글로 설명해보라, 제대로 알아듣겠는가. 바로 사진 한 장 찍어서 보여주면 오오, 알아듣겠지.

우리가 블랙홀에 대해서 많이 모르는 이유도 그게 안보이니깐 그런 거 아니겠어? 시각화시키기도 어렵고..

 

 

 

 

 

 

6월 항쟁.

이 책도 눈여겨 본 책인데, 끝까지는 못읽었고 삼분의 일 정도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 말이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진짜, 말도 안된다.

 

(배경 설명을 조금 하자면, 박종철씨 고문 치사 사건에서 경찰이 고문한 것을 은폐하려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라고 말한 거다. 읽으면서 정말 과거의 일인데도 저절로 분노하게 되더라..)

 

 

 

 

 

사실 소설을 읽고 싶은데 딱히 끌리는 소설이 없다.

그러니깐 묻노니, 달달하고 정말 예쁜 해피앤딩의 사랑이야기, 없는가?

기욤 뮈소의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나는 크게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달달하고 해피앤딩..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상실의 시대를 벌써 다섯 번 넘게 본 것 같다.

나는 딱 상실의 시대와 같은 허무함이 소스로 뿌려져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가 읽고 싶다.

해피앤딩이면 더 좋고..

그러고보니깐 죽은 왕녀의 파반느, 같은 소설이 맘에 든다.

 

이런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한다.

감정을 달래려 소설을 읽다 보면 다시금 감정에 젖어 허무한 나날을 보낸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책 후면에 보면

요제프 크네히트(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이다)의 유고, 라고 해서

마치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헤르만 헤세가 글을 남긴게 있다.

앞의 시 넘기고 나면 뒤에 세 가지 이력서,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내가 처음 읽은 그 순간에서부터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부분이

그 세 가지 이력서, 라는 단편들 중 하나인 '인도의 이력' 이다.

대충 이야기를 설명하자면 인도의 어느 왕의 배다른 형제인 주인공이 어릴 때 쫓겨나서

목동 일을 하면서 살다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애욕에 젖어 살게 되고

그 후에 아내가 시찰 나온 왕에게 끌려간, 혹은 자발적으로 따라간 후에

왕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쫓겨서 숲에 들어갔는데

그 숲에서 현자를 만난거야.

현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기를 원했었는데

현자가 조용히 눈을 쳐다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미망이네, 미망이야'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안다.

 

그래서 힘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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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과학관이랑 대전 중앙 국립과학관에 다녀왔는데 과천과학관의 승리!

 

솔직히 과천 과학관이 더 좋은 듯.. (물론 비싸니깐 그렇다고 해도...)

 

입자물리와 천체물리는 얼핏 보면 별로 관계가 없는 것 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모든 질문은 하나로 귀결되니깐.. 왜 이 우주는 이런 모양인가??

 

 

 

 

이전에 신간 추천할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책이다. 사실 지나치게 된 이유는 표지가 별로 땡기지 않아서.. 풋. 그런데 서점에서 발견하고 몇 줄 읽어보았는데, 아니 이 책, 생각보다 괜찮았구나ㅠ

그래서 냅다 좀 읽어버렸다.

이런 류의 책을 읽으려면 사실 독자의 입자 물리에 대한 기본 상식도 좀 있기는 있어야 된다. 보손이 어떻고 페르미온이 어떻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표준입자모형이지만 굳이 검색할 이유가 없으니깐 검색안하게 된다. 그런 독자들을 감안했는지 이 책에는 표준입자모형에 대해서 부록을 뒤에 실어놓았다.

그러니깐 뒤의 부록부터 읽고 앞의 내용을 읽기.

 

사실 이 책은 별로 물리의 색깔이 짙은 책은 아니다.

수식도 거의 없고 그저 탐험 이야기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구.

 

 

 

이 책이나 저 책이나 이름이 거의 비슷하다. 뭐, 비슷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실험물리학의 최전선 CERN이 빠지면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가 없으니. 위 책이나 이 책이나 둘다 CERN이야기를 좀 담고 있는데, 위 책이 다른 천문대들도 돌아다닌다면 이 책은 그저 CERN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책이랄까. 그러고보면 일반인들에게 LHC가 유명해진 계기가 있지. 최근에 뉴스에서 빛보다 더 빠른 아원자 입자인 뉴트리노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으니깐.. 그 뉴트리노의 속도가 빛보다 더 빠른 것 같다고 측정한 곳이 바로 이 CERN의 입자가속기 LHC이다. 올해 그 결과가 나온다던데..

 

나도 다 읽지는 못해서 말을 아끼겠지만 앞부분 데모크리토스에 관한 이야기는 좀 뺐으면.. 그 부분만 다 빼도 책 값이 1/10은 줄겠다...

물론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자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 원자가 이 원자는 아닐텐데. 차례를 보면 또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여하튼 사진 자료가 많다는 것은 장점.

 

 

 

나는 수식 따위 두렵지 않다, 그딴 거 근성으로 읽어주겠다!

 

라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

친절하게 잘 이해못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한 페이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독자들에게 (심화학습인가!!) 바치는 수식 가득한 한 페이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뒤에 자꾸만 어려운 수식이 나오는 것은 덤.

수식 하나를 실을때마다 판매량이 십분의 일 씩 줄거라고 하던데 판매량은 별로 두렵지 않은가봐요 서스킨드씨?

 

내용은 말 그대로 블랙홀 전쟁, 상대는 '그' 스티븐 호킹.

청코너, 아인슈타인과 맞짱뜨는 스티븐 호킹,

홍코너,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깡을 키워온 악바리 서스킨드.

                                       누가 이겼을까? 

 

 

 

내가 본 표지는 이렇게 생긴게 아니었는데... 여하튼 좀 가벼운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그러니깐 지적으로는 가벼운 이야기.. 물론 인간적으로는 절대 이 책도 가볍지 않다. 이 책은 팔로마 천문대에서 일하는 천문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인데 그들의 삶의 무게는 보는 우리마저도 그 무게에 짓눌리게 만든다. 그러나 결코 힘들어서 짓눌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우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열망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런 풍경이다. 황량한 사막과 같은 곳에 당신은 당신의 망원경과 함께 서 있다. 한없이 외로운 당신은 검은 하늘에 푸르게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실존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오레오 쿠키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

 

 

 

당장 제목이 기억은 안나는데 일본 사람이(일본 사람들이 이런거 잘한다) 각종 천체나 입자 물리학에 관한 용어를 집약해서 책을 낸 것도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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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1-16 00:35   좋아요 0 | URL
그럼 저는 [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을 읽을께요,,,일본사람이 쓴 책 기억나시면 올려주세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겠네요,,,미리 즐거운 한 주 보내시라 인사드립니다.^^

가연 2012-01-16 17:03   좋아요 0 | URL
ㅋㅋ 제가 가던 서점에서는 있던데 여기 인터넷 서점에서는 품절이구먼요ㅎ 한 번 읽어보세요, 괜찮을 거에요. 언제나 그렇듯이 제 기준이라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ㅎㅎ 감사합니다. 나비님도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채, 그 첫 5000년.

 

 

 

 

 

 

1.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가끔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는 책의 평점을 어떻게 주는가, 입니다. 여기 알라딘에서는 마이리뷰를 통해 작성한 리뷰에 책에 대한 평점을 기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별 5개를 만점으로 두고 별 1개씩의 단위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수 체계는 사실 세밀하게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어려워서, 각 책마다 고유한 점수를 매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불만족스럽겠지요.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별 다섯 개는 정말 창의적이며 논리가 빈틈이나 비약이 없이 잘 짜여있다, 고 여겨지는 책들에게만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항상 제 생각이 옳다고 여길 수 없기에 그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별 두 개는 잘 안주는 편입니다. 별 한 개는 아무래도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읽은 책인 이상 부여하지 않고 말이지요. (읽지도 않았거나 건너뛰면서 읽었다면 아예 리뷰를 쓰며 별점을 매길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책들은 별점이 3개에서 4개 사이에 머물게 됩니다. 만약에 별점을 소수점단위로 매길 수 있다면 아마 더 세세한 별점을 줄 수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저 대부분의 책들은 리뷰를 쓸 때마다 별점을 3점을 주어야 할지, 4점을 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껏 리뷰를 써오면서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 보다 더 별점이 헷갈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점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지은이의 다음 문단에 나오는 주장에 설득되어 4점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제 마음은 3점과 4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지요.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수많은 생각을 접어두고 일단 이 책에 4점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점수를 매기는 데 왜 이렇게 민감한가, 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 책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 드리는 것들을 들어보시면 제가 왜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은 상당히 독창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화폐와 시장의 발전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들을 다 뒤집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물물교환이 있고, 그 후에 그것이 발전하여 화폐가 생겼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오늘날에 이르러 신용거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부채, 쉽게 말해서 태초에 빚이 있었고, 이 빚의 척도가 있었으며, 그 척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물건과 물건의 교환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이 빚의 ‘척도’가 일종의 화폐역할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화폐는 화폐이지만, 신용화폐이며 주화로 만들어진 화폐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먼저 부채를 바탕으로 한 신용거래가 있었으며, 그 후에 주화를 사용하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주화로 사용된 금, 은과 같은 귀금속들은 그것들이 폭력과 결합하게 되면서 화폐로 쓰이게 되고, 그 결과 약탈 또는 수탈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 주장에 대해서 근거를 내세우기 위하여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과 동시에 인류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먼저 애덤 스미스가 글에서 주장했던 물물교환과 주화, 시장경제의 발전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조차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료의 추적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반론을 펼치며 그가 외면해왔던 실제의 사회상, 즉 폭력과 노예제도가 뒷받침된 사회를 꼼꼼히 드러냅니다. 축의 시대, 중세시대 등으로 개념을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폭력과 노예제도가 없던 사회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저자는 그런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료 조사를 통하여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실질적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은 기계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하며, 인간인 이상 인간들끼리 가지는 정(情)이 있으며, 그 정을 통해서 서로간의 부채가 자연스럽게 상쇄되고 순환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계로 취급한 애덤 스미스의 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발전되어온 주류경제학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인도의 리그 베다, 브라흐마나와 같은 고문서에서부터 이집트의 로제타석과 상형문자에 기록된 문헌들, 성경이나 불교의 교리, 이슬람의 이야기까지 자신이 가져올 수 있는 자료는 모두 가져오면서 태초에 있었던 부채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또한 사실 실질적인 증거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만, 언어학적으로도 접근하여 truck(거래하다), barter(교환하다)와 같은 단어가 애덤 스미스의 시대보다 1, 2세기 앞선 시대에서는 trick, rip off, bamboozle과 같이 속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져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물물 교환에서부터 화폐가 발생하였다, 라는 주장은 의외로 연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에 단 하나의 반례만 가져오더라도 쉽게 파훼될 수 있지요. 그래서 저자는 그 반례로 남미의 원시 부족인 남비콰라 족이나 콩고의 렐레 족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실로 인류학자들이나 가능한 방법이 아닐 수 없지요. 어쨌든 이로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신용사회가 먼저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도 신용사회가 아닌가, 왜 오늘날은 옛날에 있었던 신용사회처럼 굴러가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답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의 사회와 다른 비인간적이고 객관적인 신용화폐이며 이는 우리 인류가 소위 말하는 축의 시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사회의 요소들이 변용을 거쳐서 자본주의 제국의 시대에 침투하였기에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3.

 

 

  그런데 이 책의 문제점은 저렇게 많은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좋게 말하자면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중구난방으로 자료를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부채에 대해서 인도의 베다, 구약성서와 같은 고문헌들을 가져오면서 ‘원초적 부채 이론’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우리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 이 빚은 엄밀히 말하자면 도대체 누구에게 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에게 이 빚을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따라 이런 저런 물물 교환을 통하여 형성된 시장이 정부보다 먼저 형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시장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정부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근거들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채감이 어디서 기시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하나 제안된 것이 바로 이 ‘원초적 부채 이론’ 입니다. 고대에 창작된 베다의 시를 참조하면 우리가 지고 있는 부채감은 신에게 빚을 지고 있고, 죽음에 빚을 지고 있으며, 좀 더 확장하여 말하면 ‘산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존재를 보장해주는 사회의 연속성과 영속성’에 빚을 지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학적 증거로 고대 인도유럽어의 부채, 라는 단어가 죄의식, 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라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말이지요. 이윽고 신에 대한 이런 부채감은 인간에게 끌어내려져 신과 동일시 된 인간, 고대 이집트의 경우 파라오(태양신 ‘라’의 아들과 종종 동일시된)가 그 예가 되겠지요, 에게 권력을 줍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한참 위와 같이 ‘원초적 부채 이론’ 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을 하고 나서는 그 다음 장에서는 단칼에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라면서 잘라버립니다. 방금 전까지 열을 올려서 설명하던 내용은 사실상 저자 본인과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저자는 저자 본인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런 식으로 부채를 설명하는 방식은 일종의 '국가의 논리' 이며, 우리 모두가 상환이 불가능한 빚을 안고 삶을 시작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이제 독자들은 당황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이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확 뒤집어 버리다니’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드러납니다. 한 번도 당황스러운데 많은 부분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니 그 많은 자료들이 도리어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어쩌면 이는 자료의 과잉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쌓아보니 참 많고 다양하더라, 이 자료들을 다 이용하고는 싶은데 마땅히 본인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바로 이용할 만한 곳이 없으니 억지로 새로운 단락을 만들어 끼워 넣는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료가 산만하게 쌓이게 되고, 독자들이 저자의 중심 개념을 파악하는데 힘들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됩니다.

 

 

4.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경제’ 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인간경제’ 는 일종의 원시화폐가 쓰이던 경제 체제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원시화폐라는 말을 싫어하고 사회적 통화라는 말로 대체하는데, 이 사회적 통화는 국가나 시장이 없는 곳에서 흔히 보게 되는 조개껍질이나 깃털화폐, 섬유화폐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배워온 관념이 남아있기에 이런 조개껍질이나 깃털이 발전하여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주화로 변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 조가비 구슬이나 깃털 화폐는 실질적으로는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의 예로 원주민들에게서 보이는 피의 부채, 신부값 등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이 주장 자체는 사실 크게 보면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칼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 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칼 폴라니는 말합니다. ‘우리의 시장경제가 어째서 무너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인간 자신을 가리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도한 발달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팔 수 있는 것은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가공하여 팔려고 하다 보니, 실제로 찬찬히 살펴보면 팔 수 없는 것들, 말하자면 인간까지도 상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여기서 칼 폴라니가 말하는 팔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인간경제와 맞닿아있습니다. 이 경제에서 쓰이는 사회적 통화는 서로 비교 불가능한 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통화이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인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화이지요. 심지어 칼 폴라니와 이 책의 저자의 지향점마저도 똑같습니다. 현실 자본주의의 잘못된 모습을 밝힌다, 라고 말이지요.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애덤 스미스가 중세 페르시아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이론을 표절한 것 같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부채가 화폐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하여 그 근거로 내세운 ‘인간경제’ 부분은 용어만 다르게 썼을 뿐 이미 다른 학자에 의하여 그 의의가 정교화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칼 폴라니의 저서를 표절한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책의 저자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도출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애덤 스미스도 정말로 저자의 생각대로 표절을 한 것일까요? 애덤 스미스도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그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요? 책의 뒷부분에서는 이슬람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책 구절과 애덤 스미스가 지은 책 구절이 서로 비슷한 것 같으니 영향을 받았다, 라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만 그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근거로 보기에는 모자랍니다. 저자의 문제제기와 주류 경제학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훌륭합니다만 책의 일부가 실제로 확실한 근거를 들지 못하는 상태로 애덤 스미스 죽이기에 할애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위의 단락들에서 언급한 의미들로 판단하자면, 이 책은 마치 문이 닫힌 방바닥에 구슬들을 가득 쏟아놓은 것과 같아서, 방 바깥으로 구슬이 빠져나가지는 않지만 실제로 보배로 쓰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느낌을 줍니다. 결국 독자 자신이 책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렬해야만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치 오천 조각으로 나뉜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랄까요. 다 맞추고 나면 분명 훌륭할 거라는 것은 알지만 맞추기가 어려운 그런 퍼즐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저자의 마지막 말은 쉽게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빚은 꼭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부채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얼핏 보면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의 깊은 곳에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는 부지런한 사람은 그 부지런함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해치는 사회이며 동시에 설령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할지라도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착취나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이고, 도리어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는’ 사회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부채를 꼭 갚아야 한다는 관념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게을러 질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경제 질서는 조금 더 자기 파괴적인 경향이 줄어들겠지요. 물론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제안하는 ‘희년 정신’, 굳이 풀어 말하자면 부채 탕감 정신은 사실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런 희년 정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희년 정신이 가능할 수도 있는 시점에 이르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저자가 책을 읽으며 그 많은 구슬을 하나씩 꿰어온 우리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부채는 원래 고유한 특질을 가진 인간들 사이의 자유로운 약속이었으며, 우리는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해서 그 타락한 약속을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입니다.

 

 

 

 

 

 

p. s. 그러니깐 4점... 여러분은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같이 읽어볼 만한 책 : 슬픈 열대 - 레비 스트로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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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2012-01-25 10:24   좋아요 0 | URL
대.단.한. 리뷰네요^^* 이 리뷰를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읽는다면... 감탄하겠습니다. ㅎㅎㅎ 정독의 대가십니다!!!

가연 2012-01-27 21:19   좋아요 0 | URL
ㅠㅠ 감사합니다. 부끄럽네요ㅠㅠㅠ

희선 2013-10-11 00:5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말 들었던 것 같네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빚을 지고 있다는, 나라에서 진 빚을 국민도 지는 것이라고... 이것을 꼭 갚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하지만 개인이 다른 곳에 진 빚은 갚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빚은 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른 말이 된 것인지도...^^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게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는 것이겠죠 표절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데... 지금은 사람이 상품이기도 하군요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구슬이 많지만 꿰어도 보배가 되기 어려운 흠집 있는 구슬인가 싶기도 한데 꼭 그렇지도 않군요 제대로 꿰기가 어려운 것이군요


희선

가연 2013-10-16 17:19   좋아요 0 | URL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

희선 2013-10-14 00:49   좋아요 0 | URL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하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말 뜻을 예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꼭 나와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기도 하잖아요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한테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빚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살면 더 좋은 사회가 될 텐데요 그렇다고 제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합니다 가끔...^^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 이 말 늘 생각해야겠어요 바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희선

가연 2013-10-16 17: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 가끔은 양영순의 1001일이라는 만화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 만화에 자신의 하루하루를 만들기 위하여 기도를 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그런 내용이 나왔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