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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하던 일이 하던 일이다보니 정신과에 내원한 사람들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학생 시절에 파견 및 실습을 가서 접하기도 했고, 싸이코드라마Psychodrama를 보기 위해 국립정신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한 번은 개방 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고, 다른 한 번은 폐쇄병동에서 사람들을 보았으며, 지역 병원에도 나가서 살펴본 적이 있으니, 깊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범위에 있어서는 정신과로 내원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조금은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모두 합쳐서 3주도 안되는 짧은 관찰이었기에 그 한계도 분명 있겠지만, 대충 경향을 살펴보자면 지역 병원에 내원하던 사람들은 주로 우울증이 많았고, 입원을 하던 사람들은 조현병, 그러니까 정신분열병으로 입원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우울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역학군이긴 하다. 보통 주요 우울증으로 입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몇 번이고 하거나, 혹은 자살을 실제로 실행해본 사람들이 입원하는 경향이 많은데, 물론 누구나 살아가다가 너무 우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반농담삼아 '죽어버려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걸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사고를 진심으로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반면에 정신분열병이 입원한 사람들 중에 많다, 라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흔히 '정신병' 이라고 이름 붙일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증상들, 갑자기 웃거나 미친 듯이 소리지르거나, 혹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꼭 술에 심하게 취했을때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들이 주로 정신분열에 가까운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은 사실 찾아보기 드물다. 집 앞 슈퍼에 가는데 누가 칼을 들고 나를 찌를까 걱정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지 않는가. 그렇게 사회에서 별로 빈도가 높아보이지 않는데도 병원에서는 의외로 정신분열병 (이 책에서 '광기' 로 표현되는) 을 가지고 찾아오고 입원하는 사람들이 잦다.

 

물론 증세가 심하기 때문에 입원을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병원을 기준으로 사회에서의 빈도를 정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 광기에서는 '조용하게 미친' 이라고 표현한다.) 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말이다. 그렇게 조용하게 정신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무엇인가에, 편의상 표현하자면 '벽' 에 부딪혀 정신병이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양성증상을 보이게 되고 (위에서 서술한 타인에게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등) 결국 입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촉발된 정신병은 그 사람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정신분열병은 계속 진행하는 병이고 감히 말하지만 그 진행방향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 진행을 잠깐 멈추고 정신병적인 증상을 내재화시키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정신분열병이 완치가 되냐는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수 밖에 없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아니 그건 현대의학의 한계다. 저런 병에는 더 깊은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교정한다면 나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아마 내재적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재적인 원인이 실제로 교정가능한 일인가, 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애초에 내재적인 원인이 없이 그저 신경전달물질과 단백질 그리고 유전자의 이상때문에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재적인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원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사례 연구한 것을 보면 각 사람들마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맞춤식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과연 치료자는 환자에게 얼마나 잘 맞춰줄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맞춰준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처음 환자를 겨우 치료했다고 하자. 그 환자 한 명을 치료하고 난 뒤에는 (처음 환자에게 익숙해진 치료방식으로) 다른 환자를 더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의학이 이런 문제와 반론에 대처하는 방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비슷한 병이라면 유사성의 법칙에 따라 기전을 예측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효율적이고 긍정적인 치료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리고 실제로 내재적인 원인이 규명되었을때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일 뿐이리라.

 

이 책 광기, 의 첫머리는 책의 저자가 자신이 처음 상담소에 들어갔을때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며 시작한다. 저자는 처음 상담실에서 본 정신병 환자들이 대화나 일상생활이 너무나 '정상적이기에'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치료사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는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부분을 발견해내었다는 언급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 그 인상을 책의 끝까지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광기의(정신병의) 긍정적인 면을 재발굴하자, 라고 말이다. 사실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경험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진료실에 앉아서 예진을 할 때의 일인데, 너무나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왔었다. 보통 정신병에 이환된 사람들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나 물질 중독이 있는 사람들은 더 심한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그런 환자들만 상대하고 교수가 있는 방으로 안내한 나는 심지어 나보다 더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들어오자 솔직히 놀랐다. 혹시 건강검진 받으러 왔는데 착각한건가? (정신과라는 이름은 정신건강의학과로 이름이 개명된지 오래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는 나는 그 사람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증상을 들었다.

 

어떤 점이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세계' 였다. 정말 '세계' 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정되고 조직화된 생각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에서 자신은 주인이고 모든 것의 주재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자신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세계이다. 자신의 세계가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의 충고는 당신의 세계를 약간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광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외부세계의 말은 그들이 만들어낸 장벽에 퉁, 하고 부딪혀 다시 메아리처럼 되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분명 그들은 '정상적' 이지 않다. 요즘은 정상적이다, 라는 말이 도리에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 획일적이다, 라는 말과 정상적이다, 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정상적이란 말이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존중한다, 라는 정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재정의하면,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 (덮어놓고 난 저 사람이 싫다, 그러니 저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싫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은 판단이든 그른 판단이든 내린 뒤 그 의견을 개진하고 다시 수정하는, 그런 면모를 정상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윤리학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선을 사랑하고 신성함을 경배하고 어디에 치우치지 않게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닫혀 있는 세계의 주민은 그럴 수 없다.

 

책에서는 정신분열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이야기를 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사람들은 예민하게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과 참을 구분해내고 그것을 지적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저자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도된 경향이 크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치료자는 그 사람이 실제로 참 거짓을 구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덮어놓고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치료자의 이야기를 그냥 거짓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속마음과 다르게 말했는데 그 속마음을 그대로 집어내는 경우가 인상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조용한 광기든 폭력적인 광기든, 어느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공통적으로는 자신의 '세계'에 상대방의 침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이런 사례들을 가지고 정신분열병, 그러니까 '광기' 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재발견을 하자, 와 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포용하자, 라는 말은 분명 옳겠지만, 다양성이 다양성이 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적어도 이런 닫힌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서는 적용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현 상황에서는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렇기에 설령 지나친 양성증상이 아닌, 무반응 등의 음성증상만 보이는 정신분열병 환자라도 정신분석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약물만 던져주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약물치료가 비인간적처럼 보일지라도 약물치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치료한 사례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치료라기보다는 '안정화' 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안정화시켰는가? 이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광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기괴한 망상이라도, 그 망상을 통해서 자신의 증상을 다스린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말도 안되고 기괴하게 보이는 망상일지라도 사실은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한 그런 기제라고 말이다. 옳게 들리는 말이고 옳은 말이지만, 이 말을 치료관계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렇게 된다. '정신분열병 환자는 치료자까지 자신의 세계에 넣어서 광기를 조직화해버렸다' 라고 말이다. 결국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꾸 밖에서 자신의 세계에 침범하려고 들자, 자신의 두텁고 단단한 세계를 아예 넓혀버렸다는 것이다. 저 귀찮은 치료자까지 나의 세계에 넣어버리자, 라고 말이다. 정신분석의 무가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유일한 치료 수단으로, 그리고 책에서 말하듯 이런 분석을 통해서 재발견을 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은 약간 잘못된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광기가 창조성의 원천이라면 그 광기를 왜 정신분석하면서 치료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나고 치료되어 잠잠해진 광기는 과연 다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이 책에서 뒷부분에 실린 사례중에서는 환자가 치료하기 전에는 스스로가 위대한 문학작품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문학작품을 써내려가다가 정신분석이 진행되고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는 전혀 그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모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서 판단해보면 분명 양성증상들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하게 살아가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 자신의 광기가 연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을 떼어놓고 병을 다룰 수도 없는 법이고, 그런 양성증상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약물 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약물치료가 그냥 획일화된 사람들을 양산한다, 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갑자기 의자를 들고 던지거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속으로 자신이 자신과 분리되어 자신의 생각으로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는 이런 막연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약물치료와 면담을 함께 하면서 최대한 환자를 배려하고 치료하도록 하자, 라고 말이다. 아니, 우리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것도 사실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피해를 안준다면 그냥 놓아두자. 도움을 원하고 괴로워하면 도움을 주자. 피해를 준다면 별 수 없이 교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덧붙이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정상인이라고 분류되는 우리는 그들, 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자격은 모르겠지만 기준은 있다. 우리가 '그들' 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 뿐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행동을 고착화시키고 반복한다. 물론 이렇게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로 정상인과 정신병에 이환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을 지적받을 때에는 귀납적으로 그저 내가 관찰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 책의 저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와 나, 둘 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또 처음에서는 조용하게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이 어느 '벽'에 부딪혀서 증상이 나타난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 광기가 숨어 있던 사람들은 설령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병의 전구병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상인인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록 이런 의문들을 남겨두었지만 이 책의 저자와 내가 도달한 결론은 동일하다. 내가 앞서 제시한 마지막 질문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은 줄 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다' 왜? '정상인' 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다시 영향을 주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결론은 분명 이 '광기'의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리라.

 

 

 

 

 

 

 

 

 

 

 

 

 

p. s.

 

 

 

광기는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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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8 14:05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인용구 보니, 저, 광기가 있군요. - 정열에 휩싸인 어리석음이 광기인가 보죠? (글은 아직 안 읽었어요)

가연 2013-02-13 23:4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을 보니 확실히 그러하네요. 정열에 휩싸인 어리석음이 광기, 확실히 수긍이 가는 말씀입니다.

낯선이 2014-04-10 10:30   좋아요 0 | URL
저기...리뷰 잘 읽어보았는데요...조금 이 내용들에 대해서 오해가 있으신듯 합니다. 치료된 것에 대해서는 맞고 안정화시키는 것은 '약물'의 역할입니다. '약물'이 궁극적인 치료책은 아니죠. 그리고 이 책을 읽기전에 기본 전제로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관점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것 없이 의학적 관점, 즉 생물학적 관점만 갖다대면 이 책은 말이 안되는 책이 됩니다. 그리고 진단체계에 대한 관점역시 그렇고요. 편집증이라는 증상에 대한 이해도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정신분열병 환자의 망상에 대해서 약을 안쓰고 치료관계에 끌어들이시는 상상력은 인정하지만...제 경험상 그거 됩니다.그리고 정신분석의 목적에 대해서 '치료'라는 'cure'의 개념을 적용시키시는 것도 같은데...이때는 cure라고 볼 수는 없고요. 그 광기가 '현실'을 살아가도록 방향을 전환시키는 겁니다. 이책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슈레버분석을 좀 읽어보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물론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말이 안되겠지만요.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말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이다. 인것 같은데요. ㅎㅎ 우연히 들렀다가 글 남겼습니다.

가연 2014-05-30 21:19   좋아요 0 | URL
아, 댓글 이제 봤습니다.. 답이 많이 늦었네요ㅠㅠ 제가 사실 거의 글을 안써서 답글을 겨우 달게 되었습니다.

이 리뷰를 쓸때는 솔직히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너무 부끄러운 글이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인 입장은 그대로입니다. 정신의학적 입장을 저로서는 항상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프로이트 전집도 읽었고 사례들에 대한 분석도 어느 정도 하고.. 라캉의 세미나도 있으니 다시 리뷰를 쓴다면 이렇게 리뷰를 쓰지는 않을 듯 합니다. 입장은 비슷하더라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여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사실 변명에 가깝고 그래서 이 글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합니다. 긴 글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는 기분이 아하하...
 

 

 

 

  이런 저런 일이 있었고, 여전히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바쁘지만, 모바일로 가끔씩 접속해서 이런 저런 글들을 읽기는 합니다. 왠만하면 일이 다 마무리될때까지 접속을 안할 생각이었지만.. 어쩌다보니 서재의 달인, 이 되어버렸기에.. 사실 무덤덤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고, 조금 기쁘긴 했지만 그렇게 무덤덤하게 지나가는게 더 멋진 일 같지만, 풋, 그래도 저렇게 뽑혔다는 핑계로 이렇게 글을 조금 끄적거려볼까 합니다. 사실 알라딘 서재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안쓰기로 결심했고, 설령 쓰더라도 어떻게든 책을 집어넣어서 글을 끄적이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예외가 될 듯 하네요. 책도 없고 개인적인 이야기만 끄적거리는 것.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요?

 

먼저 서재의 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준다고 해도 무슨 소리냐, 라는 소리를 들을 지 모르겠지만.. 사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황스러움이었답니다. 제가 여기 서재를 시작한 게 작년이었으니까, 거의 1년 반 좀 넘어서 서재의 달인이 된 건데.. 기간이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그 1년 반 동안 제가 쓴 글은 백 개도 안됩니다. 뭐, 저야 제 글들을 보면서 '오, 재미있네' 라고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제가 글을 쓸 때 생각하는 부분이 나중에 스스로 이 글을 다시 읽었을때 다시 읽힐 것인가, 라는 부분이 있습죠.. 아하하..)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백개도 안되는 글들이 모두 가치가 있을런지는.. 사실 잘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뭐랄까, 내가 달인으로 뽑힐 만큼 활발한 서재활동을 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네요. 제가 땡스투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뒤에 끄적거리겠지만 저는 땡스투가 무었이었는지조차 잘 몰랐던 적이 있었답니다.) 댓글을 많이 남긴 것도 아니고.. 뭐, 이것들이 지수 산출에 안들어간다지만 딱히 포토리뷰를 쓴 적도 없고, 40자 평도 쓴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뭐, 개인적으로는 글을 하나 쓸 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쓴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다른 분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니깐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에 있는 리뷰의 대부분은 신간평가단활동을 하면서 쓴 리뷰들이니깐.. 그리고 자신의 글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 사실 어디있겠습니까, 풋.

 

또 당황스러운게.. 서재의 달인, 이 그래도 알라딘 서재에서는 그래도 명예롭다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라딘 서재에는 명예의 전당 코너가 따로 있지요) 작년 말의 저는 땡스 투가 뭔지, 적립금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서평을 개인적으로 쓰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제 그 개인적으로 쓰던 서평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답니다..) 어디다 올리기 시작한 것은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부터였으니깐요. 뭐랄까, 너무 빨리 이런 엠블렘을 받은 기분이 솔직히 들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올라간 뒤에는 그 자리에 계속 있거나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잖아요. 이러다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순간 스쳐지나가더군요. 혹시 저의 가능성을 보고 이런 엠블렘을 준건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고 말이죠, 푸하하.

 

그래도 솔직히 좀 기뻤던 것도 사실입니다. 뭐랄까, 그래서 이 글에 알라딘에 대한 감사를 담습니다. 뭐, 이 감사를 설령 보더라도 알라딘에서는 무심한듯 시크하게 지수 산출의 결과물이다, 라고 말하겠지만요, 풋.

 

이런 저런 일들이 많다고 했지요, 사실 정말 바빴고, 지금도 바쁜 상태입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의 괴리를 느끼며 스스로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나날이지요. 본의아니게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리뷰도 못쓰고 있는 중인데.. 상당히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것도 파트장이었다는 사람이.. 풋, 하지만 바쁜 것도 사실이라서 그저 평가단 담당자분께 고개를 조아릴 수 밖에요. 아마 이런 저런 일들이 다 마무리 되면 리뷰는 꼭 올리겠지요. 여기서 핑계를 굳이 하나 더 대자면, 사실 컴퓨터가 심하게 고장이 났습니다. 하드디스크 접촉 불량 어쩌고, 라는 병명을 가지고 있는데, 고치러 갔더니 상당히 많은 요금을 지불해야 하더군요. 처음에 저는 포맷을 하지고 했습니다. 그러자 포맷을 해도 제대로 쓸 수 있을지는 반반의 확률에 달려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저는 배팅을 했고, 그 확률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서 컴퓨터는 완전히 고장이 나버렸고 (이제는 부팅도 안됩니다.) 그와 함께 이런 저런 개인적인 자료들, 서평들, 여기 있는 글들의 원본까지 모두 날려먹었지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고치러 갔을때 기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니 사람도 아프면 병원가는데 컴퓨터라고 다르겠어요' 사람으로 따지면 컴퓨터는 이제 뇌사상태에 빠진 거지요. 이걸 고치려니 분명 돈이 많이 들텐데.. 이전에는 그래도 부팅은 되는 상태였는데 이제는 부팅조차 안되니, 어쩌면 컴퓨터를 새로 사야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난 돈이 없잖아? 안될거야..

 

하는 마음과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 이건 하늘이 이제 나보고 네 할일을 해라, 라고 계시를 내린 거다, 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모바일로 인터넷을 접속하면서 근근히 버텨오고 있는 중이랍니다. 지금은요? 지금은 별 수 없이 외부 컴퓨터를 잠깐 쓰는 중이지요. 이상하게 밖에 나가서는 잘 로그인을 안하는 습성이 있어서 지금껏 외부 컴퓨터에서는 로그인을 안했지만.. 이번은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크리스마스는 너무 추웠습니다. 커플들이여, 모조리 이 한파에 얼어버려라! 라고 주절거리면서 집에 틀어박힌 저는 (아니 크리스마스날까지 일하거나 공부할 수는 없잖아요? 안그래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트겐슈타인 평전, 을 읽었습니다. 일전에 재출간 소식을 알렸던 그 레이 몽크, 의 평전 말입니다. 예전에 읽은 몽크의 평전은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끝까지 다 읽지 않았었기에 이번에 배송되어온 책에 상당히 기대가 컸었지요. 그리고 이 책은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답니다. 평전에도 읽는 맛이 있다면, 이 평전만큼 감칠맛나게 쓴 평전은 드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제가 평전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거의 열 시간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었는데도 자꾸 뒷내용이 궁금해지는 책이 흔치 않잖아요, 안그래요? 만화책도 아니고.

 

사실은 보다가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네, 제가 쓸데없는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가 가끔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있고, 그때가 마침 크리스마스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비트겐슈타인 평전, 에서 대략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베토벤의 일화를 예화로 드는 글이었던 것 같은데, 36시간동안 하녀도 다 쫓아내고 요리사도 쫓아내고 악마와 싸움을 벌이고 이윽고 살아 돌아온 베토벤, 의 이야기였지요. 뭐 베토벤이 흑마법을 부렸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36시간 동안 잠도 안자고 미친 듯이 열중해서 작곡을 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서 레이 몽크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마 내심 닮고자 했던 사람이 그 베토벤이 아니었을까,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내용을 덧붙입니다.

 

하지만 36시간 후의 결과물이 베토벤의 결과물처럼 위대해야만 한다.

 

그래요, 누가 미쳤다고 평범한 결과물을 남기려고 36시간 동안 잠도 안자고 작곡을 하고, 철학에 몰두하겠어요? 비트겐슈타인이 36시간을 바친 결과가 그냥 앵무새처럼 재잘거리는 거였다면 아마 그는 자살했겠지요. 적어도 36시간동안 몰두했다면(여기서 36시간이라는 말은 물론 비유적 의미죠) 적어도 무언가 이루기는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무언가 이룰 거라는 보장은 누가 하죠? 36시간을 바쳤는데도, 아니 전 인생을 다 바쳤는데도 그냥 평범한 결과물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안그래요? 앵무새처럼 살기야 쉽죠. 하지만 그런 앵무새가 되려고 36시간을 바치는 것은 너무 슬프잖아요, 안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절대 요구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적어도 저 스스로에게는, 저는 이 말에 끌립니다. '무엇인가에 미친 듯 열광한 대가가 그저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다면 그냥 자살하는게 낫다.' 그러니까 하늘을 보고 읊조리는 거죠. '젠장,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사실 이 말이 얼마나 잔인성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칼날같은지 잘 알면서도, 저런 엄격함을 저 스스로에게는 강요하게 되네요.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커플들의 음모에요. 커플이 이 세상에서 없다면 눈물이 안날텐데, 너무 감상적이 되어버렸어요. 뭐? 12월에는 연애운이 폭발할거라고? 역시 점따위는 믿는게 아니었어요. 차라리 내가 혼자서 내 점을 치는게 더 잘 맞겠어요. 아니, 서양점이라서 문제인가? 주역공부나 제대로 할 걸 그랬나? (물론 주역이 그런 책 아닌거 잘 압니다, 쳇)

 

나는 36시간을 쓰고 위대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런 보장은 누가 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냥.. 자살..은 사실 무서워서 못하겠고 그냥 남들 하는대로 편하게 돈이나 벌면서 사는게 낫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 하루 바쁘게 살고 있답니다. 이것도 다 커플의 음모에요. 제가 커플이었다면 이런 생각안하고 그냥 현실에 매몰되어 살고 있겠지요. 그래서 다행이에요, 혹은 좀 아쉽네요. 젠장 이 한파는 커플에게나 갈 것이지 왜 제 방에 들이닥치는 걸까요?

 

매년 연말에서 연초에 이르는 기간에 저는 일종의 의식이라면 의식을 치릅니다. 의식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것은 아니구.. 그냥 상실의 시대, 를 다시 읽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일곱 번은 읽은 것 같네요. 이번 의식은 1월달에 치뤄질 예정입니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날도 이제 얼마 안남았네요. 그 의식 후에 (컴퓨터를 고치고) 다시 글을 끄적거릴께요.

 

결과적으로 이 글을 요약하자면 제가 서재의 달인, 이라는 엠블렘을 받은 것은 커플들의 음모다, 로 귀결되겠네요. 지금껏 쓴 97개의 글 중 다시 읽으면서 딱히 부끄러웠던 글은 없는데, 이 글은 분명 나중에 다시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네요. 뭐, 그렇다고 지우기야 하겠어요, 쳇.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지워야겠네요. (이렇게 이 글은 계속 보존되고..) 아, 쓰다보니 이건 반쯤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글에 추천이 많다면 분명 크리스마스날 저처럼 집에 틀어박혀서 케빈과 놀거나 책을 읽었던, 그리고 '이성친구? 그거 환상의 동물 아님여?' 라고 말하는 솔로 여러분들이 추천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먼저 로그아웃해서 (로그인한 상태에서 한 번 눌러봤는데 안되더군요) 제 글에 추천을 해야겠네요, 쳇.

 

어렸을 때 본 EBS 영어 테이프, 크리스마스 편에서는 항상 미국인 꼬마애들이 메리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생각했답니다. 아니, 크리스마스랑 뉴이어랑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왜 쟤들은 붙여서 말하는거냐, 역시 경제적인 미국인들이군(오해입니다) 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젠 제가 저 말을 따라해야겠네요. 미리 새해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 그리고 제가 여기 다시 오긴 오겠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못올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행운이 많이 필요할거에요, 그러니까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들께도,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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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12-29 07:19   좋아요 0 | URL
하루하루 아름다움 빛내며 살아가라는 사랑을 담아
알라딘서재 달인이 되었으리라 느껴요.

예쁘장한 컴퓨터 하나 즐겁게 장만하실 수 있기를 빌어요

가연 2013-01-12 19: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컴퓨터 고쳤어요.

이진 2012-12-29 12:0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서재의 달인 자격 충분합니다, 후후.
축하드려요!... 저는 내년에 한번 받아보겠습니다. 허허.

가연 2013-01-12 19: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답이 너무 늦었네요.

프레이야 2012-12-29 12:33   좋아요 0 | URL
가연님 좋은글들 날아가버녔다니 안타깝네요. 새해엔 이런저런 일도 좋게 정리되고 하시는 일마다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랜만 반가워요.^^

가연 2013-01-12 20: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랜만이세요.

2012-12-29 18:02   좋아요 0 | URL
살아계셨군요. 바쁘고 컴터도 맛이 가고 하셨지만 그래도 무조건 글 자주 올리시라고 촉구해 봅니다.^^

가연 2013-01-12 20:00   좋아요 0 | URL
글은.. 아하하.. 겨울이 너무 추워서..

다락방 2012-12-31 14:10   좋아요 0 | URL
우하하하. 글쎄말이죠, 이렇게 바쁘신 가연님인데, 서재 연말결산을 보니 제 서재에 댓글을 많이 달아주신분 5위가 가연님 아니겠습니까? 움화화핫. 뿌듯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가연님 서재에서는 댓글을 가장 많이 단 알라디너가 저일것 같아요. 조심스레 저의 1위를 점쳐봅니다. ㅎㅎ)


그리고 행운을 빌어요.

가연 2013-01-12 20:01   좋아요 0 | URL
아하하..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다락방님께서 글 제일 많이 달아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어쩌다보니 게임에 깊게 빠져서.. 한 때 그만두었던 팬픽마저 끄적거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하게 짧게 끄적거릴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 각종 스토리가 폭주해서, 적당히 짜집다가 스스로가 지쳐버렸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글을 접을 수가 없어서 결국 하나를 쓰고 나니.. 더이상 못쓰겠는거야. 머릿속으로 망상하는 것은 잘하지만 역시, 그 망상을 직접 현실에다가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팬픽과 같은 소설을 쓸 때 미리 모든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그린 상태에서 써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머릿속에서 이미 이 등장인물이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 다 떠올려놓은 상태였고, 남은 것은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라는 것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의지력이 먼저 고갈될 것인가, 혹은 소설이 먼저 끝날 것인가, 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나는 내가 쓰는 이 글의 등장인물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 것인지 다 알고 있다. 이것만큼 나를 모순되게 괴롭히는 일은 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있는가? 굳이 핑계를 짓자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즐기자, 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이유가 아니다. 나는 어떤 팬픽션을 쓸 때 나 스스로의 재미를 더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몇 년 뒤에라도 내가 우연히 내 글을 봤을때, 오? 이거 의외로 재미있는데? 라는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일단 만족해야 글이 쓰여지는 거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아주 탄탄한 스토리를 떠올렸지만, 그 스토리를 굳이 글로 옮겨야 되는가, 라는 물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결국 이 팬픽을 끝내야지, 고작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까, 라는 생각이 이겼지만, 다음번은 또 무기한 연장되었다. 역시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렇게 팬픽션을 꼼꼼하게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면 본인도 모르는 줄거리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맡겨서 백지를 채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설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게 되니까. 한 두 번 그렇게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렇게는 못한다. 일종의 딜레마인거다.

 

 

 

그러고보면 나는 생산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이 더 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병매, 와 같은 책도 일종의 통 큰 팬픽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이런 저런 팬픽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많은 팬픽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팬픽을 들자면.. 가장 먼저 마법 소녀 리나, 그러니까 슬레이어즈에 관한 팬픽을 쓴 Gaya님이 떠오른다. 세일룬의 역풍, 이라는 팬픽이나 인연의 끝, 과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한다. 세일룬의 역풍, 은 리나나 가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멜리아가 주인공이다.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관계를 부각시켜 스토리를 잘 진행시켰는데, 사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리나-가우리 라인과 아멜리아-제르가디스 라인은 슬레이어즈 애니메이션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실제 원작에서는 별다른 그런 러브라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죽하면 거대 슬레이어즈 팬 커뮤니티 중에 린젤, 리나-제르가디스, 이라는 이름이 있는 커뮤니티가 있겠는가.) 뭐, 생각해보면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사이가 크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 상관없기는 하다. 이 작품은 현재 개인 홈페이지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물론 Gaya님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으로 더 기억한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크툴루 신화에 대한 것으로. 크툴루 신화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크툴루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분명 이야기를 들어본 분이리라.

 

그다음에는 창세기전 팬픽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동방검사열전, 을 쓴 검신, 정하늘님의 글도 정말 대단한 필력으로 기억한다. 칠성전기, 라는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분이기도 한데, (칠성 전기는 팬픽이 아니다..) 동방검사열전은 창세기전, 이라는 게임의 세계관에 나오는 동방대륙의 검사, 낭천을 주인공으로, 한대륙, 이라는 곳에서 무협 느낌을 적당히 섞어서 쓴 글인데, 이후에 나온 다른 창세기전 팬픽들이 많지만, 아마 이 팬픽 이상으로 나에게 감명깊게 다가온 글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창세기전2 소설화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작가가 내 기억으로는 시드 노벨, 이라는 출판사에 있는 아크, 라는 필명을 쓰시던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작품도 괜찮게 읽었지만(이 아크님은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창세기전 4 온라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검신님이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물론 검신님이 동방검사열전 뿐만 아니라 창세기전2 시리즈의 팬픽도 어느 정도 남겼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어느 한 팬사이트에서 보관중에 있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한창 신극장판 제작 중이라 느낌이 새롭기도 한데, 에반게리온의 팬픽 중 정말 유명한 팬픽이 두 개 있다. 둘다 일본에서 쓰여진 건데, 하나는 제네시스 큐Genesis Q이고, 다른 하나는 2nd ring이다. 둘다 뛰어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Genesis Q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에반게리온에 나오던 사도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와 아스카, 레이가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면? 물론 그런 상황이 원작에 아무런 연원도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Genesis Q의 경우에는 에반게리온 TV판의 앤딩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반게리온 TV판에서 희대의 낚시가 나온 적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화로 알고 있는데,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의 환상에서 레이와 아스카와 함께 학교 생활을 보내는, 그런 장면 말이다. 물론 에반게리온은 그런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아마 결말은 미적지근하게, 신지가 '그래, 내가 결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어' 와 같은 식으로 끝났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종의 자유로운 결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결심은 극장판 Death and Rebirth, Air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Genesis Q는 바로 저 장면, 레이와 아스카가 함께 지내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러고보면 셋 다 아직 미완결 상태라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슬레이어즈 팬픽인 인연의 끝은 완결 상태이지만 세일룬의 역풍은 아직 미완결 상태이고 (다른 작품을 보면 이미 이후 스토리들은 다 짜여져 있는 듯 하다.) 창세기전 동방검사열전을 쓴 검신님은 넷상 활동에서 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의 모뎀 통신할 때 활동을 하셨던 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반게리온 팬픽인 2nd ring은 완결되었지만, Genesis Q는.. 아직 완결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거의 최종장 페이스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에반게리온 팬픽 중에서 은근히 명작들이 많았던 것 같다. 리턴 투 에반게리온, 과 같은 작품도 명작 대열에 넣을 수 있으리라. 이런 팬팩들을 몇 가지 부류로 자세히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미루고, 적어도 저 사실은 그만큼 에반게리온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창작욕, 이라는 것을 불태우게 만들 정도로, 라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본인은 에반게리온 팬픽을 쓰지는 않았지만, 풋.

 

적어도 가야Gaya님이 팬픽을 쓰시다가 멈춘 이유는 약간은 짐작이 된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 바쁘기 때문에, 와 같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이유를 제외하자면 이미 큼직한 스토리가 짜여져 있기에, (가야님의 다른 단편팬픽들을 보면 세일룬의 역풍, 에서 리나 등등이 어떤 결말을 맞을 지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앞서 내가 겪은 것 처럼, 의지력과 소설 분량이 서로 싸운게 아닐까, 하고. 처음에 그 작품을 좋아한 상태라면 어떻게든 의지력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계속 열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진한 사랑이라도 결국에는 식어 사라진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나, 혹은 소설과 같은 사물이라면. 그렇기에 더 쓰기가 힘들어지지는 않았을까? 이는 에바 팬픽인 Genesis Q를 쓰..고 있는(거의 10년, 아니 20년은 된 팬픽션인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Nary님도 마찬가지리라. Nary님은 팬픽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겨우 힘을 모아 썼다고.

 

그렇다면 이런 팬픽은 왜 쓰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스토리를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주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만 해도 작가에게 '누구랑 누구 이어지게 후일담 좀 써주세요' 라고 메일을 쓸 정도였으니, 풋. 그러다보면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작품 속에 집어넣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한 편 뚝딱 써지는 것이다. 그 캐릭터가 너무 악질적으로 원래 작가의 등장인물들을 속된 말로 깔아뭉갠다거나, 혹은 능력적으로 너무 우위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삽입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글을 써내려가는데. 기존 작가들의 등장인물들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너무 소모가 빨리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들이 쓰이다보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도 들게 된다. 이쯤 되면 만약에 자신의 오리지널 캐릭터를 삽입한 경우라면 그 캐릭터에 당위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도록 말이지.

 

앞으로 이런 팬픽션들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혼자서 품는 상상이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상상은 그저 품고 있다면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나서기 시작할 때 현실이 된다. 상상만으로 만족못할 때 그 지점에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내가 든 예들은 모두다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소설에 관련되어있지만, 꼭 저런 장르가 아니더라도 좋다. 사실은 어디서든 단초가 되어 글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 처럼 아예 이야기가 그 구성상으로 완벽하게 완결되어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서 에르큘 포아로가 죽은 뒤에 그의 친우 헤이스팅스가 탐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직접 써서 발표하겠다면 저작권부터 알아봐야겠지만 - 그러고보면 셜록 홈즈의 경우에는 최근에 코난 도일 재단에서 인정받은 '팬픽' 아닌 '팬픽' 이 나왔다. 왼쪽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나로서는 코난 도일이 직접 쓰지 않은 책이 아니면 안돼, 하는 심정이지만.. 일종의 원리주의 셜로키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풋.) 그 외에 다양한 고전 소설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 소설 뿐만이 아니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는가? 한니발 렉터는 한니발, 에서 별다른 사건 없이(그의 식인 행각에 비하면 전혀 아무런 응징이나 보복 없이)그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 다음부터는 독자의 영역이다. 독자는 한니발 렉터가 그 잔인성을 계속 드러내는 이야기를 택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숙적이었던 그레이엄이 부활하는 이야기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상상력이 어디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팬픽션은 어디서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팬픽션이 소설 형식으로만 남게 되는 시기도 사라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라면 만화 형식으로 후일담을 그려낼 수 도 있을 것이고(이미 동인지, 라는 형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19금 내용이 많아서 그렇지..) 원본이 게임이라면 게임 형식으로 팬픽션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다른 작품들의 영상을 하나로 묶어서 줄거리를 이어내는 형식도 생길 것이다. (소위 말하는 MAD무비의 경우가 이와 같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해당되는 시간은.. 공들인 만큼 많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소설 형식으로의 팬픽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쓰기, 라는 것은 이야기하는 것, 다음으로 누구나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제는 컴퓨터가 생겼기에 글쓰는데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리지 않기도 할테니. 팬픽이 사라지는 시기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흥미있는 주제가 없을 때 다가올 것이다. 감정이 죽은 뒤 행동의 죽음이 온다. 아마, 이 말은 굳이 팬픽션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p.s. 으아.. 너무 바쁜데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오늘 밤은 하얗게 새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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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16:50   좋아요 0 | URL
"머릿속에 이미 얘기가 결말까지 다 있다면 피곤하게 굳이 문자 형태로 써 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랑 싸우는 집필이라니, 생각 못 해 본 점인데, 설득력 있어요.ㅎ
말씀하신 여러 팬픽 중에 제네시스 큐 제일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추천은 며칠 전에, 댓글은 지금.^^
그나저나 가연님도 글 좀 자주 쓰시면 좋겠네요. 날이 많이 추워져서 이젠 슬슬 무를 수 없이 겨울이려나 봅니다. 가을은 이제 내년에나..

가연 2012-12-29 01:42   좋아요 0 | URL
ㅎㅎ 제네시스 큐 재미있지요. 너무 추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글은.. 시간이 없어서..
 

 

 

 

  레이 뭉크가 쓴 전기,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 가 재출간 예정인 듯 하여 이렇게 글을 남긴다. 서재의 오른쪽에서 보이는 독자 북펀드에서 비트겐슈타인 평전이 눈에 띄길래 확인해보니 이전의 레이 뭉크가 쓴 책인 듯 하다. 그동안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는데, 이제 이렇게 재출간이 눈 앞에 있으니 기쁜 일이다. 레이 뭉크가 쓴 책은 바로 아래의 책인데, 이 책이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새로 출간 예정인 비트겐슈타인 평전은 한 권으로 출권 예정인 듯 하다. 나로서는 한 권을 더 선호하기에 더 기분 좋은 소식이다. 부디 잘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적어도 평전이라는 범주에서는 저 천재의 의무, 이상 가는 책은 없으리라. 레이 몽크는 다른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오른쪽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것이다. 오른쪽의 책 또한 괜찮은 책인데, 여러 사료들을 많이 인용해서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전쟁에 자원했다던가, 자신 몫의 유산을 자신의 누나에게 주면서 '재산은 독이다, 그렇다면 이왕 독에 물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도 그의 업적 앞에서는 그 빛이 바래진다. 저런 독특한 삶 이상으로 독특하고 독자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다. 그의 책은 (그의 생전에 미출간된 저서들을 포함하면) 대략 예닐곱 권 정도 되는데, 그 책들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다.

 

 

 

 

 

 

 

 

 

 

 

 

 

 

 

원래는 공학을 전공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흥미를 가지고 버트런드 러셀, 을 찾아간다. 처음에는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였지만, 어느 순간 그의 철학은 러셀을 압도하기에 이르고, 러셀은 항상 그와의 대화 끝에는 기진맥진하기를 거듭했다. 저 논리철학논고, 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출판사들은 출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러셀의 서문이 있으면 출판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하지만 러셀의 서문을 본 비트겐슈타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러셀도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서문과 내 글은 출판되지 않을 것이오.' 논리철학논고, 는 전쟁 중에 쓰여졌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더이상 철학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은거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사람들의 비판에 부딪히게 되고, 램지의 비판 등을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생각에 접어들게 된다. 그 결과물은 청색책, 갈색책 등을 거쳐서 이윽고 철학 탐구, 로 완성된다. 하지만 끝내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의 확실성에 관하여, 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우리 나라에서 논리철학논고는 몇 권으로 번역이 되어 나와있다. 동서문화사에서도 번역이 되어있고, 위의 책세상에서 나온 이영철 교수의 번역도 있는데, 양 쪽 다 개인적으로는 장단점이 있다고 본다. 논리철학논고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면 동서문화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은 읽기가 좋다. 이 읽기가 좋다, 라는 말은 그 문장 그대로의 뜻이다.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수동형 문장보다 능동형 문장에 더 익숙한데, 이 동서문화사판본은 최대한 능동형문장을 많이 사용하고, 덕분에 우리에게 더 잘 다가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익숙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영철 교수의 판본은 거기에 비하면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풍부한 주석도 저 동서문화사판본의 장점이다. 마지막의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 관한 부록이 있는 것 또한 장점이다. 가격에 비하자면 좋은 번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읽기 좋다고 해서 꼭 그게 철학적으로 엄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서문화사판본은 그 번역에 있어 약간이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aRb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판본은 자의적으로(출판 상의 오류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부의 문장기호와 글을 생략하여 그 문장의 뜻이 달라지게 만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개념 'aRb' 에 대한 번역 부분은 저 판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영철 교수가 번역한 논리철학논고가 빛을 발한다. 그의 책에서는 모든 개념이 잘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연구 목적으로 읽을 생각이라면 이영철 교수의 번역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단순히 어떤 내용이다,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동서문화사의 판본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한 쪽의 애매한 문장은 다른 쪽의 문장으로 보충되어지는 경우가 생기고 두 권 다 장단점이 있기에 둘 다 읽는 것도 괜찮다. 원문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없는 한 그런 방법도 좋으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양 쪽 책에서 동일한 개념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첫 번째 문제이고, 두 번째 문제는 똑같은 단어라도 양 쪽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인물들의 관계를 다룬 책들도 흥미롭다. 가장 왼쪽의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도 나쁘지 않은 책이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사이의 관계를 다룬 '비트겐슈타인은 왜?' 도 읽을만한다. 물론 저 비트겐슈타인은 왜, 는 가장 오른 쪽의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으로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적어도 저 가장 오른 쪽에 있는 기막힌 10분, 은 읽어보는 것이 좋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과 대립각을 세운 학자였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부지깽이 사건, 이라는 일이 있었다. 포퍼와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한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로 몇 번 바닥을 치고 나가버렸다던가. 이 상황에 대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에 여기에 대한 언급을 아예 하지 않았지만, 마치 잊어버린 것 처럼, 포퍼는 자신이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여기고 몇 번 저서에서도 언급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기막힌 10분, 을 읽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각 주인공들의 성장과정을 최대한 따라가면서 이윽고 한 점에서 두 선이 교차되는 그런 형식을 취하며 그 극적인 구성은 독자들을 더욱 그들의 상황에 몰입하게 만든다.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사실 곤란할 것이다. 그의 열정과 광기에 따라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그렇기에 말년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좀 빈정거리기도 했다. 러셀 또한 대단한 철학적 업적을 남겼고, 다작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스스로가 비트겐슈타인에 비하여 철학적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을 보고 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손을 떼기도 하였고, 그의 비판을 (심지어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수긍하고는 쓰던 저서를 접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무어에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걱정마시죠, 당신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니깐.'

 

그러나 그 열정과 광기의 결과물은 논리철학논고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적 철학적 작업으로 나타났으며, 아직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가 끝난 뒤에는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물론 사다리를 치우기 전에는 사다리부터 놓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되는 비트겐슈타인 평전이 그 사다리를 놓는 그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p.s. 이제 아인슈타인의 평전 'Subtle is the lord'가 번역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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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23:09   좋아요 0 | URL
레이 뭉크 전기 읽고 싶어지네요. 그 이상의 비트겐슈타인 독서는 저로선 무릴 것 같습니다.ㅎ 그나저나 가연님은 과학전공 및 그쪽 직업이신 걸로 아는데 언제 이렇게 깊이 읽으신 건가요? 아랫글 -루소 소개에 이어 놀랍기만 하군요!

가연 2012-11-08 01:55   좋아요 0 | URL
ㅎㅎ 전기가 잘 출간되었으면 좋겠는데.. ㅎㅎ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는 철학 탐구는 아직 잘 못 읽고 있는 상태라.. 깊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풋. 논리철학논고는.. 그 편린을 겨우 잡고 있는 상태인 것 같고.. 괜히 부끄러워지네요ㅎ 요즘은 거의 시간이 없네요, 잘 지내고 계세요?

2012-11-09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서재에 글 남길 시간이 거의 없어요. 네. 잘 지냅니다. 추위 오기 전의 가을을 최대한 즐기려는 날들이죠. 11월은 스산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은 시절임을 올해 실감하면서...^^

가연 2012-11-10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요, 슬슬 요즘도 춥네요. 건강조심하세요.
 
고백
장 자크 루소 지음, 김붕구 옮김 / 박영률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쥬피터는 그가 파멸케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의 이성을 빼앗았도다.

 

 

 

일찍이 전례가 없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설 그런 모방자조차 없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펜을 든 장 자크 루소는 일필휘지의 기세로 2부로 나누어진 글을 쓴다. 일각에서는 그를 음해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기로 사용되어지고, 일각에서는 그를 추종하게 만드는 이 글의 이름은 바로 '고백Les confessions이다. 이 고백이 쓰여질 당시의 루소는 매우 힘든 상태였다. 물론 그의 그 '힘든 상태'는 그 자신이 자초한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밖의 상황이 그를 그렇게 '자초하도록' 몰고 간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루소가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인 디드로나 그림은 어느 새 그의 뒤에서 짐승같은 사람, 이라고 비난을 내뱉고, 그가 사랑을 주었던 두드토 부인은 그를 꺼리게 되었으며, 든든한 후원자들은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거나 발을 끊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교계에서의 서투룸, 어수룩함, 재치없음은 하나같이 큰 문제로 부각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귀부인들의 수근거림을 듣게 만들었고, 이윽고 그에게 '에르미타주', 그러니까 당분간 거처를 잡고 살 시골 전원집까지 제공했었던 데피네 부인과도 멀어지게 되자, 그는 그저 한숨만 내뱉게 된다. 자신의 옆에 머무르고 있는 두 가정부 - 테레즈와 그의 어머니 르 바쇠르 부인 - 들은 정신적, 사회적 면에서 각각 자신의 편이 아니었고(테레즈는 정신적으로 루소를 따라가지 못했고, 르 바쇠르 부인은 더 나아가 루소가 친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루소의 이야기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실 이 고백, 이라는 저작을 쓰게 된 것이 글로 내 상처받은 가슴을 치유하겠다, 라는 그런 거창한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이 고백, 의 토양은 이미 이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루소가 위에서 언급한 저런 어려움들이 슬슬 싹이 보이기 시작할 때, 루소에게 어느 출판인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당신의 삶을 글로 옮겨보지 않겠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루소의 삶은 당시에서 볼 때 흥미로울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루소는 프랑스인이 아닌 제네바인이었고, 그 제네바에서 도망쳤으며, 나중에 가서는 그 도망친 제네바를 '나의 마음의 고향' 운운하며 다시 찬양하게 되었으며, 기사처럼 칼을 잘 다루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후리는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음악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결국에는 불굴의 의지로 사교계 한 가운데 뛰어들어, 왕의 연금마저 거부해버리는 대담함과 소심함을 동시에 보여주니 그야말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판인이 그런 이야기를 쓰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일종의 관음증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루소란 인물을 한 번 보니까, 그 인물됨이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대담한건지 소심한건지 알 수가 없어서, 어쩌면 살살 부추겨주면 내밀한 육체관계를 다룬 이야기들까지 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들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거기에 끼여서 한 몫잡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을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한 사람이 자신만의 진솔한 경험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용감한 일이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동시대에 자기 뿐이라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루소는 몽테뉴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비판한다. '아니, 이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그 실수를 예쁘게 꾸며서 친근감있게 내놓고 있잖아? 이게 무슨 고백이야?' 그런 일종의 사명감, 용기 등이 얽혀서 결국 이 고백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의 거창한 목적, 그러니까 글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겠다는, 은 다른 일로 성취되게 되는데, 그의 찢겨진 마음은 '루소 - 장자크를 심판하다' 라는 이명이 붙은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씀으로 간신히 한 곳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루소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살펴보니, 자신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실수와 후회와 죄가 있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자신의 실수는 그야말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었기에 더욱 더 큰 실수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집을 나온 일부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도제 역할을 조금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대문호라는 허명은 얻을 수 없었겠지만 뒷날 그의 마음을 그렇게 괴롭혔던 우정과 사랑의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집을 나와서 어느 부인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부인의 집에서 나갈 무렵에 훔친 빗도 문제가 되었다. 그걸 왜 훔쳤지? 사실은 그는 좋아하는 하녀가 있었다. 그래서 그 하녀에게 주려고 빗을 몰래 훔쳤는데, 결국 들켜버린 것이다. 서슬 퍼런 추궁에 그는 자신의 좋아하는 그 하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바로 저 애에요. 저 애가 이 빗을 훔쳐서 저한테 줬어요. 평생 그는 그 거짓말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다른 세도가의 집에 들어갔을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그 세도가가 시키는데로 공부를 꼬박꼬박 다 하고 했더라면 뒷날에는 고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다 못하고 음악에 흥미를 느껴 뛰쳐나가고 만다. 결국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커서는 어떤가? 바랑 부인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재산을 축내는 경우가 잦았고, 뒷날 그를 그렇게 도왔던 바랑 부인에게 적절한 원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서로 맞물리지가 않아서 자신이 매달린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열정은 베토벤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였지만 결과물로 그가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어딘가 수상한 악보 표기법 (숫자로 음계를 표시하는)과 마을의 점장이, 라는 희곡 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느끼는 쾌락, 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개 육체관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쾌락에는 한 생명의 수태가 따른다. 쾌락에의 의무라는 말이 적절할런지는 모르지만, 육체 관계 뒤에는 특별한 피임을 하지 않았다면 출산이 뒤따르게 된다. 이는 테레즈와 루소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그들은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게 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루소의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루소는 고백, 에서 뻔뻔스럽게 '자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자라느니 차라리 고아원에서의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라고 변명하지만 그 앞서서는 '끔찍한 죄악' 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빛은 있었다. 가장 그에게 먼저 다가온 빛은 후에 '벵상에서의 계시' 라고 불리게 된다. 감옥에 갇힌 친구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감옥과 자신의 거처를 왔다갔다가 하다가 어느날 쉬려고 앉은 나무 아래에서 들고다니던 잡지를 보고는 머리속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 잡지에 실린 문제는 학문과 예술이 과연 실제 인류를 진보시켰는가, 혹은 타락시켰는가, 였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는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문제임을 예감한다.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이 학문과 예술이 인류의 진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는 것에 반하여 루소는 그에 반대 입장을 전개하고는 당당하게 수상하고 만다. 그것이 그의 학운의 시작이었다.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그는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쓰기도 했고, 당시의 여러 지식인들과 편지로, 지면으로 토론을 진행하며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볼테르는 그의 끈질긴 맞수였다. 볼테르의 눈에는 루소가 눈의 가시처럼 보였고, 루소 또한 볼테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편지 뒤 적어도 루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볼테르의 예봉을 꺾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루소는 자신 스스로에 뿌듯함을 느꼈다. 아, 자신의 왕국 속에서 안락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저 볼테르에게 한 방을 먹여주는 이 기쁨이란! 그런 일은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으리라.

 

신 엘로이즈, 의 성공은 당시로서는 놀랄정도였다. 그의 거처로 수많은 인물들의 각양각색의 편지들이 날아왔다. 신분의 고하는 상관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 엘로이즈, 를 보고 감탄을 하고 그와 친교를 맺고 싶어했다. 당시 인물들과는 거리를 두던 루소에게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성공이었다. 단순히 글만으로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이니 말이다. 에밀, 또한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물론 그 에밀, 대로의 훈육 방식이 잘 들어맞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그 훈육 방식이 애를 한 번도 길러본 적 없는, 그러니까 고아원에다가 자신이 낳은 자녀를 모두 맡겨 버린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는 해도, 어떻게 하면 품위있게 기를 수 있을까, 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최고의 선택은 에밀, 이었다. 그리고 앞서 마을의 점장이,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마을의 점장이, 는 상당한  인기를 가졌다. 국왕앞에서 시연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표절시비도 많이 겪고 (음악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수 있겠어!) 제대로 된 저작권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의 질투심의 시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전역을 강타하는 그 마을의 점장이, 는 루소의 작품이었다.

 

이런 죄과와 빛을 감싸안으며, 그가 빠진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기형적인 사랑이었다. 친구의 정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랑의 주인공은 두드토 부인이었다. 사랑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결국 'Quos vult perdere Jupiter dementat' 그러니까 신이 마치 자신의 이성을 앗아간 것 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파국으로의 한 걸음이었다. 물론 이 사랑에 대한 고백, 에서의 언급은 사실 그리 객관적이지는 못하다. 루소는 자신의 모든 고백에서 '솔직함' 을 가지고 최대한 '객관적' 으로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이 스캔들은 그에게 빛을 가져다 주지만 동시에 그에게 어둠도 주게 된다. 그에게 자신의 정부를 소개시켜준 친구와의 사이는 아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루소가 그런 두드토 부인에의 열정을 품고 있는 한 그들 세명, 그러니까 루소, 그의 친구(생 랑베르), 두드토 부인, 의 관계는 기형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 속의 여자와 그녀를 동일시했기에 쉽게 그 열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신 엘로이즈, 는 좋게 말하자면 루소 자신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가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망상 속의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소 자신도 신 엘로이즈, 의 출판 뒤에 언급한다. '만약 두드토 부인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이 신 엘로이즈는 순전히 망상만으로 쓰인 것이다, 라는 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그렇기에 이 사랑은 그에게 빛을 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둠을 주었다. 결국 그와 그의 후원자였던 데피네 부인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음모(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였던 사람들은 그에게 말한다. 그런 생활방식이 뭐가 좋냐고, 왜 자꾸 시골에 틀어박혀서 사냐,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그리고 그런 사랑은 그만두는게 좋다고. 그런 말들을 전해듣고, 혹은 직접 들은 그는 이제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하직을 고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더 깊은 은둔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신이 있다면, 쥬피터가 있다면, 그가 원하는 파멸은 결국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음을 당시 세상사람들은 결국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물론 이 고백의 후속편으로 앞서 언급한 대화, 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을 내놓지만 이 고백,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잘 드러내주는 글은 없으리라.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뒤의 대화, 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자신을 위한 글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 는 좀 수준있게 자신을 알리려는, 그러니까 고백, 만 읽고 자신을 곡해하고 음해하는 인물들에 대항해서 쓴 글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자신을 위한 글이다.) 이 고백, 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니 말이다. 고백이 끝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는 않는다. 이 루소가 생을 다하더라도 저 루소가 등장하고, 결국 몇 십만번이고 또다른 루소가 등장해서 니체의 말대로 영원회귀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 실제로도 루소는 고백, 을 내놓고 꽤 오래 살아간다. 영국에 방문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루소의 영혼이 고백, 을 경계로 조금은 바뀌었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자신의 죄과와 영예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었으니까. 그 깨달음의 끝은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였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야박한 신, 쥬피터에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신이시여, 내 가슴을 흔들고 내 삶을 흔들어 현실에 매몰되게 만들지라도

 

이윽고 그 죽음만은 평온하게 하소서.

 

고백, 이 끝난 다음에는 이제 나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 못지않게 실수를 저질렀고, 죄를 지으며 후회로 생을 점철하며 살아가고, 앞으로 얼마나 더 죄를 지을지, 얼마나 더 많은 후회를 할 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지만, 나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이렇게 삶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당신도 당신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 또한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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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1 00:51   좋아요 0 | URL
루소가 자기 아이들을 다 고아원에 보내다니... 그런데 에밀을 썼군요 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교육과 관계있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솔직하게 쓰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루소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있었군요 저는 남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쉽고 잘못한 일은 많지만 다 생각나지도 않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군요

저도 '내가 그렇지' 합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