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게임에 깊게 빠져서.. 한 때 그만두었던 팬픽마저 끄적거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하게 짧게 끄적거릴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 각종 스토리가 폭주해서, 적당히 짜집다가 스스로가 지쳐버렸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글을 접을 수가 없어서 결국 하나를 쓰고 나니.. 더이상 못쓰겠는거야. 머릿속으로 망상하는 것은 잘하지만 역시, 그 망상을 직접 현실에다가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팬픽과 같은 소설을 쓸 때 미리 모든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그린 상태에서 써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머릿속에서 이미 이 등장인물이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 다 떠올려놓은 상태였고, 남은 것은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라는 것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의지력이 먼저 고갈될 것인가, 혹은 소설이 먼저 끝날 것인가, 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나는 내가 쓰는 이 글의 등장인물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 것인지 다 알고 있다. 이것만큼 나를 모순되게 괴롭히는 일은 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있는가? 굳이 핑계를 짓자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즐기자, 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이유가 아니다. 나는 어떤 팬픽션을 쓸 때 나 스스로의 재미를 더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몇 년 뒤에라도 내가 우연히 내 글을 봤을때, 오? 이거 의외로 재미있는데? 라는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일단 만족해야 글이 쓰여지는 거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아주 탄탄한 스토리를 떠올렸지만, 그 스토리를 굳이 글로 옮겨야 되는가, 라는 물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결국 이 팬픽을 끝내야지, 고작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까, 라는 생각이 이겼지만, 다음번은 또 무기한 연장되었다. 역시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렇게 팬픽션을 꼼꼼하게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면 본인도 모르는 줄거리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맡겨서 백지를 채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설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게 되니까. 한 두 번 그렇게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렇게는 못한다. 일종의 딜레마인거다.

그러고보면 나는 생산자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이 더 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병매, 와 같은 책도 일종의 통 큰 팬픽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이런 저런 팬픽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많은 팬픽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팬픽을 들자면.. 가장 먼저 마법 소녀 리나, 그러니까 슬레이어즈에 관한 팬픽을 쓴 Gaya님이 떠오른다. 세일룬의 역풍, 이라는 팬픽이나 인연의 끝, 과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한다. 세일룬의 역풍, 은 리나나 가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멜리아가 주인공이다.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관계를 부각시켜 스토리를 잘 진행시켰는데, 사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리나-가우리 라인과 아멜리아-제르가디스 라인은 슬레이어즈 애니메이션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실제 원작에서는 별다른 그런 러브라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죽하면 거대 슬레이어즈 팬 커뮤니티 중에 린젤, 리나-제르가디스, 이라는 이름이 있는 커뮤니티가 있겠는가.) 뭐, 생각해보면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사이가 크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는 않으니 상관없기는 하다. 이 작품은 현재 개인 홈페이지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물론 Gaya님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으로 더 기억한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크툴루 신화에 대한 것으로. 크툴루 신화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크툴루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분명 이야기를 들어본 분이리라.
그다음에는 창세기전 팬픽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동방검사열전, 을 쓴 검신, 정하늘님의 글도 정말 대단한 필력으로 기억한다. 칠성전기, 라는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분이기도 한데, (칠성 전기는 팬픽이 아니다..) 동방검사열전은 창세기전, 이라는 게임의 세계관에 나오는 동방대륙의 검사, 낭천을 주인공으로, 한대륙, 이라는 곳에서 무협 느낌을 적당히 섞어서 쓴 글인데, 이후에 나온 다른 창세기전 팬픽들이 많지만, 아마 이 팬픽 이상으로 나에게 감명깊게 다가온 글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창세기전2 소설화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작가가 내 기억으로는 시드 노벨, 이라는 출판사에 있는 아크, 라는 필명을 쓰시던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작품도 괜찮게 읽었지만(이 아크님은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창세기전 4 온라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검신님이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물론 검신님이 동방검사열전 뿐만 아니라 창세기전2 시리즈의 팬픽도 어느 정도 남겼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어느 한 팬사이트에서 보관중에 있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한창 신극장판 제작 중이라 느낌이 새롭기도 한데, 에반게리온의 팬픽 중 정말 유명한 팬픽이 두 개 있다. 둘다 일본에서 쓰여진 건데, 하나는 제네시스 큐Genesis Q이고, 다른 하나는 2nd ring이다. 둘다 뛰어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Genesis Q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에반게리온에 나오던 사도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와 아스카, 레이가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면? 물론 그런 상황이 원작에 아무런 연원도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Genesis Q의 경우에는 에반게리온 TV판의 앤딩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반게리온 TV판에서 희대의 낚시가 나온 적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화로 알고 있는데,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의 환상에서 레이와 아스카와 함께 학교 생활을 보내는, 그런 장면 말이다. 물론 에반게리온은 그런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아마 결말은 미적지근하게, 신지가 '그래, 내가 결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어' 와 같은 식으로 끝났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종의 자유로운 결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결심은 극장판 Death and Rebirth, Air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Genesis Q는 바로 저 장면, 레이와 아스카가 함께 지내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러고보면 셋 다 아직 미완결 상태라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슬레이어즈 팬픽인 인연의 끝은 완결 상태이지만 세일룬의 역풍은 아직 미완결 상태이고 (다른 작품을 보면 이미 이후 스토리들은 다 짜여져 있는 듯 하다.) 창세기전 동방검사열전을 쓴 검신님은 넷상 활동에서 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의 모뎀 통신할 때 활동을 하셨던 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반게리온 팬픽인 2nd ring은 완결되었지만, Genesis Q는.. 아직 완결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거의 최종장 페이스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에반게리온 팬픽 중에서 은근히 명작들이 많았던 것 같다. 리턴 투 에반게리온, 과 같은 작품도 명작 대열에 넣을 수 있으리라. 이런 팬팩들을 몇 가지 부류로 자세히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미루고, 적어도 저 사실은 그만큼 에반게리온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창작욕, 이라는 것을 불태우게 만들 정도로, 라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본인은 에반게리온 팬픽을 쓰지는 않았지만, 풋.
적어도 가야Gaya님이 팬픽을 쓰시다가 멈춘 이유는 약간은 짐작이 된다. 물론 실제 생활에서 바쁘기 때문에, 와 같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이유를 제외하자면 이미 큼직한 스토리가 짜여져 있기에, (가야님의 다른 단편팬픽들을 보면 세일룬의 역풍, 에서 리나 등등이 어떤 결말을 맞을 지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앞서 내가 겪은 것 처럼, 의지력과 소설 분량이 서로 싸운게 아닐까, 하고. 처음에 그 작품을 좋아한 상태라면 어떻게든 의지력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계속 열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진한 사랑이라도 결국에는 식어 사라진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나, 혹은 소설과 같은 사물이라면. 그렇기에 더 쓰기가 힘들어지지는 않았을까? 이는 에바 팬픽인 Genesis Q를 쓰..고 있는(거의 10년, 아니 20년은 된 팬픽션인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Nary님도 마찬가지리라. Nary님은 팬픽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겨우 힘을 모아 썼다고.
그렇다면 이런 팬픽은 왜 쓰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스토리를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주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만 해도 작가에게 '누구랑 누구 이어지게 후일담 좀 써주세요' 라고 메일을 쓸 정도였으니, 풋. 그러다보면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작품 속에 집어넣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한 편 뚝딱 써지는 것이다. 그 캐릭터가 너무 악질적으로 원래 작가의 등장인물들을 속된 말로 깔아뭉갠다거나, 혹은 능력적으로 너무 우위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삽입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글을 써내려가는데. 기존 작가들의 등장인물들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너무 소모가 빨리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들이 쓰이다보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도 들게 된다. 이쯤 되면 만약에 자신의 오리지널 캐릭터를 삽입한 경우라면 그 캐릭터에 당위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도록 말이지.

앞으로 이런 팬픽션들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혼자서 품는 상상이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상상은 그저 품고 있다면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나서기 시작할 때 현실이 된다. 상상만으로 만족못할 때 그 지점에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내가 든 예들은 모두다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소설에 관련되어있지만, 꼭 저런 장르가 아니더라도 좋다. 사실은 어디서든 단초가 되어 글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 처럼 아예 이야기가 그 구성상으로 완벽하게 완결되어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서 에르큘 포아로가 죽은 뒤에 그의 친우 헤이스팅스가 탐정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직접 써서 발표하겠다면 저작권부터 알아봐야겠지만 - 그러고보면 셜록 홈즈의 경우에는 최근에 코난 도일 재단에서 인정받은 '팬픽' 아닌 '팬픽' 이 나왔다. 왼쪽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나로서는 코난 도일이 직접 쓰지 않은 책이 아니면 안돼, 하는 심정이지만.. 일종의 원리주의 셜로키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풋.) 그 외에 다양한 고전 소설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 소설 뿐만이 아니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는가? 한니발 렉터는 한니발, 에서 별다른 사건 없이(그의 식인 행각에 비하면 전혀 아무런 응징이나 보복 없이)그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 다음부터는 독자의 영역이다. 독자는 한니발 렉터가 그 잔인성을 계속 드러내는 이야기를 택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숙적이었던 그레이엄이 부활하는 이야기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상상력이 어디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팬픽션은 어디서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팬픽션이 소설 형식으로만 남게 되는 시기도 사라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라면 만화 형식으로 후일담을 그려낼 수 도 있을 것이고(이미 동인지, 라는 형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19금 내용이 많아서 그렇지..) 원본이 게임이라면 게임 형식으로 팬픽션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다른 작품들의 영상을 하나로 묶어서 줄거리를 이어내는 형식도 생길 것이다. (소위 말하는 MAD무비의 경우가 이와 같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해당되는 시간은.. 공들인 만큼 많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소설 형식으로의 팬픽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쓰기, 라는 것은 이야기하는 것, 다음으로 누구나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제는 컴퓨터가 생겼기에 글쓰는데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리지 않기도 할테니. 팬픽이 사라지는 시기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흥미있는 주제가 없을 때 다가올 것이다. 감정이 죽은 뒤 행동의 죽음이 온다. 아마, 이 말은 굳이 팬픽션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p.s. 으아.. 너무 바쁜데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오늘 밤은 하얗게 새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