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수레바퀴 -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강대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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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총선이 있던 엊그제는 봄비가 촉촉히 내렸다.  잎샘추위도 꽃샘추위도 다 지난 듯한 이맘때쯤에 내리는 비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야말로 단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자서전<생의 수레바퀴>를 읽으며 '죽음'을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언제나 담담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그저 허상일 뿐, 실제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새 생명을 키우는 봄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 그것이 '죽음'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사람은 같은 근원에서 왔고 같은 근원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악몽, 신이 내린 벌처럼 보이는 모든 시련은 실제로는 신의 선물이다.  그것들은 성장의 기회이며, 성장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P.384)

 

<인생수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스위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세 쌍둥이의 맏이로, 살아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900그램의 미숙아로 인생을 시작한 그녀가 인류에게 가장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 했던 '죽음'이라는 주제에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던 저자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문구 회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뛰쳐나갔던 당찬 소녀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폴란드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나치스의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한다.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날 밤을 보낸 막사의 벽마다 가득 그려진 나비 그림을 보며 품었던 강한 의문은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가 지나서였다.

 

"우리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 오를 번데기를 품은 고치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고통도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아름다운 한 마리의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노래하고 춤춘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커다란 사랑에 둘러싸인다."  (P.382)

 

선거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자서전을 쏟아내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행태에 신물이 난 나는 자서전이라면 지레 피하고 본다.  읽히지도 않는 쓰레기와 같은 책을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출판회를 갖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는 자서전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떠돌이 철학자로 유명한 에릭 호퍼의 자서전을 읽으려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눈에 띈 이 책을 나는 순간의 갈등도 없이 대출을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때의 선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내가 읽은 자서전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리에 도르프만의 자서전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와 <스콧 니어링 자서전>, <간디 자서전>, 그리고 이 책 <생의 수레바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책들 상호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만 같다.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이자 죽음학의 세계적인 대가인 저자가 말년에 이르러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와 침대를 오가며 생활하는 악조건 속에서 생을 되돌아보며 심혈을 기울여 썼다는 이 책에서 의학자와 영성가로 평생을 살았던 저자의 분투와 노력이 가슴 깊이 느껴진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분야에 있어 왜 스위스 출신들이 많은가? 하는 의문이 그것인데, 칼 구스타프 융이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삶을 살펴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깊은 사색과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과의 친숙함이 원숙한 삶을 살게 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성장하는 데 특별한 스승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의 스승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이로, 말기 환자로, 청소부로......, 세상의 그 어떤 학설과 과학도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P.189)

 

저자의 또 다른 책<상실수업>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있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부딪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우리는 그럴 때 비로소 평화를 얻는다.  며칠 전 한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한 여배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극심한 고난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 살았던 그녀의 얼굴에서 한줄기 햇살처럼 따뜻한 평화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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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바쁘게 살다보면 꼭 해야지 하고 맘 먹었던 일들 중 대부분을 손도 대지 못한 채 흘려보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순간순간 드는 생각은 내가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하고 그저 계획으로만 그쳤던 일들의 목록만 따져보아도 어림잡아 한 트럭은 족히 되겠다 하는 허망함이다.  엊그제 저녁에 나는 새로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외출장과 장인어른의 수술로 가르칠 아이들의 선발도 늦어졌었고, 지난 주 월요일에 약속했던 첫 수업도 하지 못했다.  형편이 넉넉한 집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학원을 빠질 수 있을까를 궁리하지만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가정형편상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은 수업을 하루만 걸러도 따지듯 그 이유를 캐묻곤 한다.

 

아이들에게 내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시작한 잡담이 어쩌다 보니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지 못했던 일들까지 튀어나왔다.  밤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흐른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껏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 많은 일들을 마무리지으려면 이 담에 나이 들어 죽었다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게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야."하며 농담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고등학생인 아이들은 내 얘기에 회답을 하듯 자신들이 나보다 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다며 그런 논리라면 서너 번은 다시 태어나야 할 거란다.

 

청명,한식도 지난, 봄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기에도 약간 멋적고 쑥스러운 시기인 4월.  그럼에도 아침, 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하다.  저녁을 먹고 조잘대며 나의 숙소를 찾는 중학생들과는 달리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제법 늦은 시각에 오는 고등학생들의 표정은 매우 어둡다.  현재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때때로 그들의 희망과 열정마저 날려버린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확신할 수 없는 모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건강상의 문제로 공부방을 그만둘 때 이제 두 번 다시 그 어려운 일을 시도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출퇴근길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아이들로부터 걸려온 안부 전화를 받게되면서 나도 모르게 그 다짐을 깨뜨렸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요, 부와 명예가 따르는 일도 아닌데 나는 또 다시 그 험난한 길로 들어서 그동안 내가 틈틈이 쓰고 기록했던 <초보강사의 좌충우돌> 그 2부를 준비하고 있다.  직장 동료들과 가족들의 걱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까 싶어 알리지 않고 시작된 일.  작년에는 일주일 내내 수업을 했었지만 금년에는 월,수,금만 하기로 아이들과 합의를 보았는데도 한번 겪었던 일인지라 그 압박감이 만만지 않다.  작년에 가르쳤던 아이들과 새로 선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할런지...  

지금 중학생 아이들이 골똘히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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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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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은 그의 저서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시인의 관찰은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계맺기'에 지나지 않으니 더불어 사는 모든 것들을 세세히 살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잘 꾸리고자 하는 사람의 첫번째 임무가 되어야 하며 좋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에세이스트였던 시턴의 글을 읽었다.  화려한 치장이나 양념을 곁들이지 않은 담백하고 솔직한 글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환하게 비춘다고나 할까.  아무튼 학자로서의 시턴은 그 이름의 무게에 걸맞게 글솜씨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곳은 숲의 최북단 지역으로, 숲이 끝나면서 나무들도 점차 왜소해지는 구역이다.  눈에 보이는 가문비나무들마다 이 척박한 곳에서 자라고 씨를 뿌리느라 평생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흔적들이 보였다.  추위와 역경 때문에 나무들이 모두 하나같이 잘았다.  하지만 그런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온 결과는 무척 아름다웠다."  (P.236)

 

이 책에서 시턴은 1907년 캐나다 북서부의 삼림지대와 초원지대를 6개월 동안 카누를 타고 여행을 하며 그가 겪고 보았던 것들을 직접 그린 스케치와 더불어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이나 전의 기록이지만 그는 서문에서 시간의 흐름을 50년쯤 되돌려 1년 정도 살다 올 수만 있다면 어떤 수고인들 마다하지 않겠다고 아쉬워 한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았고, 지금보다 훨씬 생생한 자연을 볼 수 있었을 텐데도 그 당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자연과 풍경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파괴된 자연을 보며 애통함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터이다.  작가는 북극 지역을 둘러본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더 주체하지 못할 때까지 내 마음이 방랑벽에 흠뻑 젖어들게 내버려두었었고, 북풍이 뒤로 남긴 자취를 따라 먼 곳을 향해 길을 나섰었다.  나는 거대한 북쪽의 숲에서 붉은 살갗의 인디언과,버펄로, 무스, 늑대들과 함께 어울렸다.  나는 인간의 발자취와 총소리가 닿은 적 없고, 대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거대한 고독의 땅을 보았다.  (중략)  이 모두가 내가 열정을 불태워 해낸 일들이다.  그러니 이제 족한가?  족하다니!  세상 그 누가 그토록 오랜 꿈을 한 번 찔끔 맛본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P.400)

 

작가에게 6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았던 여행은 그저 아쉬웠던 하루의 기억처럼 짧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동화되고, 그 모든 것들과 교감할 때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맛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한 가치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

 

오늘 아침,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제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과 개인 하늘을 보며 언제나처럼 산을 올랐었다.  산책로에 쌓여있는 잔가지와 솔잎, 낙엽 등을 밟으며 을씨년스러웠던 어제의 날씨를 생각했다.  길어지는 상념을 깨우려는 듯 청설모 한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난다.  그리고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공중으로 날았다.  신선한 아침이었다.  이 상쾌한 기분을 아파트에 누워 어찌 맛볼 수 있으랴.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시턴의 묘사는 그가 좋은 화가이기도 하고, 좋은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가 직접 그린 스케치와 쉽고, 유머러스한 글은 아이와 같이 솔직 담백한 그의 성격과 잘 어우러져 100년 전 북극의 자연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생각해 보면 그 시대에 우리의 산천도 호랑이와 여우, 곰과 늑대가 뛰놀았던 에덴 동산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바람처럼 딱 1년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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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미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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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 시절, 어학연수차 갔던 호주에서 나는 1년을 살았다.  유학 알선 업체에 대행을 맡긴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호주에 친인척이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물설고 낯설은 그곳에 가고자 결심했던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호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었다.  자카르타를 경유하여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 막연했던 두려움이 공항 로비에 현실로 펼쳐진 모습을 보자 떠나기 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되돌아 가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만 했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광고지를 보며 집을 알아보고, 떠듬거리는 말로 집주인과 통화를 하고, 어찌어찌 약속을 잡아 집을 구경하고, 월세를 흥정하고...  지금 생각해도 그 숱한 난관을 뚫고 시드니 외곽에 세를 얻어 1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1년을 버텨야 했다.  시드니에서 차를 타고 가도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곳에 셋방을 얻고 보니 당장 급한 것이 교통편이었다.  국제면허를 취득하고 바퀴만 간신히 굴러가는 중고 자동차를 사서 통학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젊은 날의 낭만처럼 느껴지지만 그때는 살아서 한국에 갈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는 내내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호주에 다녀온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경하고 이질적인 지명과 크기와 모양을 짐작할 수 없는 동식물에 반쯤 흥미를 잃고, 그곳에 펼쳐진 풍경과 거대한 고요는 더더구나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으리라.  몇 천 키로를 차로 여행한다는 것, 그 먼 거리를 달리면서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여행 도중에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주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깝다.

 

작가가 호주 전역을 둘러볼 생각을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가 20년 동안의 영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감행했던 것을 떠올리면 대단하다는 생각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도 빌 브라이슨의 위트와 유머가 간간이 드러나지만 작가는 자신의 장점을 조금쯤 숨기고 그 대신에 미지의 영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역사적 기록을 첨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호주의 매력을 만끽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듯하다.  작가의 이러한 배려는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자칫 지루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세계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루루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방식으로 그 바위를 알고 있다고 느낀다(친밀하지 않은 친밀함이라고나 할까).  존재의 깊은 내면 어딘가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원초적인 기억의 단편, 끊어진 DNA의 작은 꼬리가 꿈틀거렸다.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최면 상태에 빠진 듯한 거대한 존재가 종(種)의 단계에서 (어쩌면 올챙이 같은 수준의 단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이 이곳을 찾은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일종의 확신을 느낀다."  (P.344) 

 

뉴욕타임스는 이 책의 소개에 있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기 전이나 향하는 도중에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책이다."라고 썼지만 나는 그 반대다.  최소한 호주를 반쯤 둘러보았거나 호주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떠들썩한 술자리를 갖은 다음날 화장실 바닥에 맘 속의 추억을 모두 토하여 검지 손가락 끝으로 하나하나 헤짚어 가며 혹시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지 찾아볼 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호주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를 읽어야 여행 전의 들뜨고 부푼 마음을 배가시키지 않을까 한다.

 

호주에서 어학 연수를 할 때 내가 자리를 잡고 일상의 쳇바퀴를 서툴게 돌리고 있을 즈음 퍼스로 어학 연수를 왔다는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고자 퍼스까지 당장 달려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전화를 끊고 지도를 펼쳤을 때, 내가 한 약속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시드니에서 장장 4000키로, 길이라도 잘못 들면 배가 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내 낡은 자가용을 타고 달려갈 생각을 했으니...  같은 집에 살던 모든 사람들(특히 주인집 아주머니)이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 그들의 표정은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길에서 어이없는 실수와 자동차 고장으로 고생을 사서 한 셈이었지만 그 덕분에 친구와 함께 이 책의 마지막장에 나오는 샤크만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작가는 여행을 끝내는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큰 여행을 끝낼 때마다 나를 압도하는 우울한 심정으로 운전을 했다.  하루 이틀 후면 뉴햄프셔로 돌아가고, 이 모든 경험은 디즈니 영화에서처럼 내 머릿속의 먼지 나는 다락방으로 직행해 반세기 동안 혼란스러웠던 삶의 우스꽝스럽고 뒤죽박죽인 축적물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P.404)

 

책은 아웃백과 더불어 시드니와 캔버라, 멜버른 등의 여러 도시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산호 군락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등 다양한 여행 목적지들을 소개하고 있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 비해 책의 내용은 소심할 정도로 촘촘하고 세심하다.  호주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기 전에 한번쯤은 다시 찾고 싶은 꿈을 꿀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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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 운명조차 빼앗아가지 못한 '영혼의 기록'
위지안 지음, 이현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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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용량 무한정'의 상자가 하나씩 있다.  사람들은 의심없이 쓸어담을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의 지식을 값진 보물이라도 되는 양 늙어 죽을 때까지 그저 담기만 할 뿐 한번쯤 꺼내어 주름을 펴고, 필요없다 싶은 것은 버리고 하여 차곡차곡 정리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지식의 상자를 곱게 포장하여 생각 날 때마다 다른 이에게 보여주며 으스대곤 한다. 이러한 상자에는 으레 '세상의 모든 지식' 또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 등등의 꼬리표가 달리게 마련인데 이사를 가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는 아내의 손길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결코 이 상자의 내용물을 꺼내어 필요한 것인지 따져보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당연히 옳다'라거나 '지극히 필요하다'라고 믿는다.  내가 사는 곳의 맞은 편에 있는 'e - 편한 세상'이라는 아파트에 입주하하기만 하면 있던 불편도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이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상자에 담긴 내용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이 상자에 지배당한다는 데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참으로 우습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 상자의 위세에 눌려 단 한번의 항변도 하지 못한채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하며 평생을 사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조목조목 따져보았던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뭔가를 잡기 위해서는 아주 먼 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십중팔구 그런 믿음이란 것이 '턱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혹은 모든 게 끝난 뒤에야 그보다 훨씬 값진 일을 지나쳐버렸음을 후회하곤 한다.  이제부터 삶의 끝에 와서 내가 알게 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생각이다.  어떤 이야기는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고통 덕분에 내가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사실이니, 세상 일이란 게 원래 그런 모양이다."  (P.17)

   

'병(病)'이란 끝내 철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조물주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 닥친 일이 아니니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서건, 밖에서건 천둥벌거숭이처럼 제 분수도 모른채 날뛰던 사람도 일단 불치병에 걸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짐은 물론이요, 저 사람의 본성 어디에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저절로 들 정도로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면 누구나 철인(哲人)이 된다.  그리고 이 한순간의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진다.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나는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바친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더 즐거워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을 테니까."  (P.146)

 

작가는 서른 살, 최연소 나이로 세계 100대 대학, 중국 3대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에 올랐다고 한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제 막 ‘엄마’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1살배기 아들과 자상한 남편 그리고 성공을 향한 출발선에 섰던 교수로서의 새로운 삶… .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말기 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온몸에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이어졌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소중한 가치들을 돌아보았고, ‘삶의 끝에 와서야 알게 된 것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어느 환자의 병상일기가 아니다.  그녀의 글은 지금껏 진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 익숙하고 편한 것들, 그러므로 더욱 의심하지 않았고, 가까이 가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며, 그런 것들과의 과감한 결별을 부추기는 선언문이다.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삶의 끝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와 감추어진 슬픔이 몇 번씩이나 나를 울게 했지만 어머니 손길처럼 담백하고 자상하게 전해준 그녀의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만일 나에게 허락된 생이 여기까지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을 오롯이 겨안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으니까."  (P.300)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는 말없음표의 슬픈 운명처럼 인간의 삶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말없이 달리다 어느 순간 멈춰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이런 생각에 작가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 수많은 말없음의 나날에 숨겨진 소중한 의미를 찾으라고 한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는 게으름의 변명으로 의심없이 쓸어담았던 내 지식의 상자를 정리할 생각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번쯤은 의심하며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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