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3월의 기온치고는 다소 더운 날이었습니다.

산에는 이제 막 쌀알만한 새순이 돋고 있는데...

성마른 계절이 모퉁이를 돌 것도 없이 남의 집 담장을 훌쩍 뛰어 넘어 마당을 가로지른 것처럼 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세월은 제각기 혼자 부담해야 할 무게만 남겨놓은 채 지나가는 거라지만 계절의 순환을 교과서처럼 믿는 사람들의 당혹감마저 지우지는 못하는 듯하였습니다.

 

급히 먹은 점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위 속의 음식물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참을 메슥거렸습니다.  소화도 시킬 겸 들렀던 동네 공원.  생선 비늘 같은 마른 햇살이 함뿍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왁자한 소란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3월의 기이한 여름 속에서 머물렀습니다.

 

세상의 자유를 다 얻은 듯한 표정들.

미세먼지의 공포를 잊게 한 것도, 우중충한 집안을 과감히 벗어나게 한 것도 모두 설익은 햇살의 도발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때이른 초여름 더위보다는 반소매 차림으로도 집을 나설 수 있는 간편함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형 마트의 '원 플러스 원' 상품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 절망과 희망도 함께 오는 것이라 여깁니다.  미세먼지의 공포도, 이상 고온의 절망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망에 한껏 가벼워진 듯 보였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메슥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한동안 서성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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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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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만 잘 한다고 해서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거나 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떤 실수나 그로 인한 비난과 질책이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하자면 상황을 수용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다듬는 것이 삶에 있어서는 더 유용하다 하겠다.  젊은 시절에 나는 그것이 꼭 패배주의인 양 생각했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내거나 어떤 상대와도 맞서 싸우리라 결심했었다.  그럴수록 상황은 점점 더 꼬이거나 악화되었다.  젊은 시절의 만용은 때가 되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이지만 이따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일도 많았다.   

 

소설가 은희경의 다섯 번째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읽었다. 표제작을 포함해 6편의 단편이 묶인 이 소설집은 은희경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로 '역시, 은희경이야!'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각각의 소설들은 내용을 달리하여 전개되지만, 제 살던 터전을 떠나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학업을 위해서, 독립을 갈망하여, 결혼과 함께, 또는 피치 못할 이유로 우리는 고향으로부터 멀어진다.

 

"내가 갇혀 있는 T아일랜드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  나는 거기 실려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더이상 깨어지지 않는 안전함이나 변하지 않는 소중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나는 믿었다.  가을에는 언제나 좋은 일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p.143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중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절망과 고독의 황무지에서 기적처럼 사랑이 움튼다는 것을.  작가는 끝내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약속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고독한 삶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냉정하리만치 등장인물의 삶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삶의 깊은 곳에는 언제나 욕심과 타락이 빚어낸 어설픔과 군색한 그 무엇이 있게 마련이지만 먼 훗날 그것은 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때 마리는 언니가 마리를 오해하듯 자신 역시 언니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뭔가를 잘 안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질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p.223~ p.224 '금성녀'중에서)

 

각자 저마다의 삶을 살고, 저마다의 개별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지만 사는 동안에 철석같이 믿었던 나만의 특별했던 삶은 하나의 각기 다른 눈송이가 땅에 닿아 스러지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 자신의 개별적인 특별함을 잃고 서로가 연대하는 보편성의 강물로 만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속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배운다.  특별했던 사랑도, 특별했던 추억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보통의 그 무엇이 된다는 것에서 자신만의 그 무엇을 꿈꾼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자 하룻강아지의 무모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고양이와 슬픔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이다.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서로 이용하지만 거짓은 끼어들지 않는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씨로만 이루어졌던 열세 살의 그 여름날.  어떤 고독과 죽음도 그렇게 만났다."    (p.116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철학은 결국 문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각자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며, 더할 수 없이 성스럽다.  어느 위대한 철학자인들 눈송이처럼 많은 저마다의 삶을 한마디의 말로 확정할 수 있으랴.  다만 사랑으로 이어진 개별적인 삶의 슬픈 연대만 계속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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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4-03-28 21:53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 책이 다른 녀석이 갖고 있어서 그러는데
 단편집이었어요 ? 엣, 저 정말 몰랐는데 .. . 그랬구나 ..
 그렇다면 첫 부락에 실린 단편은 정말 굉장한거네요.
 은희경이라면 그 진부한 스토리를 얼마든지 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단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 .
 워낙에 단편이라면 편식하는지라, 구매하지도, 읽지도 않는데 !
 
 굉장해요 !
 
 

꼼쥐 2014-03-29 12:46   좋아요 0 | URL
단편소설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이라고 하는 게 옳을 듯싶어요.
각자 다른 이야기이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죠. 그 연결고리를 꼼꼼히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인 거 같아요. 한번 읽어보세요. 생각보다 훨씬 재밌답니다.
 

숙소 근처에는 제법 큰 규모의 시립도서관이 있습니다.  어쩌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놀이공간도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의 도서관은 시설도 좋고 장서 규모도 놀랄 정도이지요.  몇 년째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도서관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취향의 단골 이용자들 얼굴도 이제는 제법 눈에 익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서관 로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인사를 받거나 인사를 하게 됩니다.

 

어제도 나는 한참이나 늦은 시각에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찢어지거나 구겨지지 않은 일상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금간 데 없이 매끈한 시간을 파노라마 영화처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느낌표의 아랫점을 정성스레 찍는 일처럼 자연스런 일상이었습니다.  어두침침한 로비를 지나 도서관 2층으로 향하는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데 공중전화 앞에 서있던 한 여인으로부터 인사를 받았습니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얼굴을 확인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습니다.  도서관의 식당 아저씨와 애기를 나누는 도중에 서너 번쯤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학생인지 아가씨인지 잘 알지 못하는 그 여자와 나는  한두 번쯤 멀리서 인사를 하던 그런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저만치 멀어지려는데 아가씨도 바삐 전화를 끊고 내 뒤를 좇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층 열람실에서 책 한 권을 빌리고 3층 휴게실을 둘러보려는데 그 아가씨와 다시 마주쳤습니다.

 

휴게실에는 혼자서 서성이던 그녀와 원탁에 둘러 앉은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보였습니다.  "여자친구 있어요?"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 대상이 나라는 사실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아줌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그때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면서 살짝 미소를 띄웠던 것 같아요.  그 상황은 마치 상영시간이 훌쩍 지난 영화관 안에서 지정된 좌석을 찾느라 기웃대는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조명이 꺼진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는 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을 때 그 아가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표정으로 "여자친구 있어요?" 똑 같은 질문을 재차 물었습니다.  "아니, 없는데요.  왜요?"   감색 후드티와 비슷한 색깔의 스키니진을 입은, 등에는 군청색 백팩을 맨 그 아가씨는 "나도 남자친구 없는데..."가늘게 말하며 어둠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한쪽 눈에 약간의 사시 기가 있는, 정상인에 비해 조금쯤 지능이 낮다고 들었던 그 아가씨는 이 봄 살구꽃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이 궁금했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녀는 보풀거리는 꿈이 자랄 나이를 지나 목련꽃처럼 순결한 사랑을 할 나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위가 한켜씩 벗겨질 때마다 색깔을 달리하던 나무들이 사랑처럼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려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는 수줍게 핀 목련을 보았습니다.  꿈처럼 순결한 봄입니다.  누구의 가슴엔들 사랑이 움트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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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고수를 만나라 - 경지에 오른 사람들, 그들이 사는 법
한근태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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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문학작품만 읽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이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무턱대고 잡았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입니다.  비행기도 항로를 따라 운행하듯이 독서에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가 봅니다.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낯선 길로 접어들 때면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독서의 길을 찾아나설 때 나침반처럼 이용하는 것은 또한 책입니다.  책에서 또 다른 길을 찾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달달한 문체에 익숙해진 나의 뇌가 싫다고 버티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면 살살 달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한근태 님이 쓴 <일생에 한번은 고수를 만나라>를 읽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자기계발서의 범주에 속할 듯합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즐겨 읽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권유나 제목에서 오는 강한 끌림으로 인해 책을 집어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자기계발서의 특성상 내용은 그닥 신통한 게 없습니다.  기업체의 임직원이나 일반 대중을 위한 강의 목적으로 쓰인 까닭에 이 책 저 책에서 옮겨 적은 것이 대부분이고 그런 내용들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여러 번 읽어보았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짜깁기'이자 요약본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살짝 덧씌운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보면 때론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평소에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럭저럭 유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책 속에는 참고도서로 등장하는 여러 권의 책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놓았기 때문에 한 권을 읽어도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연간 독서량이 비교적 낮은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잘 팔리는 이유는 아마 그런 목적도 숨어 있겠지요. 

 

아무튼 이 책에서 말하는 '고수(高手)'는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저자는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하거나 자문을 구함으로써 자신이 터득했던 '고수가 되는 길'을 책으로 정리한 듯 보입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고수로 가는 길, 2장. 고수 그들이 사는 방식, 3장. 고수의 마음 관리, 4장. 고수의 생각법, 5장. 고수, 사람을 얻다'가 그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목차만 읽어도 책의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결국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열심히' 또는 '최선을 다하여'라는 말만큼 막연한 말도 없습니다.  무작정 열심히 하자고 결심하는 것은 안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내가 관심있게 보았던 부분은 제3장 '고수의 마음 관리'였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고수들의 마음 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호기심이 강하다.  2. 주제파악을 잘 한다.  3. 자신에 대해 스스로 광고하거나 자랑을 하지 않는다.  4. 화를 내지 않는다.  5.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6. 철학적 뼈대가 있다.  7.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한다.  8.매사에 긍정적이다.  9.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10. 근검절약하며 절제하는 삶을 산다.

 

"나는 새벽마다 차를 마시며 혼자 명상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하루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어제 일을 복습하고 오늘 벌어질 일을 예습한다.  오늘 만날 사람을 떠올리며 그들과 나눌 얘기를 정리하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한다.  내 영혼을 샤워하는 시간이다.  영혼의 중심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p.184)

 

칼럼니스트 조용헌은 그의 책 <고수 기행>에서 고수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고수의 기준은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그 분야의 프로페셔널들이다.  고수란, 자기분야에 열심히 몰두하되 스스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나아가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라고.    말은 참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고수가 되는 길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고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구요.  분명한 것은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일생을 단 한푼의 후회도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그것은 우리와 같은 하수뿐만 아니라 고수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그릇됨을 알고 만족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품격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다들 바쁘고 번잡해 보입니다.  한가할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일부러 피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위한 바쁨인지, 무엇을 위한 바쁨인지 도통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결심하는 것, 그것이 고수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내가 이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라도 바쁜 흉내를 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사로운 주말 오후입니다.  햇살 속에서 잠시만 눈을 감아도 이렇게 편하고 여유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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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3-29 22:2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바쁜 사람은 고수는 아니군요. 어찌 보면, 요즘같은 세상을 살면서 바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어쩌면 고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꼼쥐 2014-04-01 16:01   좋아요 0 | URL
바쁘게 살면서도 순간순간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는 분이라면 고수라 하겠지요. 저는 늘 바쁘다고 불평만 할 줄 알지 여유라고는 도통 없으니...
하수도 그런 하수가 없겠지요.
 

몇 년 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기 없기로 유명한 인문학 도서가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에 대하여 다들 놀라고 의아해 했었죠.  혹자는 우리나라의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사회 현실이 상승작용을 하여 그랬다고도 하고, 혹자는 자기만족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적합한 책이라서 그랬다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구입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구매 동기를 물어본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정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더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정의란 "예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칭찬하는 연인의 거짓말처럼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시장의 좌판에 널부러진 고등어처럼 자주 보거나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정의에 대하여 확고하고도 명확한,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객관적인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도 없고 자주 겪어본 것도 아닌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학습되고 전파되는 것일까요?  실체도 없는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실제적이고도 완전히 객관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힘들어 보입니다.  오히려 정의(正義)를 규정하는 일에 쓸데없이 집착하기보다는 '정의는 어떻게 전파되는가?' 하는 질문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생각하는 정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의(正義)의 개념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국정원의 어느 직원이 증거를 조작하여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어도 그 행위의 정당성을 잘만 포장하여 선전한다면 그것은 곧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많은 범법행위를 저질렀어도 '과거에는 다 그랬고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그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잘 포장된 불의(또는 그렇게 인식되는)는 예수님이 부활하듯 정의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따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전파하려 노력했는가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생각하는 정의가 서로 다르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전파하기 위한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든 애국이든 보이지 않는 실체는 다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따르지 않는 정의는 불의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결국 정의는 홍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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