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만 사흘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동안 언론의 보도로부터 일부러 멀어지려 애써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식들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판에 박인 행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저으기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TV 보도를 보면서 저는 슬픔보다는 오히려 화를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요.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탑승자 수, 구조자 수, 사망자 수가 마치 스트라이크, 볼, 아웃을 표기하는 자막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애도나 추모의 숙연함보다는 숫자가 올라가는 흥분과 들뜬 분위기만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했던 것은 그런 행태에 여러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망자가 29명이든 30명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안타깝고 슬픈 것입니다.  스무 명의 죽음이라고 해서 슬픔도 스무 배가 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될 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까운 생명의 죽음 앞에서조차 매번 경망스럽고 헛된 짓만 하는 걸까요.

 

오히려 하나의 주관 방송사가 차분하고도 통일되게 슬픈 소식을 전할 수는 없는 걸까요?  흥분하거나 경망스럽지 않게 말입니다.  이런 행태는 중심을 잡아야 하는 정부 관계자들도 다르지 않더군요.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길 없지만 탑승자 수나 구조자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입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인지 저는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까닭도 없이 죽어가야 했던 그 각각의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보다도, 그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정보다도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는가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한 생명의 삶조차 한낱 의미도 없는 경쟁에 이용하려는 그들의 사고가 저는 마냥 두렵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이 세월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잠시 팔랑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아스라한 순간을 하릴없이 지켜보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정녕 내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세월호의 침몰 사고 순간부터 나는 눈과 귀를 막은 채 TV와 멀어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입마저 막을 방법은 내게 없었습니다.  잔인하게도 나는 여린 생명이 죽어가는 소식을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듣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실시간 중계로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사고 수습이 다 마무리 된, 마치 조문객이 다 물러 간 슬픔의 언저리에 주저앉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했던 순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입니다.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려던 원래의 계획은 책을 몇 장 읽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테니 안심 해.'라고 말해 줄 악마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소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때문이었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자식을 잃은 어느 학부모의 핏빛 오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 '윌'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국 시골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윌'은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하여 부와 명예, 아름다운 연인까지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인해 그는 사지마비 환자가 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게 됩니다.  '윌'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부모님과 '윌'은 6개월이라는 한시적 유예기간을 두는 데 합의하였고, 그래도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병원에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윌'이 태어난 시골 마을의 치안판사로 재직중인 어머니는 그 약속된 시간마저 지켜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윌'의 추가적인 자살 시도를 방지하고, 삶의 의지를 되살려줄 간병인을 찾는 과정에서 '윌'과 만나게 된 사람이 여자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입니다.  고향 마을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전형적인 시골뜨기였습니다.  '루이자'는 간병인 모집 공고가 났을 때 자신의 직장이었던 카페가 문을 닫아 실직 상태에 있었고, 그녀의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던 루이자는 새로운 직업이 절실했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간의 한시적인 고용 의무를 다하려던 루이자는 '윌'의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 탓에 간병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p.84)

 

어느 날 '루이자'는 6개월이라는 자신의 한시적 고용 관계가 끝나면 '윌'과 그의 가족들이 '윌'의 자발적 죽음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루이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로 '루이자'는 '윌'이 안쓰러워 그 결정을 돌리기 위해 헌신합니다.  반면에 '윌'은 그런 '루이자'가 불쌍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루이자'가 말입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배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114)

 

변심한 '윌'의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루이자'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하고, 혼자서는 시도조차 어려웠던 문신도 합니다.  행복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급기야 사랑의 감정까지 싹트게 됩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윌'과 엉뚱하고 순진한 '루이자'의 사랑은 그렇게 깊어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약 기간의 끝이 다가오면서 '루이자'의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긴 여행을 계획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던 '윌'을 위해 사지마비 환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결국 '윌'의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 바람에 '루이자'는 7년이나 사귀었던 애인과도 결별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지도 않았고, 감당 못할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몇 년씩 사귄 연애를 끝장낼 때 응당 느껴야 할 감정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몹시 차분했고, 약간은 서글펐고, 어쩌면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진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이토록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p.436)

 

'윌'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루이자'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합니다.  열흘 간의 꿈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였음에도 '윌'은 끝내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루이자'는 '윌'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결별합니다.  '윌'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하려는 '윌'과 자신의 집에서 '윌'을 그리워하는 '루이자'.  '윌'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은 '루이자는 결국 스위스로 향합니다.  '윌'과의 마지막 인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자'의 동생 '카트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 토머스를 생각하며.

 

"나는 언니가 윌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남자를 좋아했던 적도 있고 같이 자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나한테 무슨 감수성 칩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귀던 남자들 때문에 운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게 유일하게 그 비슷한 사람은 토머스일 텐데, 그 애가 낯선 나라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내 마음 속에서 뭔가 펄떡 뒤집어졌고, 그게 너무나 섬뜩하게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깊은 곳 정신적인 서류철에다가 그 생각을 꽂아 정리해두고 '생각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닫아버렸다."    (p.502)

 

차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상실의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선택했던 책.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더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진 듯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직시하는 슬픔보다는 유예된 슬픔을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책이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혹시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안다.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에게는 그 질문이 그 질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하자면 기억할 수 있는 연령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책과 떨어져 지냈던 적이 결단코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스운 대답일지 모르지만 내게 책이란 동일시되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책과 가까워진 계기는 부끄러운 애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드셨던 아버지를 피해 나는 친구네 집을 전전했고, 그럴 때마다 책에 빠져 들었다.  한국전래동화나 세계문학전집,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심지어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는 밤이 늦도록 친구의 눈치를 보며 책을 읽었고, 아버지가 잠드셨을 늦은 시각에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새로 사귄 도시의 친구들 앞에서 조금이나마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책밖에 없었으므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등록금의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으로 마음껏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만한 호사가 없다고 늘 생각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한두 권쯤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시작했던 첫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암울했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한 것도 역시 책이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말할 때가 있다.  책 좀 그만 읽으라고.  그러나 멈추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친구네 집에서 읽던 책에서 나던 퀴퀴한 곰팡내의 평온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위함인지...

 

어쩌면 나는 번지점프대 위에 오르는 순간에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그런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책은 나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이없는 일은 아들놈도 나처럼 책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대책이 없다.  나도 남들처럼 이 질문에 우아하고 멋진 말들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런 글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4-04-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길동무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사랑하시기를 빌어요

꼼쥐 2014-04-24 11: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따금 한가한 시간이 찾아와도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작동하는 나의 뇌를 생각할 때 조금 걱정이 되곤 합니다.  마치 방전된 자동차가 '푸르륵 푸르륵'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정적 속에 농밀한 절망만을 남겨둔 채 멈춰버리는 것처럼 나의 뇌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머릿속의 상상이나 걱정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것들이어서 적어도 한가한 시간에는 나의 뇌도 육체와 함께 편히 쉬었으면 좋으련만 무슨 궁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처럼 맞는 한가한 오후를 『오즈의 의류수거함』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낯선 불청객이나 느닷없이 벌어지곤 하는 특별한 사건이 나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쌓여 독서를 하려니 책의 내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모래알갱이들처럼.  어쩌면 현실을 비껴간 작가의 작위적 구성이 약간의 거부감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략 이렇습니다.  외고 입시에 낙방하여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도로시(본명),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닉네임), 자발적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숙자 씨, 식당을 하는 마마, 탈북 새터민 카스 삼촌, 자살을 꿈꾸는 195.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뭉텅뭉텅 사라져가는 행복과 급기야 칼날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슬픈 자화상.

 

이야기는 독서실에서 늦은 귀가를 하던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거함 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멀쩡한 스키니진을 발견한 도로시는 마치 득템한 기분이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장비를 갖춰 동네의 의류수거함을 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류수거함 속에는 옷만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강아지 토토를 맡길 데가 없어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수거한 옷을 넘기게 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의사 부부였던 숙자 씨는 구제역이 창궐하였을 때 가축 살처분 현장에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 트라우마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숙자 씨는 홀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게 됩니다.  마녀를 통하여 알게된 마마는 유능한 자동차 딜러였습니다.  도박 중독자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들은 집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마는 아들이 숨진 옥상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탈북을 하다 다리에 총을 맞았던 카스 삼촌은 도로시처럼 의류수거함을 털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로시는 카스 삼촌과 구역을 나눠 옷을 수거하기로 약속하고 마녀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거리는 도로시가 누군가의 일기장과 상장 뭉치, 사진첩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물건들로부터 자살의 분위기를 감지한 도로시는 그 물건을 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끝없이 시도합니다.  195번 의류수거함 위에 올려 놓은 책 속에 메모지를 끼워 놓음으로써 대화는 이어지고 결국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살을 막아보려는 도로시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5는 결국 미국으로 마약 중독 치료를 받으러 떠나게 되지만 그 전에 도로시와 함께 의류수거함을 돌며 옷을 수거합니다.

 

"숙자 씨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왜 그렇게 195의 일에 매달리느냐는 숙자 씨의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자 씨에게는 단순히 자살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195의 존재가 이미 내 속에 깊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뚜벅뚜벅, 소리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바람처럼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  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195는 어어, 하는 사이에 쑤욱 내 속으로 들어왔다."     (p.118)

 

그렇게 밤의 세계에서 우연처럼 만난 사람들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폐지를 주워 손자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위하여 집에 보일러를 놓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부자 마을의 의류수거함을 터는가 하면 각자가 모았던 돈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여태껏 살아오며 이렇게 자존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항상 1등만 해온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이해 못할 거야."  195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힘없이 웃었다.  "자존감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 대신 자존심이 자리하고 있지."  "그것들의 차이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나는 195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나를 이해시켜준 데에 크게 감탄했다."    (p.218~p.219)    

 

사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달씩 의류수거함을 털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거니와 정기적으로 옷을 수거해 가는 허가 받은 업자가 그것을 모를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마도 의류수거함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고등학생인 도로시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나눔을 베품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지식을 우겨넣음으로써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도 모두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내가 매일 들르는 식당 아주머니가 오늘 "수고하세요." 라는 나의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과 라일락 꽃의 향기가 어제보다 조금 옅어졌다는 것과 공원의 등나무 넝쿨에 꽃이 피고 있다는 것 등을 생생히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상상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아파트나 비슷하겠지만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짧게 자른 파마머리에 세월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분이죠.  물론 저는 그분의 이름도,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눈물의 문신들도, 혹은 즐거웠던 어느 봄날의 추억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나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는 까닭에 1층 현관의 계단을 청소하고 있는 그분과 저는 매일 아침 비슷한 장소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뿐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비슷한 풍경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그분도 잊은 물건이 있었는지 제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할아버지 한 분이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이어 아주머니도 밝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요즘 어찌 지내느냐 물었나 봅니다.  아주머니는 "머슴살이가 뭐 늘 비슷하지요."하자, 할아버지 왈, "아줌마가 왜 머슴이야?" 하고 되물었습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놓아두었던 빨간 양동이를 집어 들며 아주머니께서는 담담히 대답하기를,

"사는 게 다 머슴살이 아닌가요?"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만 들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아주머니의 말씀이, 그 한마디 말이 왜 그토록 크게 들렸었는지...  '누구나의 삶도 다만 하나의 머슴살이에 지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 먹은 종이처럼 차곡차곡 쌓였을 세월의 그림자들이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에 다 배어 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음이 금세 축축해졌는지 할아버지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초록이 싱그러운 봄날이었고, 아름다움 뒤에는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