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기 없기로 유명한 인문학 도서가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에 대하여 다들 놀라고 의아해 했었죠.  혹자는 우리나라의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사회 현실이 상승작용을 하여 그랬다고도 하고, 혹자는 자기만족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적합한 책이라서 그랬다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구입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구매 동기를 물어본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정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더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정의란 "예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칭찬하는 연인의 거짓말처럼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시장의 좌판에 널부러진 고등어처럼 자주 보거나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정의에 대하여 확고하고도 명확한,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객관적인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도 없고 자주 겪어본 것도 아닌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학습되고 전파되는 것일까요?  실체도 없는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실제적이고도 완전히 객관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힘들어 보입니다.  오히려 정의(正義)를 규정하는 일에 쓸데없이 집착하기보다는 '정의는 어떻게 전파되는가?' 하는 질문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생각하는 정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의(正義)의 개념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국정원의 어느 직원이 증거를 조작하여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어도 그 행위의 정당성을 잘만 포장하여 선전한다면 그것은 곧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많은 범법행위를 저질렀어도 '과거에는 다 그랬고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그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잘 포장된 불의(또는 그렇게 인식되는)는 예수님이 부활하듯 정의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따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 전파하려 노력했는가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생각하는 정의가 서로 다르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전파하기 위한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든 애국이든 보이지 않는 실체는 다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따르지 않는 정의는 불의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결국 정의는 홍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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