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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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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에는 극단값이론(extreme value theory)이라는 게 있다. 통계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이 정규분포이론이라면, 극단값이론은 반대로 특이한 이상현상(보통 분포상 outlier라고 불리는)의 발생패턴을 연구한다. 몇 년 전에 출간되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은 이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극단값이란 결국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대 영역 바깥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관측값이라고 할지라도 특이값이 존재하는 경우 모집단의 성향을 왜곡시킬 수 있으므로 보정평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가구별 평균 소득을 추정하기 위한 표본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가장 가난한 누군가를 포함시켰다면 그 평균값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물가지수와 내가 느끼는 체감지수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결국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표본을 설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이나 인문학에서 통계학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남자의 심리에 대하여 작가는 '극단의 왕국((Extrimistan)'에서나 존재할 법한 어떤 남성을 관찰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인 양 추정하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책의 전체 내용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프로이트와 자끄 라캉의 이론을 설명할 때에는 작가의 경험이나 작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인용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생각이나 추측 혹은 인용에서 비롯된 '세계 모든 남성이 다 이렇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었다.  저자도 물론 독자의(특히 남성 독자의) 이와 같은 불편한 심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남자들의 심리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은 주저되었다.  몇 가지 편견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심리의 시옷 자도 듣기 싫어한다는 게 첫번째 편견이었다.  심리 이야기를 쓰게 되면 남자들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 밑에 숨겨둔 아프고, 슬프고, 찌질한 이야기들을 들추게 될 텐데, 그 점에 불편을 느낀 남자들이 책을 집어던질 것이라는 게 두번째 편견이었다.  세번째 편견은 남자들이 결국 분노하여, 내가 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p.4~p.5) 

 

나도 한때 여자들의 심리를 몹시 궁금해 했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교양과목으로 국문학과 과목이었던 문예비평론을 들었을 때였다.  취업과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웬만해서는 한눈을 팔지 않는 경제학과 학생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한가롭고 자유로워 보였던, (때에 따라서는)방탕해 보이기까지 한 국문과 학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때 아주 잠깐 소설을 쓰는 작가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공부 외에는 이렇다 할 경험이 전무했던 나였기에 '여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하는 물음 앞에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자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그 후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접었지만 여자들의 심리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남자들의 심리가 대학시절의 나처럼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오히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시각은 다소 편협되고 공격적인, 이를 테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기술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내 생각과는 크게 벗어난 대목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있어 지적 소양을 갖추지도 못한 내가 저자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저자의 경험이나 일부 도서를 바탕으로 전 세계 남성으로까지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태초로부터 이질적인 성격의 두 집단인 남성과 여성이 같은 사회에서 상호 신뢰 및 배려를 기반으로 협력하여 살라는 의무를 부여받았으니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저자는 분명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앎'으로써 더 많이 이해하고 협력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로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 할지라도 이성의 한계는 감정의 굴레에 쉽게 굴복되고 만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남자든 여자든) 겪으면서 체득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죽을 때까지 지겹게 싸우고 지지고 볶아도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서로에 대하여 증오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남녀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처음부터 남녀는 필요한 부분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불편한 것들을 투사해왔으므로, 그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 보인다.  개인들이 사적인 관계에서 잘 지내는 길에는 명백히 검증된 방법이 있다.  그 방식을 더 큰 단위로 확장시켜 적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순진한 환상을 꽃피워본다."    (p.326~p.32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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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우연성에 기인한 한 사건(우연의 발현이자 삶의 한 조각)은 마치 수많은 우연을 싣고 이제 막 플랫폼에 진입하는 열차의 감속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대개 우연이 우연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의 삶과 그것들을 굳이 결부시키려들지 않지만(혹은 우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우연이 모여 어떤 질량으로 환원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존재를 재삼재사 깨닫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마치 어떤 사건(우연의 결합체)을 구성하기 위한 촉매제처럼 보이는데 그 느낌은 대략 이렇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마치 깊은 수조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수조의 물이 서서히 차오를 때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과 유사하다.  먼저 머리가 잠기고, 어깨, 가슴, 몸통, 무릎, 발, 급기야 발바닥까지 완전히 잠기면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우연을 사건으로 결합하던 스트레스가 그 우연 속에 스며든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발현된 사건이 종결되고 또 다른 우연이 새로운 사건을 준비할 때면 숨겨졌던 스트레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여지없이 우리의 몸을 깊은 무력감 속으로 끌고간다.  밀란 쿤데라는 무력증 뒤에 오는 죽음에의 유혹을 현기증이라 했다.  동일한 높이에서의 행진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려는 욕구 중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일까?  스트레스는 상승의 욕구보다는 추락의 욕구를 증가시킨다.

 

간혹 심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배하기도 한다.  깊은 무기력증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세포 곳곳에 스며들어 육체적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스트레스의 결박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고 했던 밀란 쿤데라의 말은 그 결말이 어떠하냐의 기준에서 했던 말은 아닌 듯하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또는 비극적 결말이든 그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바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말, 혹은 사건을 향해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결합할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촉매제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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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는 당뇨 합병증으로 몇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던 나는 그마저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구는 괴사가 진행되는 한 쪽 발의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일정이 다음주로 정해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더럭 겁이 났던 것입니다.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에 별 문제가 없는 나로서는 아픈 친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또는 의례적인 요식행위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입니다.  검게 변한 발가락에서는 살 썩는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병실 한쪽에서는 방학을 맞은 친구의 아들이 보조침대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눈동자는 세상 어느 것에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세상의 종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병실의 풍경이 그 전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문명은 육체를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겠구나'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 문명은 주로 육체의 편리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와 각종 전자제품 등은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화공약품 덩어리로 변질된 각종 식재료는 또 어떻습니까?

 

인간 육체의 파괴는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구의 발달은 이제 그 정점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탐욕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각종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주 쉽게 잠식당하도록 고안된 것이지요.  육체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과거의 문명은 그나마 의학의 발달과 아직은 건재한 영혼으로 인해 생명마저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파괴는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문명의 발전은 파괴와 무엇에서 다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발전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육체를, 미래에는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문명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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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결코 한 귀로 듣고 흘리질 못하겠군요. 연초에 어떤 신문을 보니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더라구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별이 50년도 못 버틴다구요.

꼼쥐 2014-01-12 20:47   좋아요 0 | URL
저도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일은 비교적 오래 걸렸지만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과 그로 인한 지구 전체의 파괴는 가속화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끔찍한 일이지만 말이죠.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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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골똘히 생각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키워드는 뭘까?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마땅한 단어는 종래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책일수록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해도 결국에는 하나의 주제로 집결되며, 하나의 흐름으로 쉽게 정의될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는다.  인생을 단 한 마디의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그런 책이었다.  각기 다른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면서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여덟 개의 키워드로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꼽고 있다.  제시한 단어들을 제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나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물론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불꽃처럼 확연해지는 하나의 깨달음은 수백, 수천의 이해와 지식의 결합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내 삶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의 총합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의 어지러운 시선을 갈무리하여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나의 삶을 존중하고, 사물을 대할 때에도 본질을 꿰뚫어 바르게 볼 것이며, 소통에 있어서도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고, 현재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에 현혹되어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원망과 회한으로 평생을 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얼핏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주체는 오직 자신뿐,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결국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배려요, 인생에 대한 지극한 예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헤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이건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p.237)

 

나는 매일 아침 산을 오른다.  여러 번의 이사로 내가 오르는 산은 그때그때 달라졌지만 산을 오를 때의 마음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도 나는 산을 오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한다.  나무들에게, 바람에게, 먼저 간 영혼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잘 살아야 한다.  누구나 그래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한숨 소리로 넘쳐난다.  나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각자의 마음은 그 각각의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건만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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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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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파트 공터에서는 키 작은 꼬마 아이가 얼음 조각을 차며 놀고 있다.  신선한 풍경이다.  아이는 그 짧은 다리로 잘 보이지도 않는 얼음 조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걷어차고는 간혹 균형을 잃고 풀썩 넘어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몇 센티쯤 옮겨간 얼음 조각을 보며 깔깔대며 웃는다.  아이는 마치 얼음 조각을 옮기는 것이 제게 맡겨진 커다란 소임인 양 이내 일어나 또다시 집중한다.  이번에는 아이의 발이 허공을 가른다.  두꺼운 코트때문인지 이번에도 풀썩 주저앉았다.  헛발질이 무안했는지 아이는 울지도 않고 일어난다.  주차되었던 차 한 대가 그곁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이에게서 조심성이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투다.  아이에게는 지금 얼음 조각이 세상의 전부다.

 

그렇게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았다.  나이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열정만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잃어간다.  나는 한동안 이름도 모르는 동네 꼬마를 지켜보며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세 돌 된 아들과 함께 터키를 여행하고자 했던 작가의 결단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많은 생각들이 오갔으리라.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로 나는 아이에게도 혼자 걷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무척 노력했다.  어떤 엄마들에게는 가베나 오르다 같은 것이 중요한 교육적 선택이 되는 시기에, 나는 아이를 부단히 데리고 다니며 걷게 했다.  열이 오를 때에도 졸음이 쏟아질 때에도 아이는 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제 힘으로 걸었다."    (p.126)

 

여행에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마는 여행의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은 내가 원했던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여행의 동반자가 짐보다 더한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고, 더없이 믿음직한 친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 경험이 전무한 여행초보자라고 할지라도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꼬마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의 시각과 보조에 맞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히려 말없는 짐짝만도 못한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사람이 대부분일 이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용감(?)하게도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행을 감행했다.

 

"처음에 나는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에게 가방을 들게 하고,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의 첫 걸음마, 첫 번째 열감기, 처음 내지른 일성, 이 모든 것들은 매일매일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성실히 축조된 밑계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내가 끌고 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린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이 아이의 인생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p.170)

 

그렇게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빈이는 올해 중학생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무려 25개국에 발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아장아장 걷다가도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행렬에 자신의 온 시선이 빼앗기곤 하던 아이는 이제 자란 키만큼이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인 오소희 작가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의 중빈이를 그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란 아이의 시선으로 즐기지 않으면 고통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가 아이의 보조에 맞출 자신만 있다면 아이는 여행에 있어 최상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초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어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다.  나는 터키 여행을 통해 아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보았다.  샴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시기를 마감하고, 둘 사이의 적정한 간격을 보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더 잘 보였다.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고 싶은 것만이 분명해졌다.  나는 더 떠돌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p.301)

 

여행기는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경계가 뚜렷하다.  사진과 경로를 곁들여 단순히 여행지의 소개에 그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과 작은 깨달음을 위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를 즐겨 읽는다.  그렇다고 여행기를 그닥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들 녀석과 단 둘이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아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바빴고, 나는 언제나 피곤했다.  '언젠가'하고 게획했던 일들이 이제는 '다시는'이라는 메아리로서 존재할 뿐이다.  아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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