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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아팠던 사람들은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p.15)'는 문장에 힘을 얻었던 나는 그 문장으로 인해 정세랑의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는 작가.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행을 피하며 살아왔다는 작가가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게 된 사연부터 말하기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400쪽에 가까운 분량도 분량이지만 무려 9년에 걸쳐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완성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금쯤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독일의 아헨, 일본 오사카, 타이완 타이베이, 영국 런던까지 5곳을 여행하며 작가가 바라본 지구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책의 제목처럼 꽤나 흥미로웠던 게 사실이다.
"멀리, 뉴욕에서 반갑게 만난 우리는 같이 가고 싶은 곳은 같이 가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따로 다녔다. 신나게 메트로폴리탄과 자연사 박물관을 함께 갔고, S가 양키스 스타디움을 가는 날엔 내가 첼시의 갤러리를 가는 식이었다. 느슨한 동행이 있어 한층 즐거웠다. 우정은 차갑고 기분 좋은 아이스 와인의 느낌으로 지속되고 있다." (p.66)
우리가 아는 여행기라 함은 사실 지명이나 유래, 유명 음식점이나 관광지, 유물이나 박물관 등을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이끌리고, 좀 따분하다 싶은 역사적 지식이나 설명을 하염없이 읽게 되고,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나 사진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하며, 여행객의 나른한 감상을 애틋한 감정을 섞어 읽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마치 여행기를 빙자한 정세랑 본인의 자기소개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기소개서라고 하기에는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지만 말이다.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셔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p. 227)
긴 시차를 두고 쓰인 글이어서일까 작가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다. 과거와 미래, 동서 문명, 인간과 환경을 아우르며 이 시대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의미와 생각들을 경쾌한 문체로 담고 있다. 여행을 기피하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늘어놓던 작가가 결국 여행이 주는 장점과 이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책의 첫머리에서 쏟아냈던 여행 기피의 이유들이 괜히 머쓱해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밝고 순수한 색채가 결국 독자의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들고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결국 해가 질 무렵, E씨와 역 앞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주소를 주고받았다. E씨와의 여섯 시간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얻은 빛을 오랫동안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보답을 바라지 않는 친절을 곱씹을수록 나도 E씨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284)
다정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 책은 정세랑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같은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건 꽤나 쑥스러운 일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국에서 마치 독백을 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광경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하며 마주했던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을 빌미로 자신의 안쪽에 축적된 것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낸다.
'제주도를 사랑하면 제주도에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되듯이' 하와이를 사랑하게 된 작가는 '하와이로 은퇴하겠다는 농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가는 곳마다 '자유'를 언급하는 어느 정치인처럼 어쩌면 우리는 "내가 내 돈 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라는 뻔뻔한 태도로 우리가 사는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곳을 제 것인 양 훼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세랑 작가처럼 마음 따뜻하고 무척이나 지구를 사랑하는 여행객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