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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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시민 분향소에 다녀왔다. 스산한 날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나이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에 걸린 검은 띠만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얼굴, 얼굴들. 제단에 국화꽃을 놓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그들 틈에 섞여 짧은 조문을 마쳤던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의문만 가슴 한가득 품은 채 분향소를 벗어났다. 참사 후 달포가 지나는 동안 마치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 유가족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의 이쪽 편에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시민들. 도로 건너편에는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거나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타인의 슬픔을 마치 자신의 슬픔인 양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저들처럼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위로는커녕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분향소에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나도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인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에는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던 작가가 같은 해 봄 추락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되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일들 중 일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일은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잇다. 그러나 허방을 딛던 순간 벼락처럼 덮쳐왔던 공포랄지 불안이랄지, 무언가가 쑥 꺼지는 듯한 상실감이랄지, 아무튼 그 순간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끔찍한 감각은 그로부터 꽤나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나를 휘감았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찾아오는 추락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오는 그 감각 때문에 몸서리쳐야 했다."  (p.193)


책은 사고 이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겼었던 여러 일들을 다룬 1부 '어쨌든 다시 봄', 조카들과 엄마 아빠 등 가족의 이야기를 쓴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 사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 3부 '움직여라, 발가락', 그럼에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실린 4부 '다시 시작할 산책'과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어쩌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기까지 사고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죽음보다 더한 낙담과 고통의 순간들을 일상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독자인 나는 그 고통의 강도를 1/10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 남자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모멸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냈을까. 만약 기억해냈다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를 이토록 두려움과 모멸감에 빠트려놓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병신이라니. 병신 같은 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그런 끔직한 욕지거리를 한 남자는 물론 그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p.276)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언제나 시간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현실에서 살아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는 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롱이나 욕설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동시에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학습된 무언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거나 동지섣달의 한파 속에서 자식을 잃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p.84)


타인에 대한 공감의 폭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 개인이 직접체험을 통하여 취득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서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없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은 한낱 상상 속의 세상이자 그곳에 사는 외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경계심 가득한 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만 양산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는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는 날 황시운의 산문집 제목은 <당신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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