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곁에서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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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느낌이 오래 지속되면 지루하다. 지루하고 따분하여 딴짓을 하게 된다. 그 느낌이 '슬픔'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인간의 감정이란 때로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원숭이를 닮아서 몇 날 며칠이고 진득하니 같은 감정에 머무르는 걸 참아내지 못한다. 한 권의 소설을 읽을 시에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뒤섞이고 오욕칠정이 난무하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실체를 스토리 저변에 깔아 두어야만 한다. 독자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어르고 달래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그 순간까지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셈이다. 소비자의 구매욕을 부추기는 미끼상품처럼 말이다.


신경숙의 연작소설 <작별 곁에서>는 슬픔을 밑바탕에 깐 세 편의 소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슬픔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대화나 묘사 위주의 스토리 전개가 아닌, 편지 형식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선택한 듯하다. 그러나 신경숙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는 이와 같은 형식에서는 완전히 배제되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신경숙이라는 독자적인 소설 형식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표절 작가'라는 주홍글씨는 나도 모르게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에 투영되어 표절 의혹이 불거졌던 2015년 이후 2019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가 소설과 함께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숨죽이며 서울에서 내가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이던 그이는 지금 웨스트체스터 공원묘지에 누워 있네. 나무가 많은 숲속이야. 나무보다 산새가 더 많아서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니 지금은 새소리를 듣고 있겠지. 걱정이 되는군. 그 공원묘지의 나무들은 저 바람에 무사할는지. 그 옆에 내 자리도 마련해 놓았네. 가끔 묘지를 찾아가서 비석에 떨어진 나뭇잎을 손으로 쓸어내며 남편과 함께했던 결혼생활을 생각해 보곤 해."  (p.67 '봉인된 시간' 중에서)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봉인된 시간>은 지금은 무슨 일인지 연락이 되지 않는 화가 '선생'에게 쓰는 편지이다.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군인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 온 지 반년 만에 박 전 대통령 암살사건과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 남편이 암살자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족은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화자를 붙들어주었던 건 모국어로 쓰는 시와 가족이었다. 평소 흠모하던 고국의 화가가 뉴욕으로 와 체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화자는 그가 머물 집을 알아보는 등 일 년간 그와 가깝게 지낸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연락을 시도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태풍 샌디로 뉴욕 전체가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화자는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긴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것은 마치 화자 자신의 회고록인 양, 때로는 가까운 지인에게 하는 넋두리인 양 읽힌다.


"지금 내 마음의 모든 시간은 이렇게 너와 닿아 있어.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의 낯선 시장에서 크루아상을 사거나 포도며 망고를 고르거나 오후의 더위 속에서 땀에 젖은 낮잠 속을 허우적거리는 모든 시간 속에 네가 있다. 끈질기게 너를 생각하는 이 시간들이 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를 바라."  (p.145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중에서)


20대 초반부터 우정을 나눠오던 친구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 그곳에 정착한 이후로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잠깐잠깐 얼굴만 보며 지내던 두 사람. 그들 두 사람 앞에 놓인 시간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치 무한대인 것처럼 생각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이제 독일에 있는 친구는 암투병을 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 있는 '나'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지만 친구는 한사코 '나'를 만나주지 않는데... 두 번째 작품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무심한 시간 속에 놓인 인간 군상의 서글픈 숙명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인 <작별 곁에서>이다. <봉인된 시간>의 화자에게 보내는 답장 형식이지만 편지의 서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의 '나'는 두 번째 작품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별 곁에서>는 앞의 두 작품을 아우르면서 우리가 상실의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임을 제주 4·3의 아픈 흔적을 통해 전한다.


"선생님 남편은 웨스트체스터의 숲속에, 친구는 뮌스터의 굴참나무 숲속에, 내 딸은 여기 강화도의 소나무 숲속에 있군요. 언젠가 딸은 나를 알아보기는 할까요? 이렇게 형편없이 일그러진 제 얼굴을요. 다랑쉬굴 앞에 함께 앉아 있어주던 모르는 남자가 이제 이 벌판을 떠날 모양인지 세워둔 자전거 곁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시디신 눈 속으로 차오릅니다. 이젠 여기 없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기억하다가 곧 저도 광활한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겠지요. 바람과 먼지와 들꽃들이 일렁이는 이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텅 빈 항아리에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게 느껴져 제 얼굴이 붉어집니다."  (p.260 '작별 곁에서' 중에서)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나는 신경숙 작가의 애독자로 자처하며 출간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어왔는데 그닥 두껍지도 않은 한 권의 소설집을 이렇게 힘들게 읽어낸다는 건 나로서도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 등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즐겨 읽어 왔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루함을 느껴 번번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고,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건 이제 나도 신경숙 작가와의 작별을 준비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신경숙 작가의 감각이 떨어졌든가 아니면 소설에 대한 나의 기호가 바뀌었든가 그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회자정리'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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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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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스토리는 단순하다. 우연히 눈에 띈 악당의 무리를 법과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타고난 능력 하나로 시원하게 제압하여 처단한다는 것. 책의 저자인 리 차일드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잭 리처를 앞세워 비슷한 구조의 잭 리처 시리즈를 27편이나 썼으니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유분수지 우려먹어도 너무 우려먹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궁리를 할라치면 나도 모르게 잭 리처 시리즈에 손이 가는 걸 보면 잭 리처 중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잭 리처 컬렉션의 스물네 번째 이야기 <출입통제구역>을 읽고 말았으니 말이다. 책에서는 역시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가 195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며 미국 전역을 도는 여행 중에 있다.


군에서 익힌 특출한 상황 감지 능력, 이를테면 주인공의 예리한 촉은 버스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하였다. 같은 버스의 승객이었던 일흔 살 노인의 주머니 속 두툼한 돈봉투를 노리는 한 애송이의 비열한 눈빛이 그에게 감지되었으니 말이다. 잭 리처는 그들을 따라 인구 50만의 소도시에 내리게 된다. 애송이는 노인을 뒤따라가 공격했지만 뒤쫓아온 리처에 의해 묵사발이 된 채 도망친다. 다리를 다친 노인을 부축하여 그의 행선지까지 동행하게 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갈등한다.


"너무 늦게 왔다. 염소수염이 돈을 가진 남자를 거칠게 떠밀었다. 노인은 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 무릎, 머리를 앞으로 한 채 쓰러졌다. 염소수염은 그 위를 덮치더니 아직 움직이는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지듯 능숙하게 손을 집어넣어 봉투를 꺼냈다. 그때 리처가 도착했다. 195센티미터에 110킬로그램의 움직이는 덩어리가, 쭈그린 자세에서 막 몸을 일으키던 호리호리한 염소수염에게 돌진했다. 리처가 어깨를 비틀어 내리치며 염소수염에게 부딪히자 그는 자동차 충돌 테스트에 쓰는 더미처럼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곤두박질쳐 절반은 인도에, 절반은 배수로에 몸이 걸친 상태로 낙하했다.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p.20~p.21)


정의감에 불타는 우리의 주인공은 노인의 딱한 사정과 이를 등쳐먹는 사채업자들의 만행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이 지역은 도시를 관통하는 중앙로를 경계로 우크라니아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동서로 구역을 나눠 지배하면서 사채업을 비롯하여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는 법의 사각지대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지역의 경찰이나 소방, 유력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나 불법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막아 오면서 포르노 영상 유포와 같은 불법 행위를 공공연하게 저질렀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딸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사채를 비롯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노인 부부의 딱한 처지를 돕기 위해 시작된 리처의 작은 응징이 두 갱단을 자극하여 마침내 그들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봐, 일어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놈들은 곧 일어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처가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지. 인센티브도 붙어 있다. 나를 태우고 동쪽으로 차를 모는 거다. 가는 동안 너희에게 질문을 하겠다. 거짓말하면 도착해서 알바니아인들에게 넘기겠다.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목적지에서 내려 걸어가고 너희는 차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그게 인센티브다.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 알겠나?”"
  (p.174)


물론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해서 주구장창 총격전과 몸싸움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리처와 애비의 달달한 로맨스도 등장한다. 그리고 리처와 의기투합한 전직 해군과 해병대 출신 사나이들이 펼치는 대활약도 눈에 띈다. 물론 애비는 정의감에 불타는 리처의 남자다움에 매력을 느끼지만 리처가 자신과 동행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에는 거절을 표한다. 역마살이 낀 리처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어 한 곳에 정착한다는 건 애비 스스로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컬렉션은 사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한 인물과 그를 상대하는 다양한 부류의 악당들을 등장시켜 마냥 느려터진 법적 구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자 잭 리처에 의한 시원한 자력구제를 선보임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대리만족 소설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 시기에는 잘 읽지 않았던 잭 리처 컬렉션을 현 정부 들어 자주 읽게 되는 건 아마도 집권자 스스로 입으로만 나불대는 '공정과 상식'이 현실에서는 완전히 무너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를 응징할 잭 리처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오늘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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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알고 먹는 거니? - 그림으로 보는 우리 집 약국
최서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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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어디가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가 잦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모님도, 아내도 약사 면허를 갖고 있었던 탓에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거나 필요한 약을 약국에서 구매를 하게 될 때, 나는 언제나 아내의 컨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 역시 약국 제출용과 환자 보관용 처방전을 함께 발급받아 환자 보관용 처방전은 언제나 아내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는 언제나 부모님께 척척 가져다주는 착한 학생처럼 말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매가 가능한 일반 의약품 역시 아내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살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그림 그리는 약사 최서연의 저서 <약, 알고 먹는 거니?>를 읽으면서 나는 약과 관련된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 한동안 상념에 젖곤 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장 '감기에 걸렸어요', 2장 '상처가 났어요', 3장 '속이 불편해요', 4장 '피부에 뭐가 나요', 5장 '여성들만 아는', 6장 '이럴 땐, 어떤 약을 써야 하나요?'. 각 장의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직면하게 되는 약의 오남용과 약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약사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약이라는 전문적인 지식을 만화 형식의 친근한 도구에 접목함으로써 접근성을 높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약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지만 일상에서 약 사용법을 제대로 알고 대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감기 몸살이 심하게 걸렸던 나는 가까운 병원에 들러 처방을 받았고,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기 전에 늘 하던 대로 아내에게 처방전을 보여주었더니 대뜸 다른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다시 받으라는 거였다. 나는 아픈 몸으로 운전을 해서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감기 몸살에 대한 처방전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아내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했다. 나는 결국 다른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았고 아내의 허락 하에 약국에서 처방전에 적힌 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처음에 받았던 처방전의 약은 스테로이드 성분이 과하게 포함된 약이라며 다음에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갈 일이 있어도 그 병원은 절대 가지 말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에게도 아내의 관심은 각별했다. 어렸을 때 아토피 증상이 조금 있었던 아들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날이면 여지없이 밤에 제 몸을 박박 긁어대곤 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왔던 아들은 다른 날부다 심하게 제 몸을 긁어댔고, 그날 마침 아들의 곁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아내를 깨워 아들이 바르던 연고를 어디에 뒀는지 물었다. 아들의 침대보에는 아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방울 몇 점이 묻어 있었고, 이를 보고 놀란 나는 연고를 듬뿍 짜서 발라주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들의 상처 부위에 아주 조금만 발라주고는 내 손에 있던 연고를 낚아채고는 안방으로 사라졌다.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연고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에 아주 조금만 발라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렇지 않으면 점점 내성이 생겨서 더욱 독한 연고를 바르게 될 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아내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자란 아들은 이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활기찬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들과 나의 개인 약사였던 아내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나와 아들이 약에 대한 조언이 필요할 때면 이제 늙으신 장모님께 여쭙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곤 한다. 약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약과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긁어모으는 이유도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과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사용하는 약에 대해서 언제든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고 강조 또 강조를 잊지 않았던 아내의 목소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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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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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베란다 창문을 통과한 바람이 현관문을 가볍게 흔들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야삼경에 바람도 내내 심심했던가. 잠귀가 밝은 나는 바람이 만든 인기척에 놀라 잠이 깨었다. 달아난 잠을 붙잡으려 불도 켜지 않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부림을 치다가 종국에는 불을 켜고 앉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잡았다. 바람에 실려온 성긴 소음과 습습한 우울을 배경 삼아 펼치는 한밤중의 독서 풍경이 그닥 유쾌하거나 생기발랄할 리 없지만 나름의 운치를 찾고자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을 낮게 틀고서 방안 가득 퍼지는 바람과 클래식 선율의 하모니를 한동안 듣고 있었다.


내가 느꼈던 분위기와 이 글을 읽게 될 어느 블로거의 분위기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읽었던 스티븐 킹의 소설집 제목에 비하면 그런 차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4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제목은 <피가 흐르는 곳에>. 남들 다 자는 한밤중에 읽는 책 치고는 제목이 사뭇 뜨악하다 싶겠지만 소설은 제목처럼 그렇게 과격하거나 섬뜩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사업은 미식축구와 같다, 크레이그. 상대편을 쓰러뜨리고 골라인까지 가야 한다면 제대로 쓰러뜨려야 해. 그렇게 안 할 거면 애초에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서지 말아야지.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내 경기는 끝났지. 계속 관여하고 있긴 하다만) 유니폼을 벗고 집으로 가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다. 가게는 하나뿐이고 학교는 조만간 문을 닫게 생긴, 미국의 이 평범한 시골구석이."  (p.54)


인구 600명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9살 소년, 크레이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 <해리건 씨의 전화기>, 한 남자의 인생을 3막의 형식으로 담아낸 <척의 일생>, 전작 <아웃사이더>에도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가 무고한 희생의 현장에 등장하는 어둠의 존재를 추적한다는 내용의 소설 <피가 흐르는 곳에>,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간절한 염원을 담보로 은밀한 거래로 유혹하는 '쥐'의 이야기를 다룬 <쥐> 등 4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천부적인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거야. 나는 훌륭하고 훌륭할 자격이 있고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p.220 '척의 일생' 중에서)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해리건 씨의 전화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 성공한 사업가인 해리건 씨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평범하면서도 어디에나 있음 직한 이야기인 양 작가는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당시 9살이었던 크레이그는 학교가 파하는 오후 시간에 해리건 씨의 집에 들러 그가 지정한 책을 읽어주고, 그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주일마다 일정액의 용돈을 받는다. 새로운 기기에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던 해리건 씨에게 크레이그는 어느 날 처음으로 아이폰이라는 신물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작은 기계로 인해 세상이 바뀔 것을 감지한 해리건 씨는 스마트폰이라는 손바닥 속 세상에 점차 빠져들게 되고, 두 사람은 책과 스마트폰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줄곧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해리건 씨가 어느 날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한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의 아이폰을 그와 함께 묻어주는데...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쥐>는 현실과 판타지를 교묘하게 결합한 스티븐 킹식 호러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기이하게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교열을 본 '비터 러버' 파일을 열고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부는 현실 속에서 일부는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졌고,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었다.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는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할 테고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칠 테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테고 기쁜 마음으로 단권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평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쥐였다."  (p.601 '쥐' 중에서)


파랗게 개었던 하늘엔 다시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고, 바람결에는 습습한 우울이 한밤중에 졸린 눈으로 서둘러 버무린 김치 양념처럼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타고난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는다는 것, 현실에서 벗어난 외나무다리를 건너 현실과 판타지의 좁은 경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스티븐 킹의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읽고 또 읽었다. 비가 오려나, 미뤄두었던 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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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 - 일, 생활, 연애, 인간관계, 돈 고민에 대한 마음 치료제
정신과 의사 TOMY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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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낙천적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일지라도 고민 한두 가지는 늘 달고 살게 마련이다.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게 의식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속을 태움'이라는 고민의 사전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고민이 생기는 근본적 원인은 대개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근본적 욕심 혹은 그에 상응하는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더 잘 살겠다는 의지 또는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고민이 없는 완전한 평화, 순수의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의 속성상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욕구를 제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포기한 완전한 평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하니 삶을 유지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민과 함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자연적으로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고, 또 스스로 해결하거나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이와 같은 순환이 끝도 없이 벌어지는 게 우리네 삶이라면 너무 지겹고 답답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010 삶

사는 것은 등산과 다릅니다. 거기에 산이 있어도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삶은 등산과는 다른 것이에요. 등산에서는 안 해도 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삶에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꽃을 따거나, 나비를 쫓거나, 누워서 쉬거나, 김밥을 먹거나 할 수 있어요. 삶은 즐겁게 살아도 된다는 거죠."  (p.23)


<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과의 상담 과정에서 그가 했던 조언을 차곡차곡 쌓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내린 221개의 상황별 처방전인 셈인데 짧고 간결하며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느 철학자의 조언처럼 '인생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식의 현학적이거나 듣는 이를 주눅 들게 하는 명령조의 문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자신의 상황에 어울리는 소제목을 찾아 그에 해당하는 몇 문장의 짧은 조언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리는 경험을 한두 번쯤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126 마일리지

신뢰를 쌓는 건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일리지' 같은 거예요. 관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믿음 마일리지'를 보세요. '믿음 마일리지'를 쌓으세요."  (p.150)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을 정신과 의사이자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하며 동성애자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를 더 신뢰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 전체를 부정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저자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의 3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 저를 지켜주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몇 년 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동성애자로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던 파트너의 죽음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괴로운 때 제가 메모해 둔 말이 저를 지탱해줬습니다. 또 그 경험 속에서 많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런 말들을 나누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어떤 고민이든 공통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거든요."  (p.10~p.11 '시작하며' 중에서)


저자의 221번째 마지막 조언 제목은 '현실'이다. 그에 대한 조언을 간략히 옮겨 보면 이렇다.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쪽으로는 아무것도 못 가져가는 까닭에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뤘는지 아닌지는 환상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라는 꿈을 즐겁게 꾸는 것이다'라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로 헐뜯고 경쟁하며 곧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군다.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게 헛된 짓이었음을 한숨을 내쉬며 고백하게 되지만 말이다. 커다란 바위가 풍화되는 것처럼 우리의 욕심도 시간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삶의 과정인 듯싶다. 우리가 하는 고민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부산물 혹은 작은 파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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