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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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기만 하던 삶의 시간들이 썰물처럼 쓸려 가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지요.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말입니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의 리뷰를 쓰기에 앞서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어쩌면 나의 경험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인의 암 발병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한 후 단양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단행한 지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한 후 부부만의 호젓한 생활을 이어오던 지인 A 씨에게 있어 부인의 암 발병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던 듯합니다. 서둘러 살던 집을 내놓고,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단양의 외딴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지인 A 씨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찾아뵙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내가 지인 A 씨를 만나기 위해 단양으로 향했던 것은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하던 늦은 여름이었습니다. A 씨가 이사한 집은 마을로부터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중의 외딴집이었습니다. 단출한 가구와 필수 가재도구뿐인 집안에 복잡하게 놓인 병원 장비는 방문객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했습니다. 병원으로부터 암 4기 판정을 받았던 A 씨의 부인은 침대에 누워 나를 맞았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묻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남편분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사람은 따뜻한 체온만으로도 위로를 느낄 때가 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역시 그런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남녀 두 노인이 서로의 체온으로 삶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을 위로하고, 젊은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이어짐만으로도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갖게 되는 듯한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p.102)


소설의 구성과 스토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켄트 하루프가 자신의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즐겨 사용하는 콜로라도 주의 '홀트'에 70대의 독신 남녀인 루이스와 애디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디가 루이스의 집을 찾아가 본인의 속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지 않겠냐는 게 그녀의 제안이었습니다. 오해받기 십상인 제안이었지만 루이스는 애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남남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해가 지면 루이스는 애디의 집으로 가 '침대에 친구처럼 나란히 누워'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려줍니다. 애디의 어린 딸의 죽음, 루이스가 근무했던 학교의 여선생과의 불륜으로 가정이 파탄날 뻔했던 사건 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이렇게 좋을 자격이 내게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그가 말했다."  (p.109)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고 결국 덴버에 사는 애디의 아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정불화를 겪던 애디의 아들 진은 자신의 아들이자 애디의 손자인 여섯 살 된 제이미를 애디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은 제이미를 함께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진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요, 아직은 아니죠. 애디가 말했다.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p.141)


이전의 관계를 정리한 후 어느 날 혼자 외출에 나섰던 애디가 길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들 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덴버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킵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잇던 루이스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덴버의 병원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애디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냅니다. 갑자기 병문안을 온 루이스와 이에 당황한 애디는...


"오늘 밤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는 칠흑이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p.194)


결혼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배우자와 한날한시에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기적에 가까우리만치 어렵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우리들 각자에게 지워진 셈이지요. 홀로 남아 살아야 할 날들이 길고 짧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깊은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체온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칠흑과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딛고 조금이나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곁에 있는 누군가의 체온과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시선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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