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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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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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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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히야마 하쿠의 수필집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 있다.  특별히 잘난 체를 하려고 들먹이는 것은 아니고 이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그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책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달라도 아주 많이.  그러나 두 작가가 모두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과 고히야마 하쿠가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썼을 때의 나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현재 나이와 비슷했다(무라카미 하루키의 현재 나이는 63세이다.)는 점은 두 권의 책을 하나의 오브제로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두 작가의 생각이나 문체, 글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한 작가가 두 권의 책을 쓴 것처럼 서로 닮아 있다.  나도 모르게 고히야마 하쿠를 떠올렸던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작가들이 수필을 대하는 태도는 독특하다.  그것을 연륜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국민성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건조하다.  마치 어릴 적 비 온 날 산에 올라 불쏘시개를 구하기 위해 젖은 낙엽을 들추고 그 밑에 감추어진 마른 낙엽을 긁어 모을 때 맡았던 달콤한 숲의 향기와도 비슷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묽은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가 내게 무슨 얘긴가 하러 오기를 기다린다. 가끔은 이런 일도 괜찮다."에서처럼 그저 툭 던지고 잡다하게 설명하거나 어때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글을 쓸 뿐, 판단이나 상황은 오직 독자의 사색과 상상에 맡긴다는 투다.  독자는 침묵과 같은 여백에 일순 당황한다.  그러나 짧은 침묵 이후에 찾아오는 나른한 자유의 품은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나라 작가의 글은 사뭇 다르다.  젊은 작가는 대체로 현란한 수사로 정확한 의미를 가리기 일쑤이고 웬만큼 나이가 든 작가는 깊은 사색의 결과물을 표현할 때 그 날카로움이 독자의 눈을 찌른다.  그것을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작가는 한 순간도 독자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가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죽을 힘을 다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한다.  그만큼 치열하다.  때로는 끈적끈적한 감정의 스프가 책을 읽는 나의 손바닥에 묻어날 것만 같다.  여유란 없다.  최소한 내가 책을 손에서 내려 놓기 전까지는.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도 숨가쁘게 읽는다.

 

이런 비교는 나의 독서량이 많지 않으니 단순히 주관적이고 편협된 것이지만 일본작가의 소설과는 달리 수필에서는 대체로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나라 작가의 글쓰는 태도나 성향에 관한 것이지 작가의 역량을 비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조금 실망스럽게 읽었던 나는 이 책도 그러면 어쩌나?하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히도 위에서 밝힌 일본 수필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첫머리에>  

 

나는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경망스럽고 변덕스러운 독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니 언제 아런 생각이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어깨에 힘 빼고 편안하게.  어쩌면 작가의 이러한 태도 - 욕심을 버리고 진솔하게 쓰려는 자세 - 가 수필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주눅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뜩이나 쫄 일 많은데.

 

"그래서 귀찮은 것은 차치하고 어쨌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기, 그것만 명심하고 있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입장에서 보면 독자를 설정하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한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써야 해'하는 테두리가 없으니, 자유롭게 손발을 뻗을 수 있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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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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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숙명적으로 피상적인 현실과 삶의 뒤켠에 존재하는 진리의 중간쯤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진리탐구에 깊숙이 개입해서도 안 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여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컨대 소설가가 일반 회사원처럼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일정한 룰을 따른다면 대다수의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게 없게 되고 그런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보편적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더 이상 그의(또는 그녀의) 글은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어쨌든 숲 속에서는 숲을 볼 수 없으므로.  나는 가급적 전업작가가 아닌, 소설가를 마치 부업처럼 생각하는 작가의 글을 읽지 않으려 한다.  가급적이 아니라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진리탐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리탐구는 목숨을 걸 만큼 매력적인 일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은 될 지언정 진리는 보편적 인간에게 쾌락이나 친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주변에 존재한다면 그는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극단적 두려움 또는 공포를 과감히 극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가 굳이 보편적 인간의 공포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돈에 초연하거나 득도한 소설가가 아니고서는.

 

가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나는 이것 또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을 흉내낸 자전적 에세이 또는 보편성이 결여된 미숙한 소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도자가 아니고서는 '나'란 존재는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너희들'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이야기 틀에 담아내는 사람이므로 관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이야기는 소설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좋은 소설이 될 리도 없다.

 

위에서 언급한 소설가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소설가에 의해 씌어진 수필이나 산문집은 그닥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설령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큰 기대를 품고 어느 소설가의 산문집이나 수필을 읽는다면 열이면 열 만족보다는 실망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렇고 그런 신변잡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겠거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면 '그래도 생각보다는 좋았다.'는 평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가수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니 소설가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역으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이나 무릎을 칠만한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엮어낸 소설가라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닌 수필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읽었다.  책의 내용은 나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달리기광'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니 달리기에 관한 내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달리기 이외에 작가의 유년시절, 빵집 아들로서의 명절 대목, 부모님의 숨말하기, 서울 삼청동에 살았던 시절의 에피소드 등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달리기와 관련된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제는 어엿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치고는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리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기하자면 김연수는 소설가이지 수필가가 아니다.

 

"살아 본 바에 따르면 삶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을 해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P.295)

 

나는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와 뜻하는 바를 공감하며 읽었지만 다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작가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등산이 마치 막걸리나 마시기 위한 핑곗거리 또는 등산을 가장한 여자 후리기로 묘사한 대목에서는 매일 아침 산을 오르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여자를 꼬시는 능력도  없지만 산은 누구보다 좋아한다.  반면에 작가와 내가 생각이 일치했던 것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콤플렉스"라는 대목이었다.  살다 보면 사람 좋다는 말이 칭찬만은 아님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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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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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리뷰를 써야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드는 책이 있다.  그것도 책에서 느꼈던 감동이 일상에 희석되지 않도록 서둘러 써야겠다고 말이다. 그런 느낌은 책을 공짜로 제공받았으므로 정해진 기한내에 써야 하는 의무감과는 다른 것이다.  채 쓰기도 전에 책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스스로를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빌뱅이 언덕>은 그런 책이었다.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라고 하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칠 사람들이 대다수일 듯싶다.  그만큼 선생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 선생의 책 한두 권쯤 갖고 있지 않은 집도 드물 것이다.  우리집에도 아들녀석이 어릴 적에 읽었던 선생의 작품이 족히 서너 권은 넘을 듯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선생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잘 나가는 동화작가려니 생각했었다.  그게 다였다.

 

빈약한 정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선생의 삶을 조금 알게 되었다.

선생의 삶을 몇 마디 단어로 집약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꼈던 선생의 삶은 가난과 질병, 지구 환경에 대한 염려와 조국 통일의 염원, 그리고 유년기에 만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물론 선생으로부터 동화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죽음도 그렇지만 가난이나 질병도 매한가지로 보편적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닝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홧거리로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가난은 실존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도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가난은 질긴 목숨을 원망해야 하는 천형이자 오직 생명으로만 집중되는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일본에서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나 경북 안동 조탑리 빌뱅이 언덕 토담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독한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살았던 선생의 실존에 목이 메었다.

 

자신의 병이 동생의 혼인에 방해될까봐 행려병자로 떠돌던 한 때,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던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소문과 추측으로만 헤아릴 수 있었던 둘째 형님에 대한 그리움 등 이 책의 1부에 실린 자전적 산문을 읽노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선생이 겪었던 두 번의 전쟁을 전후세대인 나는 알 길이 없다.  절대적 궁핍을 벗어나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나의 가난은 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리도록 아팠다.

 

어릴 적 신었던 짝짝이 장화 때문에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로 장화만 보면 사고 싶었다던, 이름값만으로도 춥고 배고프지 않아도 될 때도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던 선생에게 당신의 하느님은 언제나 깨끗하고 넓은 예배당에서 대접받는 하느님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머무는 하느님이었다.  당산나무와 조화롭게 사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선생에게 통일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통합이 아니다.  비록 나라는 작고 가난해도 평화롭게 한마음이 되어 사이좋게 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한마음으로 뭉쳐 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 볼 수 있는 나라, 나라가 갈라졌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겨레가 고통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조국을 꿈꾸었다.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졌듯 문화생활이라는 도시적 삶은 자연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인간의 생명마저 파괴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부드러워지는 삶이 등나무 덩굴처럼 억세고 복잡하게 변한 까닭은 분명 우리의 욕심이 사납게 자란 탓일 게다.  내가 바라는 삶은, 내가 희망하는 삶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취하여 내 삶을 윤택하게 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짚어 본다.  선생이 가신 지 이제 5년,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꽃은 피고 새가 지저귈 것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의 무기는 괭이와 호미와 낫이지 장갑차나 미사일, 핵폭탄이 절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어질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우리였습니다.  너무 순해서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자기 주인만은 알아볼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김 목사님, 제가 거듭 부탁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리석고 순하기만 하면서도 제 주인의 모습을 똑똑히 구분해서 따라갈 줄 아는 똥개는 될지라도 들쥐 같은 백성은 절대 되지 말라고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P.306)

 

세상의 가난을 모두 모아 인구수 대로 나눈다 한들 그것을 보편적 가난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가난이나 아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개별적 아픔과 실존을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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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 개정판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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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쓴 글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나의 성격과 똑 닮았거나 내가 알고 있는 지인의 성격과 흡사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데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는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을 가르친 기간이 긴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한다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교육자가 되려면 적어도 얼치기 심리학자의 수준에는 이르러야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처음 만나는 아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로부터 몇 마디 말만 들어보면 그 학생의 성격이며, 공부 성향이며, 가정환경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데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내가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이들로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자리 펴시죠?"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자라온 배경이나 성격, 대인관계나 취미 등을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약간의 직업병(?)처럼 말이다.  이 책 <랄랄라 하우스>를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었다.  작가의 성격이 글에 잘 녹아 있을 때, 독자는 내용에 상관없이 편안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려면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과 유사한 면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랄랄라 하우스는> 나꼼수의 김어준 스타일로 "실패!"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랄랄라 하우스>의 내용이 재미없다거나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로서 내가 느꼈던 것은 작품이 작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는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범생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규칙도 잘 지키고, 책임감도 있고, 농담도 잘 하지 않고, 단상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늘 겸손하거나 수줍어 하고, 옷차림이나 정리정돈이 항상 흐트러짐이 없고, 윗사람으로부터의 지적이나 나무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렇다고 성적도 우수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이런 부류의 학생들이 성적으로 최상위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지만 뛰어나지도 않은, 변동이 거의 없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내가 추측한 작가의 성격이 맞는다면 이 책은 태생적으로 글과 독자의 불협화음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있다.  성격도 강직하고 고지식하며, 약간은 근엄하기까지 한 표정이 일상적인데 가끔 농담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썰렁하다.  평소에 잘 웃고 농담도 잘 하는 사람이 했더라면 무척 재미있을 내용인데도 목사님을 통해 전달되기만 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를 어렵게 만드는 썰렁한 농담이 되고 만다.

 

유쾌한 철학자로 알려진 전시륜이나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을 때면 엄숙한 자리에서도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킥킥대는 웃음이 터져나와 입을 막게 된다.  그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개그코드가 온 몸 구석구석에 녹아 있는 듯하다.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는 독자는 별 내용도 아닌 대목에서도 키득대곤 한다.  낙천적인 성격의 작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우울하고 시니컬한 성격의 작가도 그에 딱 맞는 작품을 쓰는 경우가 있다.

 

김영하 작가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 작품을 꼽으로면 나는 주저없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떠올릴 것이다.  과거를 말하면서도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다소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은 모범생으로 자란 작가가 성장기에 느꼈던 반항의식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동은 언제나 일직선의 규칙을 따라가지만 그 규칙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이율배반적 느낌은 성인에 이르러 반항적인 모습으로,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모범생이 일탈을 꿈꾸는 것과 끝없이 과거를 말하면서도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것은 적당히 닮아 있다.

 

작가가 운영하는 인터넷 미니홈피에 올렷던 글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 책에는 언론매체의 기고문이나 여행지의 사진, 작가가 기르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자신과 아내의 소소한 일상,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일화 등 다양한 내용의 유쾌한 글들이 실려 있다.  사실 이러한 산문집이 아니라면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작품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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