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두 가지 대비되는 원색이 혼합되어 원래의 색을 구분할 수 없는 파스텔톤의 색깔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예컨대 허공을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새도 없이 불시착한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식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이 바로 그것이다. 느낌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우리는 두 감정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비록 여러 감정이 혼재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충격에 버금가는 두 감정이 느닷없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 감정의 출처를 오래도록 의식하곤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 보름쯤 지나는 동안 나는 두 감정의 경계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오늘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아, 돌아가셨지' 하고는 이내 무기력한 현실로 되돌아오기를 수차례. 또는 화장을 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는 과정을 또렷이 지켜봤음에도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이었던 듯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가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시도 때도 없이 선명하게 각인되곤 하였다.

 

근 이십여년을 병원에서 지냈던 아버지로 인해 가족 모두의 뇌리에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나 보았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토록 혼란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비기 오락가락 했던 오늘, 하릴없이 창밖을 보며 우울한 상념에 젖었었다. 궂은 날 찾아오는 오래된 지병처럼 가슴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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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9-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혈연이란 그래서 진하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음대로 이을수도 끊을수도 없는.
여긴 이제 비가 그쳤어요. 내일은 말간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꼼쥐 2014-09-05 19:47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시작된 추석연휴 탓인지 거리에는 차가 넘쳐나네요. 하늘은 맑고 연휴 내내 비도 오지 않는다 하니 hnine 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 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다. 제목처럼 꽤나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나는 아마도 대학시절쯤에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별 감흥도 없이 이 책을 읽었다. '아,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가벼이 읽었었고, 그때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시기였으니만큼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가 느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공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며칠 전 그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오르내리는 한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의 행위에 동조하는, 김영오 씨의 단식과 단식 중단을 조롱하는 많은 글들이 트위터에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참으로 썩은 내가 풍기는 '인간 결격자'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들을 두고 인간성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말하자면 잘못된 인성의 소유자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판단이다. 인성의 결여는 그들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적어도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인간의 실체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의 허위와 기만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 실격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바 요조보다 못한, '인간 실격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결격자'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자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인간의 자격 조건이 결여된 '인간 결격자'라는 말이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인 스스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 양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어울릴지 모른다. 세상을 모르는, 인간에 대해 무지한, 도덕심이나 배려심은 눈곱만치도 없는 하룻강아지는 자신의 방종조차 신념이라고 우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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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외출했을 때의 일이다. 막 은행 주차장에 들어서려는데 때마침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는 차량 한 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차량 두 대가 비껴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출입구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후진을 했다. 그렇게 후진을 하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내 뒤를 가로막았다. 택시 기사는 전혀 비켜줄 마음이 없었던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택시 뒤에 또 다른 차량이 바싹 다가서는 게 아닌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고 만 셈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내 앞의 차량이 후진하는 것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앞 차량의 운전자에게 내가 더 이상 후진을 할 수 없노라는 의사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 차량은 전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동안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고 가운데 끼인 나는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더 가관이었던 것은 앞 차의 조수석에 동승한 나이 지긋한 노인의 행동이었다. 인상을 험악하게 하고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서로 문을 닫고 있어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보아서는 욕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욱하고 치미는 게 있어 그 자리에 차를 정차시키고 나가 따지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앞 차의 운전자가 후진을 했다.

 

주차장의 출입구를 지나서야 차량 두 대가 간신히 비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치밀어오른 분을 삭일 수 없었다. 딴에는 노인을 대접한다는 마음에 주차장 진입을 미루고 정차했을 뿐 아니라 후진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욕을 먹기까지 하다니... 나는 상대방 노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렸다. 물론 듣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 차는 내 옆을 천천히 비껴갔고 나도 무사히(?) 차를 주차시킬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은행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생각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누군가 내 마음을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에 매달린 인형이 조종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추(錘)는 한시도 고요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괜스레 슬프거나, 이유도 없이 들뜨거나, 대상도 없이 분개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기뻐하는 등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한 쪽으로 깊이 기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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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아침.  전날 모질게도 비가 내리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쾌청했다.  벽제로 가는 운구버스에서 누나는 목놓아 울었다.  한이 깊어서였는지,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해서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목울대 바깥으로 터져나오려던 울음을 끝내 토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의 안개를 뚫고 속속 도착한 많은 운구버스와 리무진 차량이 접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은 쓴 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사는 것은 기다림이고, 기다리는 빈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일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제는 죽어서도 제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  6시 40분!  직원이 유리문을 열고 접수를 받는다.  배정받은 번호에 따라 영정을 앞세운 시신이 화로로 운반되는 동안 가족들의 흐느낌이 이어진다.  화장로로 향하는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던지...

 

엘리베인터처럼 단단한 문이 닫히고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주황색 램프만이 서럽게 밝혀져 있었다.  하릴없는 유족들이 좁디 좁은 2층의 가족 대기실에 빼곡히 모여 앉아 화장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모니터만 주시했다.  꽉 막힌 대기실이 답답했던지 사람들은 이따금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갔고, 한동안 밖을 서성이다 들어오곤 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파는 2층 카페는 옹색한 대기실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모니터에 '냉각중'이라는 자막이 뜨면 화장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화장을 마친 시신은 한 줌 뼛조각이 되어 나왔고 마스크를 쓴 직원이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디딘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흰 보자기에 싸인 분골함을 들고 벽제 화장장을 떠났다.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할 때까지 누구도 말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여동생은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인지 벽제 화장장에서부터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의 발길이 거쳐간 이 세상의 모든 곳에는 몇 웅큼의 증기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정령들이 가족들 시선을 한참이나 앞장서서 날아와 안개처럼 퍼져 있을 듯싶었다.  나는 그 정령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제는 더 멀고먼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 편히 사시라고 달래주고 싶었다.  자기 주장이 강하셨던 당신은 내 말을 순순히 따르실까?  몸뚱이가 불에 탄 다음에는 치매도 다 치유되었을 것이고 원래의 영혼으로 되돌아갔을 터였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지 오 일만에 다시 돌아온 직장은 낯설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알 수 없는 설움이 안개처럼 몰려왔다.  혈육의 정이라곤 눈곱만치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당신이 불 타던 화장로에 함께 태웠다.  인간의 그 보편적인 죽음 앞에서 나는 절반쯤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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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8-2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뒤로 하고 가셨군요.
대학생때이니 삼십년도 더 전에 벽제에 간 적이 있는데, 전 제 또래 되는 사람을 보내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절차 하나하나가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더군요.
꼼쥐님, 절반쯤 무너진 다리를 다시 추스리고 일어나셔야지요.

꼼쥐 2014-08-26 13:54   좋아요 0 | URL
저는 벽제 화장장을 서너 번쯤 다녀온 듯싶어요.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는 게 참 허망하다는 것이었어요. 일말의 감상이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느낌에 더하여 많은 생각들이 오가더군요.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요. 이제는 다시 일어나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위로 고맙습니다.
 

엊그제 충남 공주의 한 교회 수양관에 차량이 돌진하여 1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다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사상자 대부분이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한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이 사고를 두고 고소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 많이 놀랐다. 어떻게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그런 생각이 먼저 들 수 있었을까? 북한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더라도 딱하게 여겼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밑바탕에는 일부 개신교 관계자의 극단적인 편가름이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던 시복식 행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가톨릭과 교황 제도에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 단체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광화문 광장 근처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집회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 카톨릭은 정식종교가 아니라 이단이며 이들에게 광화문 광장을 내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고 너무 예우를 해주는 것"이란다.

 

게다가 어제는 개신교 단체에서 그토록 싫어한다는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내한공연도 있었다. 다행히도(?) 반대집회가 열렸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이 있기 오래 전부터 SNS를 통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일부 개신교 관계자의 돌발 행동은 이제 그 도를 넘어선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가시화된 반유대주의적 움직임과 맞물려 심각하게 인식하고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2년 유럽연합(EU)이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6%가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성은 양날의 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내부적으로는 조직원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외부적으로는 다른 구성원과의 소통을 차단하여 외부 조직으로부터 소외되고 때로는 분노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극단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략은 주로 권력 쟁취를 제1의 목표로 삼는 정당에서 선호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 개신교 집단에서도 같은 방법을 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본다.

 

어찌 보면 정당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복지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선 이전에 새누리당이 내세웠던 복지와 관련된 여러 공약이나 경제 민주화 공약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헌신짝처럼 내팽겨쳤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지지세력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장 시급한 만 원짜리 한 장을 얻기보다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 우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허영심을 품게 마련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막걸리나 고무신, 또는 기초 연금을 받지 못한)으로 국가의 정체성(반공 이데올로기)을 세웠다는 허황된 착각을 하게 된다. 즉 대(국가)를 위해 소(복지)를 희생했다는 뿌듯함마저 품게 된다는 얘기다. 비록 오늘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인간의 심리 저변에는 누구나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당도 그와 같은 정당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선거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될 것이 아니냐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이데올로기는 반공이념인데 그것은 이미 새누리당이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야당에게는 그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복지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느냐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복지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통합진보당은 그들만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를 누가 선점하느냐의 문제는 선거의 성패와 직결된다. 경제나 복지는 부수적인 문제일 뿐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집단도 그와 같은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극단적 구호는 외부에서 바라볼 때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조직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신도 개개인에게 이데올로기와 같은 대의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론은 적어도 종교에 있어서는 그 한계에 이른 듯하다. 외부 세력의 반감이 날로 심해지고 그에 맞설 수 있는 특별한 대비책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낙관적인 상황은 전국민을 개신교 신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반대세력을 없애는 것인데 그게 가능키나 한 일인지... 개신교 신자의 점진적인 감소추세에 있는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외부 세력과 소통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게 상책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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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1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톨릭 신자로서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반대집회를 연다는게 참....
전 개신교도 불교도 다 존중하는데 말입니다.

꼼쥐 2014-08-25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세례를 받았으니 카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불교든 이슬람교든 배척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요. 종교 때문에 평화를 깬다는 것은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 사람들 생각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