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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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원은 한순간의 '끌림'에 의해 소설가를 유도하고, 그 '끌림'에 의해 탄생한 소설 역시 '끌림'을 통하여 독자들을 유인한다. 양전하와 음전하에 의해 전기를 띠게 되는 대전체처럼 소설가의 열정과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낱낱의 '끌림'을 유도하는 '끌림'의 대전체. 나는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는 내내 소설가가 이룩한 '끌림'의 대전체에 기꺼이 감전되고픈 한 마리 부나방이라는 생각을 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p.303 '작가의 말' 중에서)


일본의 천황 메이지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을 접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조선의 청년 안중근의 대의와 일본의 노련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이토 히로부미의 대의가 맞부딪히는 순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안중근의 일대기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의 전기문처럼 쓰인 게 아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쓰러트린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들을 조망한다. 말하자면 소설가 김훈의 눈에 비친 안중근의 삶은 응축된 에너지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불꽃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명령이나 오랫동안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될 수 없는 붉은 마음이었음을 김훈은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훈은 이러한 안중근의 마음을 우덕순의 그것으로 비껴가고 있다.


"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p.232)


우리는 시시각각 스스로 말을 짓고, 자신이 지은 말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살아간다. 작가는 생활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말을 짓고, 자신의 말을 일반 대중을 향해 던진다. 그것은 청년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안중근은 인간 이토를 저격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수많은 제국주의자들의 가슴을 향해 결연한 단절의 의지로써 총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혹은 작가의 언어가 각자가 품은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안중근 역시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것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을 터, 목숨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음에 안중근은 마지막까지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앎이 통절한 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앎이란 곧 사물의 실상을 보는 정신의 작용이다. 실상을 보는 자는 몸 둘 자리를 알고 몸 쓸 방편을 스스로 안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  (p.80)


그렇다면 소설가 김훈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과 조국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속인 안중근의 갈등을 보여주려 했을까 아니면 일본의 제국주의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이토의 저격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던 청년 안중근의 야심과 그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부각하려 했을까. 아니면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그 당시 한국 교회를 통솔했던 뮈텔 주교의 갈등을 역사 속에서 다시 되살리려 했던 것일까.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할 수 있기를 염원했고,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 있던 뤼순 감옥을 향한다. 그리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면회한다.


"빌렘은 주일미사 강론 원고를 쓰지 못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을 말해도 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말은 하느님의 것이고 또 이 세상의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먼 길을 말은 건너가기 힘들었고 말하려는 것이 문장으로 엮어지지가 않았다. 새벽에, 빌렘은 원고 쓰기를 단념했다. 문장으로 엮지 말고, 말하여지는 대로 말하는 편이 오히려 진심에 가까울 것이라고 빌렘은 판단했다. 빌렘의 종이 위에는 죄, 살인, 생명, 영혼, 구원...... 같은 단어들이 문장으로 엮이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다."  (p.245)


작가에게 대전(帶電)되는 모든 단어들이 문장이나 책으로 엮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어는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책으로 엮여 독자들에게 배포되기도 하고, 또 어떤 단어는 오랜 시간을 건너 어렵게 어렵게 그 생명력을 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대전되었던 많은 단어들이 끝내 책이나 문장으로 엮이지 못한 채 조용히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수많은 단어들의 소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또 기려야 한다. 역사의 한 순간을 김훈 작가가 기억함으로써 불꽃처럼 타올랐던 청년 안중근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되살아났던 것처럼 작가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단어들의 운명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얼빈>보다 더 절절한 그들의 이야기를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미래의 어느 해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 <하얼빈>은 내게 우연처럼 이끌렸던 몇몇 단어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기적으로, 그리고 그 기적에 부나방처럼 이끌렸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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