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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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자. 슬픔에도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내보이는 적극적인 슬픔과 꺽꺽 울음을 안으로만 삼키는 소극적인 슬픔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란 이런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주변의 분위기와 주변을 맴도는 어떤 느낌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주르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하자. 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 <생의 실루엣>을 읽고 있노라면 과거의 어떤 슬픈 기억을 통과한 현재의 암묵적인 슬픔이 마치 창호지에 물감이 번지듯 밑바닥부터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럴 때 한 권의 책은 내 기억 속에서 슬픔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온갖 슬픈 기억 속에서 암묵적인 슬픔만 쏙쏙 뽑아내는 필터의 역할을 하는 듯도 하다.


"그나저나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궤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거산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p.87)


스물다섯 살 때 발작이 덮쳐온 뒤 9년이 지나서야 진단을 받고, 신경안정제가 자신의 상비약이 된 지 30년이나 되었다는 작가는 1년에 두 번씩 10년에 걸쳐 발행해 온 <소유>라는 잡지에 글을 연재하였고,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을 소재로 이 이상 쓰면 창작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철할 수 있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책에는 평생 안 보고 살던 이복형을 만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이야기, 어릴 적 입양되었던 동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장성한 후 지진으로 죽었다는 소식, 공황장애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일이 몹시도 힘들던 시절 서점의 어느 문예지를 보고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 불가리아 여행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들을 국경 밖으로 태워다 줄 차를 무작정 기다렸던 일, 어린 시절 터널 연립주택에서 시체를 발견했던 사건 등 작가는 자기 안에 있던 작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 터널 연립주택 시절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고를 지키지 않고 어슬렁거리던 때가 있어서 확실히 변변한 일은 없었지, 하며 부끄러운 생각에 잠긴다. 세상에는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 있다는 뜻이다. 터널 연립주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p.178)


책을 번역한 이수지 번역가는 '담백한 문체로 일상의 파문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썼다. '인간도 식물도 곤충도 모두 생명이며, 돌멩이 하나조차 생명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바람에서도 대기에서도 비에서도 구름에서도 생명의 모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명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사실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을 적게 잡아도 두어 번은 읽은 듯하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사물의 물성과 그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세상의 원리들이 무엇 하나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 이것이 지금만큼 요구되는 시대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방향을 향해 구체적으로 움직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와는 상관없이 인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107)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순간에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며,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나 존재한다는 걸 믿기로 하자. 삶의 연대는,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는 우리가 믿는 암묵적인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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