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쟁이 엄마 비룡소의 그림동화 148
유타 바우어 글.그림, 이현정 옮김 / 비룡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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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쓰러운 고백이지만 난 적어도 일주일 3~4번 정도는 하루가 저물무렵, 저녁밥을 하면서 시원한 캔맥주 한잔을 들이킨다.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함과 알콜이 주는 노곤한 알딸딸함이 그날 그날 아이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느정도 풀어주기 때문이다. 결혼 하기 전,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중노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밑빠진 독에 퍼붓는, 끝없는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24시간 365일 사적인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을 의미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부모와 아이의 불화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우리는 아이가 로봇처럼 움직여 주길 바란다. 시키는 대로.  하지만 하지마, 안돼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먹은 아이는 맹세컨데 없다. 그 자그마한 몸에서 표현해내는 거부의 몸짓은 투정 그 이상이다. 반항이라고는 뭣하지만 여하튼 뭐해라든가 하지마라고 하는 말들이 군대마냥 아이에게 들어먹히리라고 생각하면 오산. 뺀질뺀질거리기 시작하면서 나 보란듯이 가볍게 거역하기 시작하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히질 않는다(한마디로 막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엔 참아야지 하고 맘 먹다가 점점 신경이 거슬리는 것도 잠깐, 아이의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마침내 폭발하기에 이르른다. 폭발은 화산 폭발 저리가라다. 표정은 험해지고 말소리는 굉음에 가깝다.  펑!

아이를 키우면서 고함을 지르지 않는 부모는 없다. 적어도 부모이거나 부모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무난한 성격인 나조차 아이가 저지르는 못마땅한 행동에 분을 못 이겨 고함을 지른 적이 몇 번 있었다. 정말로 몇 번!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갖 몹쓸 말을 쏟아내면서 고함을 미친듯이 지른 적이 있었다. 난 적어도  너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러니 제발 엄마인 내가 하는 말 좀 들어달라는 애원을 고함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소리 친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엄마가 소리치기 전에 말 좀 잘 들었어야지 하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로봇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한 명의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것을. 결국 난 아이들에게  몇 번 소리 지른 것으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소리치지는 않는다.  살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고함을 지르지 않는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죄.책.감.  엄마의 고함에 주눅에 든 아이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며 가정에서 우월적 위치를 재차 확인하려는 새디스트적 관계를 거부하거니와  고함 친 후, 시원하다거나 통쾌하다는 그런 느낌보다는 알 수 없이 밀려드는 죄책감으로 몇 시간이고 몸살을 앓고 나서는, 결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나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고함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유타 바우어는 자신의 <고함쟁이 엄마>라는 그림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엄마의 언어폭력과 고함은  아이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 신체의 일부분들은 도처에 널부러진다. 어디 몸만 상처 받았겠냐 마음은 칼로 난도질 당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결국에는 엄마 몫이다. 맨 마지막에  엄마펭귄은 아기 펭귄의 몸을 하나 하나 찾아 꿰매주고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아, 미안해할 짓은 하지 말자.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인 <criminal mind> 1x14 에피소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살면서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재능은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재능을 학대하고 낭비하고 있다고(There is no greater gift in life that of being a parent. Yet so many of us abuse and squander that gift.) 모든 육아서적이 아이들편이듯이, 부모가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욕망보다 희생이 앞서야한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 그나마 나에겐 시원한 맥주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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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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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치로는 슬로 리딩이란 한권의 책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다. 책을 감상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읽기 방법이라고 정의하면서 슬로 리딩하는 독자를 슬로 리더라고 명하고 있다.  그는 천천히 책을 읽게 되면 독자는 작자가 준비해둔 장치나 고안을 잘 찾아내면서(게다가 소설의 노이즈까지)  독서가 재미있어지며, 작품을 이해하는데 천천히 읽기만한 방법이 없다고 쓰고 있다.

얼핏 책을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찬양은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난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피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주장은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슬로 리딩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쓰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의 노고에 독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책 한권을 읽기 위하여 그는 한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볼펜을 쥐고 앉자서 교과서적인 분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의도적 장치나 고안을 놓치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든 듯이. 물론 작가의 의도나 장치를 모르고 지나치면 독서의 효용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작가의 의도를 꼭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중의 하나는 작가의 의도말고도 여러 길로 나뉘어진  다의적인 해석이라고 바르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게이치로는 오독을 인정하지만, 작가의 눈밖에 난 오독은 인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오독은 편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오히려 게이치로의 그러한 생각이 더 편협해보인다. 맘껏 오독하라. 작품 곳곳에 깔려 있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체든 모르고 넘어가든지 간에, 작가가 왈가왈부할 것은 못 된다고 본다. 작품가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 가치보다 더 풍부한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는 독서의 양에서 질로의 전환야말로 스피드한 시대에서 썩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한 한 덕목으로 보는데..... 이거, 이거야말로 책 좋아하는 사람의 읽기 욕망과 수집 욕망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어째 우스운 꼴이 되버렸는데,  난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많은 책은 그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준다고 믿고, 수 많은 책을 접하는 짜릿한 자극은 우리를 끊임없이 책으로 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즈 뮤지션 마이스 데이비드의 예를 들면서, 마일스가 어렸을 때 단지 세 장의 레코드만을 가졌을 뿐이었다며, 그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장의 레코드을 끊임없이 듣고 듣고 또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마일스 데이비드가  세장이 레코드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밤에는 재즈 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기 위하여 이 클럽저 클럽을 돌아다니며 클럽 난간에 앉아 (그림책 벤의 트럼펫 한 번 읽어보길), 열심히 클럽안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을 듣는 어린 소년이  떠오르고 낮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라 긴장하며 라디오를 끼고 사는 데이비드가 떠오른다. 난 결코 마일스 데이비드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된것은 단지 세장의 레코드만을 들어서가 아니고, 그끊임없이 다른 음악을 접하기 위하여 찾아 돌아다니는 그의 음악에 대한 내재된 열망과 갈망때문이었을 것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좋아하면서 그 열정을 식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분히 바람둥이 기질을 타고 나야한다는 것이다.  요전에 읽는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나 존 벡스터는 평생 집 안 가득 책을 들여놓는 것도 모자라  최대한 자기들이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임대해서라도 책을 보관하고 팔기도 하는 경우를 읽었는데 그들이 단지 몇 권의 책에 만족하지 못한채 자신들의 지적자극을 충동질하는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물론 즐거워서겠지! 다행이 그 대상이 여자가 아닌 책이라서 다행이지.

아니 저 먼 곳의 사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젠틀 매드니스>의 공저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김연수, 박중서,표정훈은 책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책을 번역했다는 공통점 말고도 그들 모두 만권 클럽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집안에 만권의 책이 있다라고 생각해보라. 짐작컨데 집안에 단 한치의  비어있는 벽이 있을리가 없다. 책으로 도배된 벽만이 집안을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한사람이 일년 아니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몇 권이라고 생각하나. 분명한 것은 난 그들이 단순히 읽지 않을 책을 수집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책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욕망은 책읽기와 책 수집이라는 형태가 계속 될 것이다. 그들이 책을 만권을 다 읽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수 많은 양의 책들의 그들의 지적 활동의 기반임에는 틀림없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은 박학다식한 글로 여러 군데 기고하고, 몇 권의 장편소설로 이제 프로 소설가로 자리 잡은 김연수, 밀도 있고 정확한 번역을 하는 박중서. 이들이 단지 몇 권의 책만을 읽고 분석함으로써 그런 수준 높은 글을 쓸 수나 있었겠나. 꿈깨라!

책을 왜 좋아하는지 그리고 책을 왜 읽는지에 대해 게이치로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지 몇권의 책을 분석함으로써 소설 읽는 법을 익히고 세세한 기술적 측면을 섭렵한다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알더라도 바벨의 탑을 쌓고 싶어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독서방법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이었다.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라고 편안하게 제안하는 그의 기상천외 엽기 발랄한 독서법은 내멋대로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난 그의 독서론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한 무거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끝까지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  명작이라고 흔히 말하는 고전들을 꼭 읽어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남으로써, 책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의 쟝르에 더 폭 넓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방법으로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 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일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 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낙의 독서법은 어떤 책을 중간부터 읽든, 끝까지 읽지 않던, 처음과 끝만 읽던지 그리고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소화불량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타이틀도 내걸리지 않는 일반 독자이긴 하지만 좋은 책과 좋은 문장은 금방 알아 챈다. 그리고 끊임 없이 그 문장과 상황을 머리속에서 되내인다.  마치 알스버그의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말한 은방울소리처럼.

책을 읽는데 있어서 intensive냐 extensive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읽는 것이 중요하다. 건너뛰든 생략하든 재독하든지 그건 독자의 몫이다. 신경쓰지 말아라.난 한권의 책을 교과서처럼 분석하느니 소파에 편안히 앉아 수 백권의 책을 내 멋대로 읽은 것을 선택하겠다. 게이치로 당신은 소설이나 잘 써라. 좋은 글은  재독하고 재독해도 싫증이란 것을 모르고 끊임없이 읽게 마련이다. 독자가 작품의 그 어떤 subtext를 찾아내든,이제 작품은 독자의 관할권 안에 있다 이제 편히 쉬어라.  독자인 내가 해주고 말은 이거다.

ps- 19세기에 묵독의 습관은 어쩔 수 없는 소설의 탄생의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고 본다. 소설 이전의 시와 희곡은 크게 소리내서 읽기 위하여 리듬과 운율에 맞쳐진 쟝르이다.  음유시인들이 수세기동안 떠돌아 다니며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리드미컬하게 운율에 맞춰 거듭 수정하면서 세대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시와 다른 문학의 쟝르(희곡같은 것)란 구전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묵독은 몇 몇 부유한 지식인들의 전용이지 않았나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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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4-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속이 시원한 리뷰네요. :) 처음 뵙겠습니다. 자주 들를거 같아요.

기억의집 2008-04-17 15:04   좋아요 0 | URL
앗, 반갑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알라딘이 불통이다 보니 지금에서야 들어와 보니 반가운 글이 맞아주네요. 시원한 리뷰라고 하시니.... 속 좀 푸셨나요! 저도 자주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2008-04-18 0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8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코토의 푸른 하늘 - 생활 팬터지 동화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40
후쿠다 이와오.시즈타니 모토코 지음, 김정화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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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벽은 책으로 둘러쌓여 있고 나의 하늘은 책벽으로 둘러쌓인 딱 그만큼만 푸르르다.  나란 사람의 인간관계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부딪혀 이해하기 보다는, 책속에서 만나는, 영화속에서 만나는 가상의  사람들과 일방적인 만남과 교류에 그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는 제법 깊고 넓지만, 실제상황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읽을 책을 쌓아놓고, 다운받아 봐야할 미드와 영화가 쌓여져 있으니, 당연히 실제 사람들 만나 교류를 갖는 것이 내 사적인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을 고립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다고는 해도 외롭지가 않다. 오히려 넘쳐나는 책이나 영화,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이 모자랄 정도이니, 고립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 않나싶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고  24시간이 후딱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네 아줌마들에겐 싹싹하고 인사 잘하는 사람으로 통하긴 하지만 그네들의 일상과는 어울릴려고 하지는 않는다. 커피를 마시러 온다는 내 또래의 엄마에게 오지 말라고 하지는 않지만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나면 그 뿐이다.  내가 스스로 놀러간다거나 점심을 같이 먹거나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지 않으니 더 이상의 깊은 관계나 교류는 힘들다. 학교 엄마들하고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가지 않으니 아들애 학교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단지 몇몇의 엄마들하고만 알고 지낸다. 폭 넓은 인간관계라는 말은 나에게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구나 싶다. 뭐에 대한 욕망때문이냐!  무슨 강박으로 신간이 나올 때마다 궁금증을 못 참아 질러야 하고  아침마다 미드 한편을 꼭 봐야 하는지....

일상에서 자기 만족이라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과의 무난한 교류일까. 책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 틈에 있지 않는데 무엇을 느낀들, 그냥 그건 느낀 자기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허탈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감정을 그 누군가에에 전하고 싶고 교류하고 싶어도, 좁은 인간관계속에서는 그게 잘 안되니........ 답답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말은 터 놓아야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터놓고 말할 만한 상대가 몇이나 되는지... 혼자만의 생활 아니 가족이 같이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는 시간이 많아서, 나의 경우는 타인을 쉽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마코토의 푸른 하늘>은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더듬어 생각해 준 작품이었다.

철거직전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뽀루통한  12살의 마코토는 그 아파트에 몇 남지 않는 아파트 사람들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타인에 대한 나눔, 배려 그리고 이해를 통해 그 또래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어른지향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고장안 엘리베이터에 아라키다 할아버지와 함께 갇히면서 마코토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그리고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언제나 집에서 외롭게 생활한 에리카누나까지 알게 되면서, 각자 다른 인생살이지만 서로 어울리면서 일상을 당당히 꾸려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나보다 더 마코토는 사람과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어울리는 법을 알고 있고 냉정하고 무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작가는 마코토를 통해 가치 있는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간의 챙겨주는 따스함 마음, 보듬어 안아 주는 넉넉한 관계가 한아이가 올곧게 자랄 수 있는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맑고 푸른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펼쳐지 있다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을텐데. 영어공부 안한다고 도끼눈 할 필요도 없고.....딱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미스터리한 요소도 극적인 요소보다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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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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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도 나오키수상작인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12년이 지난 2008년에 읽어도 수사물이라는 쟝르면에나 작중인물의 심리묘사에 있어서 그렇게 구닥다리 냄새가 풍기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20세기 끝무렵인 96년에 범죄소설에 오토미치 다카코라는 여형사의 활약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작품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범죄수사물에 여자가 차례차례 등장하면서(CSI가 한 몫 단단히 했지!), 범죄물에 여자수사관이라는 것이 별 거 아닌 일로 치부되고 있지만 20세기만 하더라고 여성형사라는 직함은 아무래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나 싶다. 심지어 아가사 크리스티나 도로시 세이어즈의 여성 추리작가들조차 자신의 추리소설에 포와르니 윔지경이니 해서 남자주인공들을 형사나 탐정으로 등장시켰지 본격적으로 여자형사라는 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여자탐정은 있었지만. 애교로 미스 마플정도.

나와는 달리 꽤 규모가 큰 회사를 다녔던 언니가 언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0년이 지나면서 확실히 대기업에서 여자건축설계사들을 자신의 회사에 보내 교섭하기 시작했다고. 여자들도 전문직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자들의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의미도 되지만 남자들 전유물로만 알고 있던 직업도 서서히 여성들이 침입으로 단단했던 그 벽이 서서히 붕괴되는 시작한 터닝포인트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여성들의 침입이니, 붕괴니하는 말이야 쉽지, 역시 형사라는 직업의 세계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형사들조차 이미지가 떡대같이 험악하고, 깡패 같으니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가 몇 이나 될 수 있고 그 벽을 허물겠다고 덤비는 여자가 어디 그렇게 많을소냐!  

여하튼, 이 작품은 다카코라는 여성이 강력계에서 활동하는 사건파일이다. 여성이 강력계에 등장하는 초기작이라서 맹활약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강력계에서 남자형사들이 여성형사들 대하는 기존관념이라든지 성역활의 고정관념을 어어느정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CSI의 여성수사원이나 Cold Case에서의 강력계 여형사들이 남자 수사원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사건을 진행하는 시키는 반면에, 다카코는 남성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을 핵심으로 끌고 간다. 기존의 범죄수사물이 탐정 한 사람이 범인을 쫓는 하드 보일드형이라면, 이 작품은 한 사건에 수 많은 형사들이 공존하면서 자신의 역활을 충분히 소화해  살인 동기와 범인을 쫓는 형식이다. 다카코가 중심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가 두드러지게 핵심적인 역활을 하지 않는다고나할까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고 작가도 어느정도 그 세계를 남자의 세계로 단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미면에서 빠지지 않고 여형사를 등장시켜 사건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내리는 것일지도. 수십권의 작품을 썼다는 노마니 아사의 미국내 첫 작품이 이 <얼어붙은 송곳니>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노마이 아사는 이 작품 말고도<Now You're One of Us>가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본작가들의 미국진출이 두드러진다. 미유베 미야키뿐만 아니다. 히라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오가와 요코등등 심지어 가쿠다 미츠오의 <대안의 그녀>까지. 판매량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들의 출간이 미국인 번역자들에 의한 출간이라는 점에서 좀 놀라울 정도다. 많은 일본만화가 미국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심지어 쟝르소설까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부럽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다. 

역자의 후기처럼 이 작품의 백미는 오토바이 추격씬이다. 그 씬은 상당히 남성적인데(운전하는 사람은 여자인데,남성적이라고 떠들어대니... 이거 원!), 빈 틈이 없다. 묘사나 심리전이라는 측면에서. 누구와 추격을 벌이는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다카코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범죄물이 여성화되는 것도 부드러워 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둘러 쌓여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한다. 우습지만, 그들세계에 홍일점으로 아니라 동화되어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참, 뭐랄까! 여자성만 가지고는 접근하기가 힘든, 여자라도 남성성이 다분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범죄물은 역시나 남성들의 몫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나 할까. 

여성형사라는 등장 인물은 내세운 픽션적 접근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범죄물은 남성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강력계의 여성형사라는 소재는 신선선했다. 이왕 픽션적 접근이었다면, 좀 더 강하고 터프한 릴리 러쉬나 캣 밀러스타일의 여성형사 이미지였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이 작품 읽고, 그 이후 다카코가 어떤 이미지로 사건을 추적하는지 그리고 어떤 범인과 대처하는, 노나미 아사의 다카코 시리즈가 궁금해진다. 이제 시대도 변했으니 좀 더 강해졌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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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드가 제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한 유행한다고 해도 내 경우 미드보기는 OCN이나 언스타일같은 TV에서 방영해주는 드라마 전부였다. 굳히 토토 브라우저에서 돈 내가면서까지 보지 않았었는데, 작년 가을에, 형제끼리 모여 이야기하다가 남동생이 Cold Case라는 드라마 아냐고 물어보길래, 언스타일에서 해주는 거 몇 편 봤는데, 재밌기는 하더라. 근데 왜 물어봐!  

"누나, Cold Case 재미도 재미지만 자세히 들어봐. 거기에 나오는 음악이 우리가 어렸을 때 듣던 음악이잖아. first 송하고 ending 음악이 얼마나 멋진데, 거의 다 아는 노랠거야"라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언니까지 합세해 Cold Case는 엔딩음악때문에 찡할때가 많다고 바람을 넣는 바람에 집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미드작품을 다운받아서 보게 되었다. 몇 개 다운 받아서 본다는 게 시즌1부터 2008년 시즌 5 에피소드 12까지 다운받아서 보게 되었다(전부 다 다운받아서 보는데 한 2만원 넘게 깨진 것 같은데.)  80년대 팝과 락음악으로10대를 보낸 우리 형제들에게, 팝음악이 시대배경이 되어 과거 사건을 현재로 끌어들이는 이 콜드 케이스라는 드라마는 매력 그 이상이었다. 

미해결사건이라는 뜻의 미드 Cold Case의 특징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현재 지금 일어난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일어났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서 사건을 종결짓는(case closed) 드라마이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보니 CSI처럼 결정적 과학적인 증거물에 의해 밝혀지기 보다는 탐문수사와 취조에 의존한다. 이 작품은 취조나 탐문수사에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현재모습에서 과거 기억을 Flashback 기법을 주사용하여, 사건의 시발점에서부터 재구성하고 추리한다. 수사물로는 참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고 할 수 있는데, 소재도 다양해서 여성참정권시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갈 때도 있고 소애애자까지 다뤄 폭 넓고 다양하다. 가볍게 볼 만한 드라마기보다는 한편 한편이 무겁고 진지하다.  

<루팡의 소식>은 한마디로 일본판 cold case이다. 과거 그러니깐 15년전 자살로 결론이 난 미네 마이코라는 여교사 살인사건을 자살이 아닌 살인으로 재수사하는, 그 살인사건 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인 24시간을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 재밌다. 사다 놓기만 하고 안 읽다가 기분 전환용 읽을 요량으로 펼쳐 든 것이 이틀을 꼬박 할애했다. 아이만 없었다면 밥까지 굶어가면서 읽을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다.  

이 책도 미드 <Cold  case>처럼 탐문수사와 취조를 전제로 구성되어 있고, 용의자 기타와 다쓰미가 기억을 상기시킴으로써(flashback기법) 사건이 순차적으로 재구성된다. 즉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함께 공존한다. 취조에 의한 용의자들이 기억해내는 사건은 완전히 기타나 다쓰미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전지적 시점에 의한 사건 노출이어서 독자가 의문을 가지고 읽어나가면 누가 사건의 배경인물인지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살인 사건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형사나 독자는 기타와 다쓰미의 말을 들으며 살인동기를 찾아 내야 한다. 결국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한 인간의 추악하고 추잡한 욕망에 의한 것이지만 히데오는 여기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양 작품에 인간미를 부여한다. 

히데오가 공공연하게 자신의 작품속에 드러내는 직장내 사람들간의 알력, 시기, 오만이 잘 드러나면서도 그는 사람들사이의 넉넉하고 우직한, 따스한 인간애 또한 놓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매번  그의 작품속에서 그런 유치한 인간애에 피식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함이 감지돼, 나 또한 그의 팔불출 인간미에 전염이 되어 마음이 가슴이 따스해진다. 그의 작품 속에는 냉정함이나 차거움은 없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냉철한 시각이 있어도 그가 풀어낸 사건의 결론에는 언제나 항상 따스함이 넘쳐난다. 그래서 내가 히데오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사건의 줄거리를 세세하게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약간의 스포일러도 이 작품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긴박하게 숨 넘어가듯 돌아가지는 않지만 독자를 한숨에 책 속으로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 일단 책을 집고 읽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귀찮아 질 정도로 히데오의 마수에 끌려 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슬슬 다른 그의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 이 작품의 엔딩송 고르라고 한다면 Extreme 의 More than words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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