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하겠습니다
군 구미코 지음, 쓰치다 노부코 그림, 김경화 옮김 / 푸른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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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파는 800원짜리 돋보기도 같이 주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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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Closed, Vol. 15: Volume 15 (Paperback) Case Closed (명탐정 코난 영문판) 15
Aoyama, Gosho / Viz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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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코난의 영어판입니다. 이 책 한권의 가격이 무려 만원이 넘습니다. 요즘 환율이 아까 잠깐 들어가 살펴보았더니 1030원이었으니깐 무척이나 비싼 만화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 고시된 판매 가격이 $9.99이고 미국아마존에서도 할인을 하지 않습니다. 이 무슨 얼어죽을 놈의... 한국에서 4천원도 안 되는 책이 왜 미쿡에서는 만원을 하는지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아마존의 소설 할인률이 10~40% 정도임을 감안하면, 일본 만화가 할인이 전혀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혹 무슨 음모론이! 음모론 갖다 부치는 것 좋아하는 조종동은 알 수 있으려나. 무슨 이유로 할인이 안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국애들은 비싼 돈 주고 만화 본다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군요. 참고로 <요츠바랑!>, <아즈망가 대왕>, <원피스>, <데스 노트>,<몬스터>등과 같은 만화도 영어로 번역되어 아마존에서 파는데 역시 할인이 안 됩니다. 도대체 그 많은 만화책을 사려면 얼마나 많을 돈을 쳐 발라야하고 비싼 돈 주고 사들인 책이랍시고 책장을 훑어보니 제다 일본만화책이라면 어느 부모가 좋다고 할까나 싶습니다. 일본 만화를 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만화책의 content안에 만원이라는 가치가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군요.


젠장, 여하튼, 책 한권이, 아니 만화책 한권에 만원돈 하면 솔직히 비싼 거 아닌가요? 제 생각에는 과연 이렇게 값비싼 책을 살까 싶은데, 이 시리즈가 현재 23권까지 번역되어 꾸준히 나오는 것을 보면, 판매가 그런대로 되는가 봅니다. 이 책 <명탐정 코난>은 리뷰가 별로 없는데 요츠바나 아즈망가는 리뷰도 제법 재밌다고 많이 올라와 있고 <몬스터>같은 경우는 놀랍다라는 반응이 많더라구요. 리뷰 읽다보면 일본만화의 위상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일본만화의 위력은 엄청나는데다, 일본만화의 광적인 팬임을 자처하는 리뷰어가 한둘이 아니고 전문적으로 일본망가를 읽고 수집하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돈이 남아 돌아서 혹은 돈지랄하기 위하여 이 만화책을 산 것은 아닙니다. 이 비싼 책을 산 이유는 일본 만화의 영역판은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영어 표현의 호기심에서 한 번 사봤는데, 영어공부 하기에는 딱입니다.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써 먹지 않는 한, 시간을 따로 내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 영어공부라고 하고 싶습니다. 코난 자체가 추리라서 그런지 영어문장도 많고 상황에 맞게, 짧고 쉽게 대화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범죄에 관련된 몇 개의 단어만 사전에서 찾으면 무난하게 읽을 수 있고 한국어 번역본하고 대조해서 읽으면 어떤 상황에서 무슨 영어를 썼는지 영어회화시 참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책값이 만만치 않아서 전권을 다 구입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따분한 소설원서보다는 만화책으로 영어회화를 접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전부 사는 것은 별로 권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권을 다 사기에는 책값이 너무 만만치 않아 가정파괴의 주범이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샘플링이라고 생각하고,코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쟝르의 만화영역본을 몇 권 구입해서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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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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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권력구조는 국민이 저항을 통해 바꿔야 한다" 

1994년, 데이비드 바사미언과 촘스키의 대화로 엮은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는 12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그 어떤 책보다 가치있고 유효하다. 현재 이명박정부가 벌이고 있는 모든 정책(공공기관의 민영화, 재벌위주의 정책, 신자유주의 경제등등)이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암울한 암흑으로 덮어버릴수 있는가를 그리고 권력과 부을 움켜진 자들이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고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난 이 책 읽으면서 이책의 내용과 현재 우리 상황이 너무나 맞아 떨어져 촘스키가 무슨 예언가인줄 알았다. 노스트라다무스 저리 가라다.)


확실히 촘스키는 중도노선의 지식인은 아니다. 그의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학문적 헤게모니를 가진 지식인으로서 지배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고 그들의 비리와 남용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현재 지배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정확성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침 튀겨가며 단언하건데,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권력을 쥔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책이 잘 못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기묘한 말 바꾸기와 선동은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마비시킨다. 거기에다 언론까지 정부의 기만에 합세하면 국민은 그저 믿고 따를 수 밖에 없다. 괜시리 정부나 정부기관을 영어로 Authority 라고 불리지 않는다. 권위, 권한이라고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authority의 밑바탕에는 국민이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정부(또는 기관) 즉 authority라고 한다. 

국민을 전폭적인 신뢰와 기반을 바탕으로 한 주제에 authority는 이제 국민을 등에 업고 세상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몇 명의 권력을 움켜진 자들은 부와 결탁하여 멋모르는 국민들을 우롱하고 장악하려 하는 것이다. 미국쇠고기가 싸고 맛 좋으니깐 미국이 주는 대로 광우병에 상관없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입 닥치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국민을 권력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국민은 양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신들을 따라야하는 양같은 존재. 우리 국민이 찍소리도 못하고 주는 대로 풀이나 뜯어먹는 양같은 존재로 남아야할지 한 번 생각해보고 넘겨할 문제일 것이다. 

며칠 전에 미드 <Law&order SVU> 9x17 에서 Merritt Rook라는 역활로 출연한 로빈 윌리엄스는 자신의 신분을 경찰로 가장하여 해피버거라는 매장에 전화를 걸어 매니저에게 점원중의 한명이 고객의 돈을 훔쳤으니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그 여점원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묶으라고 전화로 명령한다. 매니저는 경찰이라는 말에 전혀 의심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만 매장에 들이닥힌 것은 실제 경찰이었고 매니저는 취조받는 과정에서 가짜 경철 전화 한통화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진짜 범인임을 알고 로빈을 체포해 법정에 세운다. 하지만 로빈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체포한 벤슨형사나 엘리엇 형사를 그리고 자신을 법정에 세운 노박검사를 탓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양이 양치기를 따르 듯 명령을 따를 뿐이다. 우리는 양이 되서 위험에 빠져도 맹목적으로 따를 뿐 authority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라고. 로빈은 배심원들에게 아니 시청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양이 되지 말라. 스스로 생각하라" 고 말이다. 일반 대중보다 한사람의 세계적인 연예인이 던지는 말 한마디가 핵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때, 로빈이 범인으로 나와 한 말이지만 그의 그 말은 엄청난 의미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국민 한사람 한 사람이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나 기관을 완전히 믿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왜 그렇게 해야만 하고 우리가 따라야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파는 국민의 의문부호를 싫어한다. 촘스키가 우파는 국민이 도서관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데는 의문부호에 대한 정확한 답을 회피하고 자신의 지배권력을 확고히 다져놓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로빈 윌리엄스의 법정변호의 말이나 촘스키의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은 상하 명령의 지배체계를 효율적으로 국민을 관리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변질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싸워 세상을 변화시켜야한다는 것으로 난 받아들였다. 세상이 권력자나 부자들에게 치우쳐가는 것이 아니고 촘스키가 말하는 공익(common good)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좌파니 우파니하는 말장난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우스운 꼴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검역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나라고 국민 한 사람이라도 의문을 던진다면 정부는 그 의문에 답을 해야하는 것이 정석이다. 뻑하면 반미니 좌파니하며 얼렁뚱땅 몰아세우며 너희 국민들을 이해 못하겠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에 정확한 답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를 희생해가면서 소수의 단기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65p)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보면서 정부나 기관의 신뢰도가 낮아졌다. 이제 난 정부가 내 놓는 정책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모를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의문정도가 아니라 흑과 백 그리고 그 중간지점인 회색도 못 믿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게 다 정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면서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의 정치적 정체성은,경상도 b급좌파 남편을 만나기전만 해도 무뇌아 수준이었다. 투표권이 내 앞으로 떨어진 그 순간부터 난 친정부모의 강권에 못이겨 한나라당에 표을 던졌다. 지금에 와서 후회니 뭐니 하는 말은 다 필요 없으리라. 지난 10년간 무뇌아였던 나도 좌파로 서서히 변했다. 경상도 좌파 남편의 인터넷 사이트 흔적을 따라 다니다 보니 이제 정치적으로 나도 모르게 어느 새 좌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젠 양같이 투표 행사를 하지 않는다. 세상도 변했다. 나도 변했다. 더 이상 양처럼 순한 국민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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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지음, 권영주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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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벽돌 같은 책을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사이덴스티커의 어린시절과 청년 시절을 다룬, 지루한 1,2 챕터를 지나 작가가 일본의 근대문학을 섭렵하기 시작하고 다니자키, 야스나리 그리고 유키오와의 일상적 그리고 문학적 교류가 활발하게 묘사되면서부터 재미가 솔솔 붙기 시작한다. 특히나  야스나리 같은 경우는 사이덴스티커의 번역 덕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어서 야스나리와의 교류와 그 사이에서 소외된 유시마와의 관계 묘사는 그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했다. (사이덴스티커는 유키오의 경우, 다니자키나 야스나리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내가 이 작가에게 관심 있었던 것은 그의 생애가 아니고 그와 일본문학과의 관계였지 않나 싶다.) 

이 회고에 가까운 책을 읽다보면, 사이덴스티커는 50,60년대의 일본 순수 문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워낙 번역문학을 중요시 여기는 탓에 사이덴스티커는 일본의 대가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친분을 두텁게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니자키나 야스나리같은 순수 문학의 대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의 영역본을 위해 아무 꺼리낌 없이 그를 만나고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번역문학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음을, 그리고 역으로 번역문학의 우대 풍토가 노벨상 수상을 가져 온 것임을 미뤄 짐작해 본다.


일본 태생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자기 나라의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미국 태생의 백인이  일본 작품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래도 태생적 언어가 아닌 2차적으로 획득한 언어를 가지고, 외국에 자기 나라의 문학작품을 번역소개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영어문화권의 사람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감정과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2차적으로 언어를 획득한 사람보다는 태생적으로 그 언어를 획득한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내 나라 언어로 바꾸는 번역이라는 것은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한 단어 한 단어가 딱딱 맞아 떨어지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말이라는 게 어디 바디 랭귀지처럼 단순한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을. 그럴 때는 번역가들도 말의 더하기와 빼기에 신경 쓰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사이덴스티커는 번역이 '뭔가를 내버려야 하는 가차 없는 작업"이라며 작품의 문장을 번역가가 임의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후기에 권영주씨가 이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의 글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을 하면서 생각할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성인 대상의  번역작품들은 번역가들이 최대한으로 원저자의 작품을 존중하며 번역하지만, 어린이 작품은 몇 몇 작품을 원작과 비교해 보면, 많은 부분 번역가가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 답시고 원문에 충실하기 보다는 원문에 비슷하게 번역가가 의역이라고 하기에는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지어낸 문장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삭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처음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화가 났었다.  

하지만 영어의 문장을 한국어로 옮길 때의 그 어색함이나 뻔뻔함을 고려할 때, 나름 최선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번역가를 비난 할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오른다. 물론 아직도 나같은 사람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원하고 있지만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하거나 번역가가 읽는 이의 이해를 위해 다른 비유를 갖다 붙인다는(강주헌씨 같은 경우는 촘스키를 번역할 때) 경우를 읽으면서, 꽉 막힌 나의 원문 충실에 대한 고집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결국 삭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이덴스티커의 경우 지적 오만함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번역가 자신의  양심과 깊은 고뇌에서 우러나온 결과라면 어느정도의 유들함과 융통성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싶은 것이다. 번역이라는 게 단순히 외국어에 능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적지 않는 지식과 상식이 쌓아야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번역을 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마이더스의 손을 가지고 있다. 번역문이 황금이 될지  돌이 될지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무엇을 만지는 간에, 책을 받자마자 원문에 충실할 수 있는지, 빼야하는지, 스트레이트로 해야하는지,비유를 달리 해야하는지는 번역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번역한 책 한권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영향력이 문화적 contents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았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번역가들이 있어 다른 언어의 많은 글이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사이덴스티커가 없었다면, 일본의 순수 문학과 고전문학의 번역은 더딜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도 누군가는 했었지만, 본격적인 그의 일본 작품의 번역은 여러 쟝르의 일본문학 번역의 물꼬를 터준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현재 미국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일본 소설이 순수문학이든, 고전이든, 쟝르든지 간에 수 많은 작품이 미국태생의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 현실은 단지 부러움을 넘어 우리 나라 번역 문학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갖게 된다. 번역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 문학 풍토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우리 나라 번역가가 다른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든, 외국인이 우리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든지 간에 번역 문화의 우대와 융성이 한 나라의 문화를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은 틀림 없다.   

여하튼 그의 일본에 대한 열린 시각과 애정은 넘쳐 보인다. 단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사이덴스티커가 순수 문학에만 관심이 있어 쟝르문학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도 없다는 것이다. 란포, 세이지, 세이초 같은 거물급 쟝르소설가에 대한  무언급과 무관심은 한쪽에 치우져진 그의 문학관과 순수문학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이런 우리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외국태생의 번역가가 한 명은 나와 주었음은 더 바랄 것도 없겠다. 

ps- 어째든 꾸역꾸역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를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번역한 권영주씨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들은 한가지 언어도 힘들어 유학이네 해외연수네 하는데, 일어와 영어의 번역책들을 번갈아 가며 출간하고 있으니, 그녀의 언어 실력이 부러울 뿐이다. 권영주의 프로파일은 책날개에 간략하게 나와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다행히 그녀가 쓴  번역 후기를 통해 현재 그녀가 일본의 쟝르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남들은 언어 하나 갖고도 버벅대는 마당에, 두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왜 안 부러울소냐! 뭐 이런 생각! ㅋㅋㅋ 그럼 김석희씨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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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완독 하셨군요. 사이덴스티커의 오만함과 지루한 전개에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는데...

기억의집 2010-04-28 14: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사람 오만해요. 제가 방금 말한 윌슨과는 전적으로 글쓰기나 사고나 틀리더라구요. 이 사람은 백인우월주의도 상당한 사람인데, 이 양반의 가치는 일본문학을 서구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거 같아요.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양반인 거 같던데...^^ 이 책 말도 사이덴스티커의 다른 책도 읽을까 하다가 말았어요. 근데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것 사실이에요^^
 
[수입] Duran Duran - Greatest
듀란듀란(Duran Duran) 노래 / 이엠아이(EMI)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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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용의 영팝스세대인 나는 10대 시절에는 듀란듀란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난 그들의 내한 공연에 대해 꽃들에게 희망을님이  쓴 리뷰를 읽고, 갑작스레 시간을 달려 십대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80년대는 흔히 지금은 명반이라고 불리우는 반젤리스의 Heaven & hell 이나 블랙 사바스의 Heaven & hell 같은 음악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시대였다. 10분짜리는 물론 20분짜리의 프로그레시브음악이나 클래시 메탈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나왔던, 팝의 황금기이자 김기덕, 황인용, 박원웅, 김광한 같은 팝 전문 디제이들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AFKN에선 케이시 케이슴과 울프맨 잭의 전성기였기도 하고.

80년대의 팝음악은 질적이나 양적으로 넘쳐 흐르던 시기였다. 당연히 듀란듀란같은 꽃미남들로 구성된 구룹은 음악성이 월등한 쪽에 끼기 보다는 얼굴로 한 몫 본다는 시각이 더 우세했고 그들의 경쾌한 팝 음악은 하이틴 특히나 여자아이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지금 다시 그들의 save a prayer 나 오디너리 피플을 들고 있으면, 꽃미남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적으로 덜 평가된 구룹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든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70년대를 이어서 80년대 뮤지션들의 실력이 쟁쟁했다는 점이다. 70년대에 시작된 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음악을 하던  실력이 탄탄한  많은 뮤지션들이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팝화되던 시절이므로, 듀란듀란의 음악실력으로 빌보드 차트 상위까지 오르고 앨범은 플래티늄을 받을 지언정, 당시에는 그들보다 덜 팔리고 덜 알려진,  더 뛰어난 뮤지션들이 날고 기었다는 사실일게다.

세월이 흘러, 2008년 4월, 중년의 불은 몸으로 대한민국의 봄과 함께 그들이 왔다. 사실 난 꽃님의 포스팅을 보기 전에는 듀란듀란이 한국에 내한했는지도 몰랐다. 꽃들에게 희망을님의 <아줌마의 추억>를 읽으면서, 번쩍하며 불러 들인 나의 10대 시절의 팝음악의 얽힌 파노라마가 계속해서 상영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가 이 듀란듀란의 사이먼 르 봉을 열렬하게 좋아했다. 자신이 사이먼의 아내라면서, 당시 사이먼이 사귀였던 여자 모델 야스민(?)에 대한 엄청난 질투를 불사르며 자신은 미국을 꼭 가서 사이먼을 만날 것이라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듀란듀란의 모든 테프를 구입한 것은 물론이요(사실 그 때는 지금처럼 인기 있다고 해도 그들의 앨범 전체가 레코드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 친구네 집에 가는 도중에도 그리고 그녀의 다락방에 부쳐놓은 듀란듀란 특히나 사이먼의 사진을 보면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러했으니, 내 어찌 듀란듀란을 잊을소냐!

듀란듀란, 당시에는 남자치고는 얼굴들이 이쁘다보니 음악쪽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 했을지라도 이 정도의 음악이라면 팝음악사에는 길히 남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데뷔 초기곡이자 빌보드 차트 상위에 오른,  드럼이나 기타음보다는 신서사이저를 앞세우며 가볍고 경쾌한 hungry like the wolf나  wild boy,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girls on flim 이나 활동중반기, 좀 더 성숙한 음악적인 변화가 보인 히트곡 notorius, a view to a kill ,ordiary people, save a prayer등이 실려있다. 이 음반을 훑으면서, 중력의 법칙을 새삼 확인했다. 높은 정상에 있고 싶어하는 욕망을 자꾸 끌어내리려고 하는. 해체 시기만해도 음악이 신통찮다. 음악에 대한 열정보다 음반이 가져다 준 수입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번에 남동생하고 같이 듀란듀란 음악 들으면서 "누나, 듀란듀란은 확실히 음악이 저 평가 되었던 것 같아"라는 말이 다시 귓등에 울린다. 상대평가겠지! 당시에 음악적으로 실력있는 구룹이나 아티스트가 많았으니깐. 듀란듀란이 낄 자리는 없었잖아."라는 말로 되맞았지만, 지금 현재 2008년에 들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음악이 어느정도는 앞섰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의 음악을 다시 편견없이 듣고 싶고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며 경쟁 치열한 팝의 역사에서 지금껏 살아 남은 것으로 봐서 그들의 음악이 후진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그 아줌마도 이 시디를 사서 예전 10대 시절 몸살을 앓았던 첫 사랑 존을 떠올리지 않을까나. 요즘 파는 시디들을 훑어보면 정규앨범이 사라졌다. 대부분이 히트곡 모음집들 뿐이니. 아쉽다. 예전에는 정규 앨범 일러스트가 거의 예술적 경지였는데........음악이 죽었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요즘 그나마 에이브릴 라빈이 괜찮던데.

덧붙여 : 10대 시절 난 듀란듀란보다  히어로나 차이나 걸을 부른 데이빗 보위와 리버를 부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좋아했고 80년대가 거의 끝날무렵, 락음악이 거의 죽다시피 해 그 대안으로 나온  너바나의 얼터네이티브 락과 메탈리카의 트래쉬메탈 사이에서, 난 메탈리카을 선택했다. 20대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도 많이 했던 시기여서 그런지 라스 울리히의 드럼이 시원하게 들렸던 것이다. 지금은 메탈음악 들으라고 해도 저절로 클래식 특히나 아리아쪽을 선호하지만 나도 예전에는 락이나 메탈을 들었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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