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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게이치로는 슬로 리딩이란 한권의 책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다. 책을 감상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읽기 방법이라고 정의하면서 슬로 리딩하는 독자를 슬로 리더라고 명하고 있다. 그는 천천히 책을 읽게 되면 독자는 작자가 준비해둔 장치나 고안을 잘 찾아내면서(게다가 소설의 노이즈까지) 독서가 재미있어지며, 작품을 이해하는데 천천히 읽기만한 방법이 없다고 쓰고 있다.
얼핏 책을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찬양은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난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피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주장은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슬로 리딩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쓰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의 노고에 독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책 한권을 읽기 위하여 그는 한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볼펜을 쥐고 앉자서 교과서적인 분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의도적 장치나 고안을 놓치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든 듯이. 물론 작가의 의도나 장치를 모르고 지나치면 독서의 효용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작가의 의도를 꼭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중의 하나는 작가의 의도말고도 여러 길로 나뉘어진 다의적인 해석이라고 바르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게이치로는 오독을 인정하지만, 작가의 눈밖에 난 오독은 인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오독은 편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오히려 게이치로의 그러한 생각이 더 편협해보인다. 맘껏 오독하라. 작품 곳곳에 깔려 있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체든 모르고 넘어가든지 간에, 작가가 왈가왈부할 것은 못 된다고 본다. 작품가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 가치보다 더 풍부한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는 독서의 양에서 질로의 전환야말로 스피드한 시대에서 썩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한 한 덕목으로 보는데..... 이거, 이거야말로 책 좋아하는 사람의 읽기 욕망과 수집 욕망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어째 우스운 꼴이 되버렸는데, 난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많은 책은 그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준다고 믿고, 수 많은 책을 접하는 짜릿한 자극은 우리를 끊임없이 책으로 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즈 뮤지션 마이스 데이비드의 예를 들면서, 마일스가 어렸을 때 단지 세 장의 레코드만을 가졌을 뿐이었다며, 그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장의 레코드을 끊임없이 듣고 듣고 또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마일스 데이비드가 세장이 레코드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밤에는 재즈 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기 위하여 이 클럽저 클럽을 돌아다니며 클럽 난간에 앉아 (그림책 벤의 트럼펫을 한 번 읽어보길), 열심히 클럽안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을 듣는 어린 소년이 떠오르고 낮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라 긴장하며 라디오를 끼고 사는 데이비드가 떠오른다. 난 결코 마일스 데이비드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된것은 단지 세장의 레코드만을 들어서가 아니고, 그끊임없이 다른 음악을 접하기 위하여 찾아 돌아다니는 그의 음악에 대한 내재된 열망과 갈망때문이었을 것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좋아하면서 그 열정을 식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분히 바람둥이 기질을 타고 나야한다는 것이다. 요전에 읽는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나 존 벡스터는 평생 집 안 가득 책을 들여놓는 것도 모자라 최대한 자기들이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임대해서라도 책을 보관하고 팔기도 하는 경우를 읽었는데 그들이 단지 몇 권의 책에 만족하지 못한채 자신들의 지적자극을 충동질하는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물론 즐거워서겠지! 다행이 그 대상이 여자가 아닌 책이라서 다행이지.
아니 저 먼 곳의 사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젠틀 매드니스>의 공저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김연수, 박중서,표정훈은 책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책을 번역했다는 공통점 말고도 그들 모두 만권 클럽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집안에 만권의 책이 있다라고 생각해보라. 짐작컨데 집안에 단 한치의 비어있는 벽이 있을리가 없다. 책으로 도배된 벽만이 집안을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한사람이 일년 아니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몇 권이라고 생각하나. 분명한 것은 난 그들이 단순히 읽지 않을 책을 수집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책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욕망은 책읽기와 책 수집이라는 형태가 계속 될 것이다. 그들이 책을 만권을 다 읽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수 많은 양의 책들의 그들의 지적 활동의 기반임에는 틀림없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은 박학다식한 글로 여러 군데 기고하고, 몇 권의 장편소설로 이제 프로 소설가로 자리 잡은 김연수, 밀도 있고 정확한 번역을 하는 박중서. 이들이 단지 몇 권의 책만을 읽고 분석함으로써 그런 수준 높은 글을 쓸 수나 있었겠나. 꿈깨라!
책을 왜 좋아하는지 그리고 책을 왜 읽는지에 대해 게이치로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지 몇권의 책을 분석함으로써 소설 읽는 법을 익히고 세세한 기술적 측면을 섭렵한다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알더라도 바벨의 탑을 쌓고 싶어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독서방법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이었다.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라고 편안하게 제안하는 그의 기상천외 엽기 발랄한 독서법은 내멋대로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난 그의 독서론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한 무거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끝까지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 명작이라고 흔히 말하는 고전들을 꼭 읽어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남으로써, 책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의 쟝르에 더 폭 넓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방법으로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 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일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 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낙의 독서법은 어떤 책을 중간부터 읽든, 끝까지 읽지 않던, 처음과 끝만 읽던지 그리고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소화불량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타이틀도 내걸리지 않는 일반 독자이긴 하지만 좋은 책과 좋은 문장은 금방 알아 챈다. 그리고 끊임 없이 그 문장과 상황을 머리속에서 되내인다. 마치 알스버그의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말한 은방울소리처럼.
책을 읽는데 있어서 intensive냐 extensive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읽는 것이 중요하다. 건너뛰든 생략하든 재독하든지 그건 독자의 몫이다. 신경쓰지 말아라.난 한권의 책을 교과서처럼 분석하느니 소파에 편안히 앉아 수 백권의 책을 내 멋대로 읽은 것을 선택하겠다. 게이치로 당신은 소설이나 잘 써라. 좋은 글은 재독하고 재독해도 싫증이란 것을 모르고 끊임없이 읽게 마련이다. 독자가 작품의 그 어떤 subtext를 찾아내든,이제 작품은 독자의 관할권 안에 있다 이제 편히 쉬어라. 독자인 내가 해주고 말은 이거다.
ps- 19세기에 묵독의 습관은 어쩔 수 없는 소설의 탄생의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고 본다. 소설 이전의 시와 희곡은 크게 소리내서 읽기 위하여 리듬과 운율에 맞쳐진 쟝르이다. 음유시인들이 수세기동안 떠돌아 다니며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리드미컬하게 운율에 맞춰 거듭 수정하면서 세대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시와 다른 문학의 쟝르(희곡같은 것)란 구전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묵독은 몇 몇 부유한 지식인들의 전용이지 않았나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