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그림 (리커버)
타샤 튜더.해리 데이비스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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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확한 이름은 나타샤 버기스였다. 탸사의 아버지 스탈링 버기스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인 나탸사를 몹시 좋아해서 자신의 갓난 딸에게 나탸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훗날 버기스라는 성의 발음이 맘에 들지 않아 성을 튜더라는 외가쪽 성으로 바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탸샤 튜더로 1938년부터 <호박달빛>이라는 작품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이름은 아마도 영원히 <비밀의 화원>의 삽화가로서 기억될 것이다.

이 책은 타샤의 간략한 생애와 함께 그녀가 평생 그린 삽화그림과 그림책에 대한 것이다. 타샤의 그림 인생이라고 해서 빽빽한 글자를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간략하게 다루는 바람에 그녀의 평범하지 않았던 어린시절과 순탄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의 고통과 충격에 대해서는 튜더 자신과 작가 모두  두리뭉실 넘어가고 있다. 그녀는 어린시절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초상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세계를 접하게 된다. 미뤄 짐작컨데, 모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어린 시절,  그녀에게 그림 그리기야말로 가장 큰 소일거리이자 위안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불행을 거의 떠올리지 않았고, 놀고 먹는 남편을 위해 자신이 전적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결혼 생활조차 감내하고 이혼 한 후에도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에 대한 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성격이 대담한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여유가 생긴 것인지)

죽는 날까지도 1830년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한 그녀의 삶과 일상은 소박하고 철저히 자급자족의 노동중심적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출동 !삶의 현장>같은 프로그램에서 며칠 동안만 체험해보라고 한다면 경험 삼아 며칠 살아보겠지만, 세탁기가 다 해준 빨래도 너는 것, 개는 것도 귀찮아하는 나에게 평생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군소리도 없이 노(NO) 땡스다.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을 절대 선망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그림이  가져다 주는 푸근함, 안락함, 오밀조밀함은 퍽퍽하고 건조한 일상을 따스하고 밝은 기운으로 스며들게 해주는 것은 그녀의 라이프스탈 덕분이리라.

처음 그녀를 접한 것은 <탸사의 정원>이란 작품이었다.  작가의 탸사에 대한 애정과 타샤의 소박한 자연주의 삶이 끌려,  그녀의 그림책을 구입했었는데, 생각보다 색감이 어두워 그렇게 인상적인 그림책 작가는 아니었다.




<일년 열두달>이라는 그녀의 초기그림책은 전체적으로 색채가 칙칙하고 어둡다. 마치 어두운 조명에서 그린 듯한 느낌이 들어 그림 속의 아이들의 활달하고 밝은 분위기가 색감때문에 많이 죽어 버린 작품이라는 인상을 남겨 더 이상 그녀의 그림책은 구입하지 않았는데, 이 <타샤의 그림인생>이라는 작품은  내 속에 잠재해있던  그런 인상을 단 한번에 날려버린 책이었다. 그녀의 초기 작품부터 거슬러 올라가 후기 작품까지 다 보여준 이 책은 그녀의 연대기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색이 풍성하고 꽉 차 있는 듯한 화려함과 동시에 그림의 불필요한 요소를 뺄 것은 뺀 대담한 방식으로도 그림이 더 발전되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색이 뭐 대수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림책에서 워낙 색감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서, 나이가 들수록 색에 대한 그녀의 변화 과정은 눈요기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색이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한다는 것이 좀 그렇지만 영화감독 팀 버튼은 초기영화(비틀쥬스나 가위손)에서 보여준 풍부하고 라인적인 색은 지금 영화에서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진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뭐랄까, 이젠 그의 영화에서 무엇인가가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고 할까나.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런 반면에 타샤 튜더의 후기 그림책에서 더 활발하고 활동적인 색을 보면서, 그녀만의 작은 예술이 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이 책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명의 그림책 작가의 그림이 어떤 식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충분히 감지 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써 놓고 보니 우습긴 한데, 탸사와 팀 버튼을 비교 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만 며칠 전에 팀 버튼의 영화를 보면서 그의 영화에서 색이 사라졌다는(잃어버린) 느낌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애 키우느냐고 한 십년 영화 제대로 못 봤는데.... 완죤 그의 색이 살아있던 영화보다가 세련되었지만 블루톤의 영상만으로 채워진 것은 못내 아쉬웠다는........(한마디로 그날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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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사람들만 사는 나라 중국환상동화 1
홍병원 지음, 김성민 그림 / 비룡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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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아들애가 학교 끝나고 황급히 집에 들어와  신발주머니를 팽하니 내팽겨치며, "엄마,엄마!"하고 다급하게 부르길래, "오냐,오냐 왜? " 하고 장단에 맞쳐 장난스럽게 물으니, "엄마, 나 진짜 재밌는 책 발견했다. 엄마, 나 그 책 사죠, 응!"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핫(hot)!, 아니 이이이이..무슨...오늘 해가 서쪽에서 떳니!

사실 내가 이런 식의 놀라운 반응을 보인 것은 우리 아들애가 리모콘과 베개는 벗삼아도 결코 책을 벗 삼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림책 좋아하는 엄마인 내가 읽어주면 읽어주는가보다하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엄마 나 이 책 사죠라든가 이러이러한 책 도서관에서 빌려줘라는, 어릴 때부터 책 좋아하는 아이들의 전형적인 열정과 반응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책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더군다나 나이 들어 때 되면 알아서 읽겠지 싶어 그렇게 아이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지 않는데다가 , 아이가 좋아할만한 책들, 예를 들어 와이시리즈라든가 도라에몽, 케로로같은 만화책 또는 학습 만화책들을 알아서 구비해 놓은 탓에, 무슨 무슨 책을 사달라고는 하지 않더라구요.

책 좋아하는 아이들에 비하며 턱 없이 모자란 아이의 독서량을 가늠해보면,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실망뿐이지만 어떻하겠어요! 본인이 그렇게 책 읽는 것을 내켜하지 않을 것을..... 유아때부터 지금까지도 읽어주는 책 듣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 책을 많이 읽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지금 3학년인데, 수학문제집도 난이도가 높은 문장제는 안 읽고 패스하는 애한테 으이구, 내가 바랄 것을 바래야지 싶어, 책 읽어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고 그런가보다하고 내깔려두고 있었는데, 지난 주에 무슨 바람이 불어(아마도 학급에서 붐이 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호들갑을 떨며서 책을 사달라고 한 책이, 중국의 고전 <요재지이>를 비룡소에서 어린이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도록 동화책으로 편찬한  <못생긴 사람들만 사는 나라>라는 바로 이 책이더라구요.

그러지 않아도 그 날 아침에 나귀님의 중국의 고전 <요재지이>를 언급한 페이퍼를 읽던 터라, 호기심의 물이 올라 주문해 받아 읽어봤는데, 끔찍한 이야기가 다수이지만 탸샤 튜터가 말한 아이들에게는 그런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즐거운 죄악"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아들애랑 주말동안 같이 읽었는데, 아들애는 주말 내내 이 책에서 손을 놓지 않더라구요. 여하튼 자기딴에는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가 재밌고 신기한가봐요. 덩달아  7살난 딸애는 이 책에서 <웃다가 떨어져 나간 목>이라는 에피소드 그림의 잔혹한 부분이 놀랬기도하고 신기했던지 흥분해서는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이면지에다 "179"라고 써서 메모판에다 붙여놓을 정도로 이 책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답니다.

검색해보니 중국의 고전 포송령이 쓴 <요재지이>를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중국의 환상동화라는 시리즈로 발행했는데, <난쟁이 왕국의 사냥터>,<이리가 물고 온 신발 한 짝>이 후에 더 나왔어요. 이 책처럼 엽기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감동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두루두루 섞여 있으니, 입맛에 맞는 책 골라 읽기를. 그림은 세권 모두 김성민씨가 그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독특한 그림체를 확립한 김성민씨 그림 보는 재미에 읽는 즐거움이 두 배 더 플러스 되었네요. 간혹 아이들에게 뭐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권하냐,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아이들하고 같이 읽고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아담과 이브도 아니고 선악과를 따 먹는 이야기 같은 책 읽는다고 해서 애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읽고 아이가 성장하면서 왜곡되기보다는 어른의 무관심이나 폭력이 아이를 잔인하게 만들지, 이야기가 아이들을 악의적인 세계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고 봐요. 그냥 편안하게 즐기심이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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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자바 정글 웅진 세계그림책 23
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 조은수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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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The Jungle

작은 애는 스타이그의 <자바자바 정글>이 눈에 띄기만 하면 하루에도 서나차례라도 상관없이, 엄마인 내게 가볍게 재생버튼 누르듯, 읽어달라고 가져온다.  아이들 그림책이나 동화라는 게 보통 단순해서 선악의 결말이 뚜렷하고 왜, 무슨 이유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 되는지, 이야기 구조가 안 봐도 뻔한 비디오인데 반하면,  <자바자바 정글>의 이야기 전개는 명확하지 않고 불투명하며 시작도 끝도 없다. 읽어 줄 때마다 밑빠진 이야기 속에서 갇힌 느낌이 들고, 이야기란 정글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아리송한 기분이 들다고나 할까나.

스타이그가 이 책에서 노리는 것이 아니 바라는 것이 바로 어린 독자가 이야기의 정글에서 신나게 헤매며 모험을 하는 것, 그러한 효과이겠지만, 솔직히 난 지루하고 따분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줘 미치고 팔딱 뛸 만큼) 짜증나 죽을 지경이다. 어른인 나에겐 별 의미없어 보이는 밑빠진 이야기를 읽어주며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모험과 흥분으로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인 난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아이들은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어떤 요소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짜릿한 흥분을 불러오는 것일까?  이야기 형식 자체가 정글이라는 것 때문에! 아니면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순한 모험이야기 일 뿐이다.주인공 소년이 왜 정글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부모님이 왜 병 속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정글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지, 원인은 커녕 엔딩이 없는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이들은 그림 속의 주인공과 함께 엔딩없는 상상의 모험 세계로 떠나는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순진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한켠에는 잔인하고 비틀어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뭐  어떠한 악의를 가지고 좋아한다기보다는 1+1= 2라는 누구나 다 아는 답이 아닌, 좀 더 색다르고 일반적인 개념을 초월한 공식을 좋아한다고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 정도면 스타이그 노인네가 부럽다라는 생각이 든다. 난 이야기의 핵심도 캐치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데, 어떻게 스타이거는 이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펼쳐 보이고 성인이 되면 잃어버리는 그리고 잊혀진 어린 시절의 마음을 간직한 채 아이들이 환호하는 이야기를 쑤욱 내밀 수 있는 것인지. 난 그가 풀어낸 이야기 앞에서 주섬주섬 들어갈까말까 망설이건만, 아이들은 과감하게 이야기의 속으로 들어가 그들만의  모험의 시간을 만들고 열광한다. 스타이그의 아부라카다부라 할까나.

<자바자바 정글>은 확실히  아이들 그림책 치고 실험적이고 모호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비유나 맞추자고 쓴 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스타이거가 아이들의 세계에 눈을 맞추었다는 침 발린 말은 하지 않겠다. 그는 아이들에게 끌려다닌다기보다는 아이들을 끌고 가는 그림책분야의 피리부는 사나이니깐.  어른들은 재미 없을 지 몰라도, 스타이거의 세계는 아이들이 선악과를 따 먹으며 스타이거의 피리 소리 쫑긋 귀 기울이며 춤 추는 곳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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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8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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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스티븐킹의 편집장인 Chuck Verrill 이 쓴  듀마키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Duma Key: Where it all began)에 따르면, 2006년 봄에 킹이 그에게  <리시 이야기>가 결혼이야기라면, 듀마 키라고 이름 붙인 차기작은 이혼 이야기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하고 나서, 얼마 뒤  낯익은 주소의 메인에서 온 작은 소포를 받았다. 그 소포에는  작은 꾸러미가 있었고,  미네소타를 배경으로 이혼 이야기인 Memory라는 단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Memory는 Tin House라는 단편집에 실려 출간되었고, 킹은 그 때 막 Duma key의 초고를 완성한 시기였다. 분명한 것은 Duma key의 주인공 Edgar Freemantle 는 단편소설 Memory의 화자와 동일인물이고, 미네소타에서 플로리다로 배경을 바꿜을 뿐, 이혼 이야기를 좀 더 복잡하고 낯선 그리고 끔찍하게 풀어나갔다는 것이다. http://www.amazon.com/Duma-Key-Novel-Stephen-King/dp/1416552510/ref=pd_bbs_2?ie=UTF8&s=books&qid=1220487929&sr=8-2 에 들어가면 Memory와 Duma key의 두 텍스트 비교가  잠깐 나온다.  참고하시길.

사실 나는 킹이 작품을 출간될 때 마다, 묘한 갈등을 겪는다.  그의 악령이 출몰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읽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고 말이다. 언젠가 그의 <데스퍼레이트>를 읽다가 심리적인 공포감을 견뎌내지 못해 읽다가 중간에 내려 놓고, 다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지만, 그의 작품이 영화화 되고, 원작인 그의 작품이 신화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면 내 안에 꿈틀대는 호기심의 촉수가 다시 그의 작품에 뻗치는 것을 꺽지 못한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에는 얼치기 섹스씬도 마약씬도 없어 미국 작가들 중에서 그의 작품은 비교적 접근하기가 편하다는 심리적인 요인도 무시한지 못했다.(그렇다. 난 아무리 필수불가결한 장면이라도 과도한 섹스씬과 마약씬 나오면 확 던져버린다.) 

여하튼, <Duma key>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완만하게 정상적으로 잘 나가다가도 갑작스레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오는, 어른들의 모험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스푸키타임을 이제는 인정하고 즐기자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받아 들이기 쉽지 않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인 스푸키 문화를 인정해야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해해야지만 그의 작품의 진가와 솔솔한 재미를 알 수 있으니깐. 미국의 스푸키 문화에 대한 사랑은 할로윈 축제에서 잘 알 수 있지만, 사실  미국의 스푸키문화는 타문화권인 우리들에게 참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스푸키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과 는 달리, 미국인들은 스푸키를 할로윈 같은 축제의 장을 만들고 심지어 어린이그림책에서 모리스 센닥조차 스푸키스러우니, 그들에게 스푸키적 상상력은 호러를 괴기스럽게 또는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점수를 주어야 마땅한 지도 모르겠다. 비과학적 상상력이라며  리처드 도킨스나 마이클 셔머같은 과학자들은 펄쩍펄쩍 뛰겠지만. 

빌 브라이슨이 <나를 부르는 숲>에서 테네시주의 교과선택에서 진화론을 빼고 창조론으로 채택했다는 이유로 테네시주를 지나치면서 경멸했듯이, 국민의 40% 이상이 신의 존재를 믿는 나라에서 악령의 존재는 당연하고 인간과  악령과의 대결과 모험은 상상력의 한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소재중 하나 일 것이다. 킹의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아닐까.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했으니 이 작품이 재미있었냐고 물어본다면, 별 세개밖에 주지 못하겠다. 예전의 킹이 다시 돌아왔다고들 하지만 글쎄, 내 생각에는 화려한 젊은 날의 왕은 사라지고 노쇠한 왕이 무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킹의 글솜씨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유혹하는 글쓰기>의  머릿말에서 "나 같은 얼치기도 나름대로 문장에 대해 고민하다. 그리고 종이 위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솜씨를 향상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p11)고 하질 않나.

이 책의 주인공 에드가는 교통사고로 한 쪽 팔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버린다. 육체적 고통과 함께 이혼으로 인한 감정적 추스림을 그럴싸하게 진지하게 성찰하기보다는(이 무슨 망할 놈의 순수문학적 지향!) 호러문학의 제왕답게 악령과의 대결로 풀어나간다. 순수문학이었다면, 아마도 자기혐오내지 자기 변명으로 , 자기성찰이라는 포장하에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방의 탓으로 해결하겠지만. 킹은 에드가의 이혼과 장애로 움푹 패인 감정의 골을 악령과의 한판 대결로 자기 회복의 최고 기회로 만든다.

하지만 처음 유연하게 흐르는 듯하던 이야기가  갑자기 뒷부분에 치닿을 수록 제법 스케일이 큰 모험이야기로 끝을 맺지만 뭔가 뒷심이 부족하다.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러닝타임에 맞쳐 끝내는 영화 같았고 이 전 작품에서 문장 한줄 한줄에서 보여준 심리적 공포감이나 오싹함은 느끼지 못했다. 한편의 그러저럭 잘 된 드라마 같았다고 할까.

이렇게 킹의 작품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외면할 의도는 아니다. 난 어쩌면 계속해서 그의 이전 작품을 사고 차기작이 나오더라도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읽을 것이다. 단지 그가 젊었을 때의 뿜어 내는 광기어린 작품을 나이 든 킹이 한번 더 써 주길 원할 뿐이다.

킹의 홈피 : http://www.stephenk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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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서평단 알림
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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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작품으로, 그것도 첫 작품이 메가톤급(말 그대로 메가톤급  베스트셀러로 등급한 후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의 위력을 가졌던 작가가  처녀작 이후, 더 이상 작품을  내 놓지 않거나은둔하는 사례(출간하더라고 한 두 작품을 내고는 사라지는)를 종종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사이코패스을 연구할 때마다 빠지고 않고 논쟁과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호밀밭의 파수꾼>의 JD 샐린저가 그렇고  백인 여자 아이의 시선으로 인종문제를 이야기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이 따스함으로 가득 찬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를 들 수 있다. 

이 두 작가를 접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는 의구심은, 차기작이 나와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단 한 작품으로 만족한 채,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각 각의 작품을 통해 두 작가들의 글쓰기를 가늠해 보건데, 다음작도 거뜬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있는 기량과 역량은 충분한데 말이다.  우연히  정열을 불 태우며 쓴 첫 작품의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성공에 놀라, 첫 작품을 능가할 만한 작품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간파해서!  설마하니, 그렇게 용기가 없을려고. 애시당초 그렇다면 작가가 될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개인적인 ,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혹 첫 작품으로  금전적인 성공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대신 작가적 상상력(판타지)을 빼앗아간, 악마적인 계약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내가  작가라고 가정하고, 누군가로부터 첫 작품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해주는 대신 너의 판타지를 달라던가  비록 첫 작품은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너의 작가적 상상력은 작품을 쓸 때마다  나아진다는 조건 중에서 어느 것을 택일하겠냐고 물어 본다면, 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까. 물론 스티븐 킹같이 매 작품마다 베스트 셀러에 돈을 벌어준다면야 낼름 킹같은 조건을 택하겠지만. 혼잣말이지만, 첫 작품이 출간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그 이후에는 클래식으로 남는다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너 나을지도. 불후의 명작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후대에게 남겨지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  절필은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첫 작품의 성공이 오히려 금전적인 부담의 해방보다는 차기작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온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차기작이 첫 작품만큼이나 독자의 기대와 충족에 부응해야 한다는 작품의 질적 부담은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공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꼭대기에 서 있다가 고공행진은 커녕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다는 불안과 초조함은 성공작가의 영원한 딜레마 아니겠는가.

13년 전 <심플 플랜>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스콧 스미스는  13년 동안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에이젼시들은 얼마나 똥줄이 탔을까나!)  아마도 그의 두번째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들은 그가 샐린저나 하퍼 리의 전철을 밟아가는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콧 스미스의 존재가 거의 사라질 쯤해서 그가 호러 소설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의 작품을 기다리던 독자들은 열광했고 스티븐 킹은 스콧 스미스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스콧 스미스의 새 소설이 올 여름에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주말데이트에서 한 두시간 늦게 돌아왔을 때의 느꼈던 복합적인 마음 즉  안도감(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와서 하느님 감사합니다)과  늦게 들어오는 것에 분노와 초조함(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으로 마음이 뒤범벅이었던 그런 심정이었다 When I heard that Scott Smith was publishing a new novel this summer, I felt the way I did when my kids came in an hour or two late from their weekend dates: a combination of welcoming relief (thank God you're back) mingled with exasperation and anger (where the hell have you been?). 

이렇듯 그의 두 번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는 열광적(아마존에서 살펴본 바로는 출간 일년도 안되서 그의 작품에 무려 리뷰가 947개가 올라왔다)이었지만 독자의 충족감은 별 세개로 그치고 말았다. 첫 작품과 비교해서, 작품의 질적 수준은 전 작품만  못 하다는 것이 대다수 였던 것이다. 요즘처럼 즉각적으로 인터넷에서 자신의 작품 평가를 알 수 있는 시대에, 그의 작품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그의 세번째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알 수 없지만, 첫 작품의 성공이 작가들에게는 그렇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차라리 잭팟을 터트리는 것이 낫지.  

여하튼 <심플 플랜>이후 13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내 놓은 스콧 스미스의 <폐허>는 그리 만족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멕시코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난 네명의 미국인과 한명의 독일인 그리고 그리스인이 단 하루의 오지여행을 꿈꾸며 떠난 곳이 바로 그들의 무덤으로 변하는, 극한의 생존 이야기임데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문장의 긴박감과 긴장감은 나의 오금을 저리지 못했고, 사건 없는 서스펜스, 느슷한 이야기 전개와 실체를 알 수 있는 공포, 기복이 없는 나열식의 플롯, 치밀하지 못한 각 등장 인물의 심리묘사 그리고 힘 없는 no hero는 마치 국 국물에 밥 말아 먹다가  밥이 국물을 다 빨아들여 억지로 깔깔한 밥을 먹는 기분 같았다. 13년의 공백을 채우기에 급급한 혹은 급조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심플 플랜>을 읽어보지 않아 그의 역량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글쓰기가 호러물에 적합하지 않던가  숱하게 본 괴물영화의 하나에서 상상력을 덧붙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이 비슷한 소재를 본 적이 있는데....) 적어도 킹도 문학적으는 콘래드의 <어둠의 속>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

그의 세번째 작품은 긴 공백 기간 없이 첫 작품만큼이나 기발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이길 바란다. 그게 작가의 의무고 독자의  바램이다. (혹 충격으로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ps- 셀린저는 두번째 작품이 출간되었단 사실을 며칠 전에야 위키피디아에서 우연히 검색하다가 알았다. 두번째 작품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첫 작품의 위력을 담을 작품을 더 이상 쓰지 못할 것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그에게 악령처럼 씌인 것은 아닌지.(0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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