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믿지 마! 8세에서 88세까지 읽는 철학 동화 시리즈 1
데이비드 허친스 지음, 신동희 옮김, 바비 곰버트 그림, 박영욱 / 바다어린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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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섯명의 네안데르탈인인 웅가, 붕가, 우기, 트레볼 그리고 부기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알려주는 어린이 철학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나온 철학책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읽기 쉽고,  어느 정도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라면 받아들이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게다가 책 내용은 어른인 우리들에게도 유효하고 유용해서,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겁내거나 어질어질하셨던 분들은 이 한권의 책으로 아이들에게 심오한 세상의 이치를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드~듯 할 것이다. 

동굴 속에서만 살고 있는 이들 네안데르탈인들은  자신들의 동굴의 뒷벽에 비쳐진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뿐이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발자욱도 동굴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세상은 동굴 속의 그림자를 통해 이해하는 세상일 뿐이다. 어느 날, 부기는  "우리는 동굴안에 있는 것 밖에 못 본다! 우리가 진짜를 못 보고 있으면 어떡할래?" 라고 주변의 친구들에게 말하자, 그는 친구들의 비웃음과 비난을 한 몸에 받고 동굴 밖 세상으로 쫓겨 난다. 자, 이제 세상을 나온 부기. 푸른 하늘과 초목으로 울창한 대지와 그 땅 위에 있는 다양한 생물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동굴 뒷벽에 본 그림자는 진짜 아름다운 모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동굴밖에서 나와 처음 세상의 사물들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하고 잠시 생각해봤다. 부들부들 떨리는 가슴하며 진정되지 않는 흥분감, 흑의 세상에서 색색까지 아름다운 세상을 처음 본다면, 진실로 oh,what a wonderful world!라고 하지 않을까나.)

그래서 부기는 여기저기 어슬렁저슬렁 돌아다니다가, 한 현자를 만나고 왜 그들이 동굴 속에서 살게 된는지에 대한 연유를 듣게 된다. 아주 옛날, 막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고 45분이 흘러(44p)(흐흐흐, 작가의 유머감각) 큰 종족을 이루며 살게 된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한 부족의 장로가 망루에 올라가  "우리 주위의 지형을 잘 알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도 알게 될걸세" 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부족들은 망루에 올라가 자신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지만 서로 다른 지형탓으로 한 부족은 농사에 관련된 것을, 다른 부족은 사냥에 관련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싸움이 나게 된다. 그 싸움으로 부족사람들을 동굴속으로 숨어 들어가 살게 된 것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네안데르탈인인 부기는 그 두 부족의 망루에 올라가 왜 그들 부족들이 의견차이가 생겨난 것인지 알게 되고 "우리는 정말 조금밖에 못 보는구나" "모두 함께 큰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설득시켜 세상에 다시 나오게금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 부기는 "걷고 또 걸어 드디아 자신이 살던 동굴 입구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서로간의 이해부족이 낳은 결과였던 것이다. 편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거울 속에 비쳐진 모습만을 봐서 생겨난 것이다. 거울 저편 너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체(아니 인정하지 않은 체) 거울 속 이미지에만 집착해서  세상을, 사물을, 주변을 이해하려고 한 탓이다. 세상의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열린 마음으로 깊게 생각한 다음에 그 상황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각 개인의 마음 속에 편견이나 편협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짥은 글(8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이지만 읽고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거짓의 막을 걷어내고 진실을 찾아 낼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책들이, 내가 들은 음악들이, 내가 본 영화들은 과연 세상의 진실을 이야기 했던가. 집단으로 무리지어 자신들만이 진실이라고 목청껏 떠들어대는 구호를 진짜 진실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이 책, 그 어떤 두껍고 현학적이고 가식적인 철학책보다도 생각의 힘이 가득 들어 있다. 아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학전공자들에게는 우스운 책일지 몰라도,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바로 보는 진리가 들어 있는 책이다.

* 난 이 책이 두께에 비하면 비싸다고 생각해 별하나 뺏는데....아마존 가서 보니 19달러가 넘는다. 허걱. 내가 알기론 일반 소설책도 이렇게 비싸게 책정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순간 입안의 혀가 삐죽 나왔다.  

** 그리고 이 책 삽화가 무척이나 괜찮다. 진짜 유머스러움. 원시인들의 표정을 잘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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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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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인가,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막 극장 개봉을 앞 둘 무렵에, 신랑이 읽을거리가 뭐 없나 싶어 책장을 쭈욱 훑어보더니,

신랑, "어라, 이거 윌 스미스 영화제목 아니야."

나,    시큰둥하게 "맞아"

신랑, "이게 원작이냐?"

나,    또 시큰둥하게 "응"

신랑, "읽었니, 재밌어?"

나,    좀 겸연쩍어서 "아니, 아직!"

신랑, (사다 놓기만 하고 왜 안 읽는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이 책이나 읽어볼까나"

나,   "웬일로!"

그날 저녁, 신랑 소파에 기대어 이 책 다 읽고 나서는, 나한테 휙 집어던지며 하는말. "뭐야, 재미 없잖아." 

평소에도 공포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이 재밌을 리가 없다. 게다가 1954년 작품이니 반세기도 더 지난 책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50년동안 글쓰기의 트랜드도 변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는 더욱더 영상적으로 변했고 영악해졌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정서가 담겨져 있지 않는 한, 반세기전에 출가된 작품을 재밌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스티븐 킹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리고 윌 스미스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 책에 어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에 재미를 못 본  신랑의 말 한마디가 아무래도 내 머리속에 눌러 붙어 있었나보다. 한동안 이 책 잊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얼마나 재미없길래 신랑 입에서 그렇게 볼멘 소리가 나오나 싶어 읽었다. 하.지.만. 난 이 책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누구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신세타령도 없다. 조잡스럽지 않는 심리묘사나 건조함이 로버트 네빌의 고립된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서른 여섯살, 평범한 인상의 영국계 독일인. 단호해 보이는 입과 밝은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로버트 네빌. 네빌은 자신의 집을 견고한 무기로 삼아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는 왜 살아서 자신을 좀비로부터 지켜야 했을까. 그의 고립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그런 고립하고는 다르다. 무인도의 고립은 적어도 자신이 언젠가는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끈이라도 있지만, 네빌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의 집 주변에는 실존적 존재인 좀비가 밤마다 그의 피를 갈구하며 맴 돌고 있고, 그는 밤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고립. 그는 왜 살아남아, 좀비와 대응해야 했을까. 어차피 좀비를 없앴다고 해도, 이 지구상에 생존자는 네빌뿐인데.  같은 뜻을 가진 반란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인류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한 때 푸른 지구 위에서 존재했던, 먼 옛날의 이야기일뿐텐데. 그의 생존은 부질없고 희망없는 존재의 의의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말이다. 내가 만약 네빌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면, 나의 최후의 선택은 아마 좀비라는 유형의 공포로 인해 미쳐버리거나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산들 뭐해.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아둥바둥 살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들이나 치우고 기껏해야 도서관에서 좀비관련 서적을 가져와 책을 읽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자신의 삶을 엿가락처럼 길게 들여봐야 죽을 때까지 혼자 인걸. 자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외로움이나 고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데, 네빌은 왜 끝까지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 고통스러운 외로움(개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네빌을 떠올릴 때면 그의 외로움이 얼마나 크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과 공포속에서 그가 사는 이유는.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네빌이 정말로 두려워 한것은 죽음도 공포도 아닌, 좀비가 되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신인류 좀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네빌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221p).  

이 땅위에서 그가 원하는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좀비의 형태가 아닌. 그는 강하게 다수가 되길 거부하면서까지 자신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칠 수 없고 자살을 할 수 없었으리라.  마지막 장면은 나의 하나의 사고와 하나의 감정이 교차하여 일치점을 만들어 냈다. 그래, 네빌 당신의 죽음은 이제 전설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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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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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 고지식 한 사람이구나. 한 여자를 서로 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의 지속적인 친구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요즘 말로 이런 걸 쿨한 관계라고 하는 건가. 21세기에, 도덕적이라는것이 고지식하고 가식적으로 받아들여 지다고 해도 내 눈에는 클라이브, 버논 그리고 몰리의 본능에 솔직한 삶이 더 속물로 보이는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십계명처럼 따박따박 맞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그녀의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륜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뒤에 남겨진,버림받은 자의 불행을 나몰라라하고 떠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도덕성이나 윤리성은 그렇게 비난받아야하는 위선적인 행동일까. 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결국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데. 도덕적이다라고하면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나 연상할 정도로 거북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사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편집국장인 버논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여장복장 드래그 사진을 신문 1면에 실어 가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꺽으려고 한다. 버넌 자신이 혼외정사와 불륜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 가머니의 은밀한 혼외정사와  혼외정사 상대인 몰리와의 유희의 산물인 드래그 사진을 갖고 가머니의 총리 진출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는, 그와 친한 친구인 작곡가 클라이브와 충돌을 빚는다. 가머니의 사생활인만큼 정치적 의도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는 클라이브와 그 한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 뚜렷히 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려는 버넌과의 갈등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격렬한  대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이브 또한 버넌의 비도덕성에 제동을 건 만큼의 인물됨됨이가 안 된다는 것. 새천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간 산에서 간강의 위험성에 있는 여성을 모른체 했던 것. 이래나 저래나 서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면서 비난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전에 읽은  선현경과 이우일의 <303일의 신혼여행>에서 " 이 곳을 왜 지구의 종말과 비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에서 동심을 그리는 운하을 보고 '지옥의 바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카뮈의 전락도 이해가 갈 만 했다. 썩고 있는 도시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고, 언제 썩을 지 모르느 도시의 건물들이 물 위에 떠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암스테르담(266)"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곳. 현대파 소돔과 고모라. 이안 맥큐언의 암스테르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모든 금기가 해제 된 천국 같은 곳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뭘? 클라이브와 버넌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안락사가 인정된 암스테르담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만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암스테르담의 합리적 법체계가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해주고, 도덕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은 구원받을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을텐데.

도덕인 윤리니 뭐 고리타분한 사회적 규약을 지킨다고 시대에 뒤쳐지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욕망을 다스리면 타인에게 상처나 불행은 주지 않으니깐.

이 작품이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의 가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부커상보다는 부케정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흡입력도 있고 문장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 같은데,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클라이브의 작곡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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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망가 대왕 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이은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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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투니버스에서 <아즈망가 대왕> 애니를 방영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변태선생이 나오는 장면부터 보는 바람에 <아즈망가 대왕>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구김 또는 아주아주 흐림이었다. 애들 보는 만화에 뭐, 저런 변태가 나와서 주접거리냐.. 싶은게 나의,  <아즈망가 대왕>에 대한 첫인상이었다고나 할까나.  그 이후로 아즈망가 애니에 별로 정이 안갔고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몰랐다. 진짜 그 이유를 그 때는 정말이지 몰랐다. 끽해야 풋풋한  여고생들이 나와 설쳐대는 것이 그냥 좋아서겠지하는 성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이 작가의 요츠바랑을 읽었는데, 오우, 재밌는 거라. <아즈망가 대왕>처럼 뒤집어질 정도로 웃기는 것은 아니었는데, 요츠바의 유쾌, 경쾌, 명랑의 허무맹랑함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 작가의 출세작이라는 <아즈망가 대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설마설마하는 마음을 접고 구입해서 읽다가 웃느냐고 뒤집어져 버렸다. 그것도 애들 앞에서.

읽고 있던 책이 좀 버거워서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아즈망가 대왕> 집어들고 애들 앞에서 읽다가 치요와 토모 그리고 오사카때문에 자지러지게 웃으니깐, 옆에 있던 우리 아들 신기한 표정으로" 엄마, 이 책이 그렇게 재밌어. 어디,어디가 그렇게 웃기는데."  아들의 질문에 거실 바닥에서 배깔고 웃느냐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 웃고 상황을 수습하려니깐 아이들 앞에서 민망하더라.  아닌게 아니라, 아들애가 나이가 어려서 이렇게 슬쩍 지나갔지, 초고학년만 이었다면, 만화책 보고 웃는 어미보고 가만 두겠어.치요, 토모 다 너희들 때문이야! 치요, 토모 다 너희들 때문이야! 

좀 맹한 모자란 구석이 있는 네컷의 만화지만, 작가의 건강하고 엉뚱한 유머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일본 소설속의 여고생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온다 리쿠의 여고생은 신비하고 야마다 에이미의 여고생은 요부같은. 그래서 거리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 그런데 그러면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아. 여고시절에는 동성끼리의 집단 어울림은 따분한 학교 생활에 활력소 같은 거 아니겠는가. 재잘거림과 별 것 아닌 것에 대한 감정적인 호들갑과 유치함등. <아따맘마>의 아리나 <아즈망가 대왕>의 치요, 토모, 오사카등과 접하면서, 역시 우리와 똑같은 여고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고생들의 천진난만한 낙천성, 집단과의 어울림, 그 속에 갖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쌓아가는, 사회에 나가기 전의 편안함속의 갈등 같은 것.

잠시마나 여고생들의 건강한 세계를 엿 볼 수 있는 것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한때 내가 경험했던 시절이었고 아직까지는 그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단순한 네컷의 만화의 때늦은 발견에 열광과 기쁨을 느끼고 무한한 애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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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 1
존 케네디 툴르 지음 / 사람과책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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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그가 언급한 작가들과 그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재미난 글빨이 한 몫 단단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언급한 작가들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더라면, 그 책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여하튼 낯익은 이름의 작가들에게 끌려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도서관 사서가 아닌 이상, 그 많은 작가들을 아는 것은 무리. 릭 게코스크가 언급한 작가들중에서 존 케네디 툴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지만 그의 책<바보들의 연합>이라는 책의 발간 비화는 흥미를 끌 만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롱1,2>이라는 제목하에, 번역되었다는 친절한 주가 달려 있어 검색해 보니, 이 책 아직도 팔고 있다. 혹시나 해서 주문해 봤더니, 이틀만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조롱>이 처음 발간한 시기가 1995년인데, 현재 내가 받은 <조롱>의 출판일자도 1995년이더라. 12년전 책.초판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책 상태는 깨끗하다.

이 책의 저자 존 케네디 툴은 1937년 뉴올리언즈에 태어났다. 툴레인 대학을 졸업한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진학한 뒤 헌터 칼리지에서 잠시 강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4년 16살에 <네온 바이블>이라는 장편을 썼을 정도로 글쓰기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편집자에게 보낸 수 많은 글들은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가 <바보들의 연합>이라는 책을 쓴 후, 사이먼 앤 슈스터 출판사의 편집자 로버트 고트리브에게 보냈지만, 결국 출간이 흐지무지 되자, 1969년 3월 26일 그는 황무지에 차를 세워 놓고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이 책을 처음 읽은 편집자 고트리브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몇 몇 등장인물의 형상화가 완벽하며, 배를 쥐도록 즐거운 에피소드가 몇 꼭지 있다. 그렇지만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다. 재미는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작품속에 어떤 핵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라는 말에 릭 게코스키는 "<바보들의 연합>은 미국 남부지방과 현대인의 삶을 뼈저리게 풍자하고 지독히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분명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빠진 것은 없을까?도덕?  절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작품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견지에서 좀 더 일관성을 갖도록 고트리브가 요구하지 않았을까한다. 즉 하나의 사건에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두 사건이 연속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보들의 연합>은 사건에서 사건으로 이동해 나간다.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방식은 하나에사 하나가 유발되는 방식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부조리하다. 이는 이그나티우스의 삶이 자유를 향한 내리막길을 구르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고트리브는 이런 방식이 마땅치 않았겠지만, 작품이 출간된 이래 바로 여기에서 매료된 독자가 수백만명이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한데다가 작가 툴의 어머니인 셀마가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한 집착은 이 책을 강렬하게 읽고 싶다라고 만든 동기였다. 툴의 어머니인 셀마는 아들의 유작을 들고, 
`워커 퍼시를 찾아가다.` 셀마의 첫 행보는 이것이었다. 워커 퍼시는 당시 로율라대학의 교수이자 연작 장편 베스트 셀러의 저자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영화광>이었다. 셀마가 왜 이 사람을 지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쨌든 셀마는 끈덕졌다. 계속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넣고 끝없이 졸랐다. 자신의 죽은 아들이 대단한 장편소설, 미작의 걸작을 썼다고. 그러니 퍼시 선생이 꼭 읽어야한다고. 1976년 어느 날, 셀마는 로욜라 대학에 직접 찾아가 퍼시의 연구실 문 앞에 기대고 앉아, 땟국에 절어 꼬깃꼬깃해진 두툼한 먹지 타자 원고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당장 읽어야 한다고 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다?" 퍼시는 냉담히 물었다. 그때 그는 속으로 "내키지 않은 일을 솜씨 좋게 피해온 역사가 몇 년인데"하고 으쓱해 했다. 그렇지만, 셀마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승강이를 하느니 차라리 원고를 읽어주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일이겠다 싶었다. 퍼시는 원고를 받아들고, 이 전염병균 같은 부인네를 돌려보낸 뒤, 원고를 넘기기 시작했다. .....중략......... 첫 대목을 읽은 후, 불행하게도,그는 계속 원고를 넘겨야 했다. 흥미를 느끼고 글에 빠져들고, 점점 웃음을 터뜨렸다.(131~ 132 p) 

결국 <바보들의 연합>은 툴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끈덕진 구애에 넘어간 퍼시에 위해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 <바보들의 연합>은 풀리처상을 수상하였다.  

흐흐흐, 정말이지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작가의 창작활동에 대한 대답없는 절망감과 자살이라는 마침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끈질긴 집념이런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읽어죠. 제발 읽어죠하면서 말이다. 그래 결국 사서 읽기는 했지만, 쩝.이 책의 주인공 이그니티우스 레일리라는 인물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밥맛없는 캐릭터였다. 물론 재미 없었다는, 비평가들의 구라가 풍선처럼 부풀려진 소설은 아니었다. 단지 이그니티우스의 사회적 고립, 자기식의 해석과 제멋대로인 행동. 이런 것들이 구역질나게 했다. 내가 청춘의 나이도 아니고, 멋진 잘난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나이에 무슨 남자에 대한 아니 캐릭터에 대한 로망이 있겠나. 한마디로 이런 새끼낳고 미역국 먹은 레일리 부인이 불쌍하다고나 할까나. 답답하고 꽉 막힌 인물은 아닌데, 그의 행동과 사고 하나하나가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 너 왜 그렇게 사니? 툴의 이그니티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환멸은 지식인이라는 소위 말하는 책만 읽고 떠들어 대는 행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과장된 인물로 비추어졌다. 뭐 그래도 이런 재수없는 캐릭터 요즘 포스트 모던 이니 해서 환영받겠지만. 난 딱 질색이다. 

소설의 형식이 좀 특이한데, 묘사가 거의 없이 대화체이다. 그래서 흡입력도 있고 빨리 읽힌다. 연극무대를 보는 것처럼 배경은 한정적인데, 장편치고 작품속에 나오는 장소가 몇 안된다. 커다란 사건이 작품에서 절대적인 역활을 하기 보다는 이그니티우스의 우발적인 행동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이 결을 따라 간다고 해야하나. 뭐 그렇다. 책 내용은 나름 재미있었지만 캐릭터는 도저히 매력을 못 느끼겠다 정도. 영화로 왜 안만들어 졌는지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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