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나라의 난쟁이들 베틀북 그림책 92
오치 노리코 지음, 위귀정 옮김, 데쿠네 이쿠 그림 / 베틀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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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베틀북 캘린더 1월을 장식한 것이 다름아닌 이 책 <이불나라의 난쟁이들>의 한 장면이었다. 한 소녀가 새털처럼 가벼운 구름같은 이불 위에서 둥실둥실 떠 다니고 그 주변에 난장이들이 함께 놀고 있는 듯한 장면은 내가 이불에 가지고 있는 따스한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과 같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덜한 나의 어린시절의 일요일 아침 풍경은, 언제나 푹신한 이불 위에서 딩굴거리며 텔레비젼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때는 아침 9시경에 만화영화나 가족 드라마을 해 주곤 했었는데, 엄마가 아침밥을 차리는 동안 우리 삼형제는 이불위에서 만화영화를 봤던 것이다. 하루종일 만화영화를 방영하는 케이블이 그때는 없었던 지라 만화영화를 볼 기회는 평일 오후 6시경 아니면 일요일 아침 시간때뿐이었다. 곤히 자다가도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하여 일어나 이불 위에서 딩굴며 본 어린시절의 그 추억은 지금도 내 기억속에서 따스한 일부분으로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불나라의 난쟁이들>이라는 책제목만으로도 끌렸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체, 지레짐작으로 나처럼 이불 속에서 형제들과 딩굴었던 그런 추억담일까 아니면 혼자 잠잘 때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한 아이의 상상력일까,아니면 이불속 난쟁이들의 역경을 도와준다는 이야기일까하고 혼자 머리속에서 여러 장면을 그리며궁금해 했었다.

 

받아보고 나니, 이불 속의 난쟁이들이 열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뚝딱뚝딱 기구를 만들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눈을 날라 아이의 열을 식혀준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 책의 한장면 한장면을 보면서, 어찌나 유쾌하던지! 

 

난쟁이마을의 축제가 한창이던 때, 소녀가 그들의 발견하고 웃자 난쟁이들은 축제를 접고 소녀를 진찰하고 소녀의 열을 내려주기 위하여 뚝딱뚝딱 기구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걸리버와 소인국을 연상하게 되는데,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밌다. 이 작품을 그린 데쿠네 이쿠는 너무나 진지하게도 만화처럼 여러 컷을 나눠 소녀와 난쟁이들의 얼굴과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컷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아이들 그림책에 이렇게 컷으로 나눠 처음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레이몬드 브릭스처럼 어지럽지도 않다. 컷은 큼직하게 나눠져 아이들이 충분히 한장면 한장면 묘사된 그림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며, 마치 숨은 그림 찾는 기분이랄까나~ 게다가 난쟁이들이 기구를 만들고 이리저리 끼여 맞추는 장면은 얼마나 정교한지. 눈이 즐겁고 가슴이 펑 뚫린다.

 

일상생활속에서 지나쳐버리는, 별 거 아닌 소재를 가지고도 놀라울 만큼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일본 그림책 작가들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우리 나라 작가도 이런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상상력 좀 발휘하면 안될까나. 우리 나라 그림책 작가들은 너무 과거 지향적이다. 물론 옛것을 다시 조명하는 맘, 그 맘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떨때는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냥 아이들이 생활하면서 겪는 친근한 일상이나 사물에서 재미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좋은 그림책 한 권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꿈이 너무 야무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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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드기는 송장벌레 등에 타고 옮겨 다녀요 - 이동공생.도둑기생 공생과 기생 4
키어런 피츠 지음, 김승태 옮김 / 다섯수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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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받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캬아~ 요즘 자연관찰 지식그림책은 요로코롬 잘 나왔구나! 요즘 아이들은 좋은 시대에 태어난거야. 아무렴 복이 터진 거지. 우리 시대때 이런 게 어딨어! 내가 지금  태어나 이런 책으로 공부했다면, 전교 1등했겄다.(사실일까나~)

 

사실 내가 학창시절에 가장 싫어하는 과목들은 대부분이 이과계열이었다.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등. 수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국어나 영어를 잘했냐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이과계열은 도통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학창시절에 배운 과학지식보다 요즘 애 낳고 아이들한테 그림책이나 자연지식그림책 접하고 읽어주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 때는 지식그림책이 이런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전문적인 용어와 글밥이 많다보니 추상적으로 와 닿아서 흥미와 호기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지만, 요즘 쏟아져 나오는 지식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이미지와 실물사진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니 아이들이 혹하지, 싶었다. 우리 아들은 이 책 왔을 때, 책장 들취면서 얼마나 신기해하는지. 엄마, 난 책이 별로야하는 놈이 연신 들여다 볼 정도다. 심지어 어제는 이 책 펼쳐놓고 그림까지 그리고 있으니, 지 딴에도 얼마나 사진이 생생하고 리얼하고 흥미로우면 저렇게 그림까지 그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섯수레에서 이번에 기획,출간된 <진드기는 송장벌레 등에 타고 옮겨 다녀요>는 공생과 기생시리즈중 이동공생과 도둑기생을 다룬 자연지식그림책이다. 다섯수레책들은 단행본겸 전집 비스무리한 이런 시리즈물을 기획해서 내는 출판사 같은데, 이 책이 괜찮아서 나머지 공생과 기생시리즈 다 샀다. 아들애가 아직 이렇게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공부할 단계는 아니지만,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풍부한 지식과 상식을 가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가 배울 때 기생이라야 해봤자 몇 개의 전문용어만 배웠던 것 같은데(특히나 예로 기생충정도), 이 책 찬찬히 아들애랑 훑어보면서 다양하고 세부화한 용어에 놀랬다. 공생만 하더라고 편리공생, 상리공생, 도둑기생으로 나누고 운반동물, 편승동물, 도둑기생동물로 세분화하고 있다.(에구구, 어지러워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식물도 혼자 저 잘났다고 살 수 없는 법. 서로 다른 생물들이 서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을 공생(7p)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사나 이쪽 세계나 살아가는 것은 다 비슷한가보다. 서로간에 도움을 주고 받는 편리 공생, 어느 한쪽만 이익을 챙기는 상리공생, 자기만 알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도둑기생으로 세분화한다. 곳곳에 공생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 공생과 기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이 책만한 책이 없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이 책에 소개된 예로 많은 동물들의 사진은 작가 키어런 피츠의 노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사진이 이 사람의 작품인지 아니면 따로 전문가의 사진을 택일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찾아도 사진작가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키어런 피츠가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책은 저작권의 문제가 있어 사진 작가의 이름은 밝혀야 한다고 알고 있다.) 아이들 자연지식그림책치고 색인(찾아보기)도 갖추고 있고, 출판사가 무지 애쓴 작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지식을 습득할 때, 이렇게 구체적인 사진(일러스트도 아니다)이나 설명으로 이해하기 쉽고, 그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좀 더 전문적으로 다가갈 때, 입문서로 참고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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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의 7일
미우라 시온 지음, 안윤선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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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미우라 시온의 청춘성장소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무척이나 재미읽게 읽어서, 그녀가 쓴 작품이라면 뭐든지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작가의 만남에서도 첫작품이 이래서 중요하다. 첫작품의 강렬한 인상으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게 되니 말이다. 하여간 그녀와의 첫 만남이 기분좋은 만남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후속작품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결과는? 반반이다. 괜찮은 작품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쪽도 있었고.  미우라 시온의 수십편의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작품능력은 아직은 미완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필력이나  이야기의 발상과 전개가 고도의 수준에 다다랐다기보다는 들쑥날쑥이다. 차라리 평작 정도만 되도 괜찮게.

이 참에 한번 따져보자. 일본 작가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히가시노 게이고, 미미여사, 온다 리쿠, 고타로등. 일본 작가들 개인적인 작품 수준의 편차가 심하다. 작품 속에 들어있는 작가 성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정녕 내가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 놀라움과 감탄을 해가면 읽읽은 작품의 작가가 쓴 책 맞아!  라든가, 기대 만땅으로 읽고나서, 이이이...런... 후진 작품도 썼단 말이지! 이런 생각 한두번 드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수준이하의 작품 허다하고 아까운 내 돈 날렸다라는 기분 드는 작품 한두권이 아니란 말이지. 괜히 좋은 작품 먼저 읽어가지고서래.

왜 그럴까?   후기들을 읽고 짐작하건데, 걔네들 시스템은 출판사측에서 이런이런한 글을 써 주십시요라고 부탁을 하면 작가는 그 주제에 맞게, 되는 데로 글을 쓰는 것 같더구만. 작가의 역량이 그 주제에 부합이 안 돼도, 월세 내기에 빠듯한 그네들 살림살이을 위해 보탬이 되는 글이라면 무조건 쓰고 보자라는 주의간 본데. 이러니 독자인 난 작가들의 전체적인 작품 수준을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도 그렇고 그들이 작품 속에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여러가지 스텝으로 여기저기 밟아나가니 독자인 난 따라다니기도 힘들다. 하여간 어렵다 어려워.  

하지만 일본 작가들은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책의 영향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정통적인 이야기 방식을 추구한다는 것. 글쓰기의 실험이나 파괴라는 형식적인 실험은 거의 행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물론 내가 모르는 실험적인 작가들이 있겠지.마루야마 겐지!)  읽기 편하고 흡입력 있있고 이런 방식을 무지 선호하지만, 허구 헌날 이런 책 읽으면 읽는 데 따분할 때가 있어, 외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오호라, 이 책 좀 뭔가 있어 보인다. 미우라 시온의 <로맨스 소설의 7일>이 혹시 형식파괴의 소설일까나. 경직된 머리속에 이런 쟝르 파괴의 소설 좀 넣어줘야지. 한번 정도의 일탈은 각성제 아니겠나. 하.지.만. 기사와 로맨스를 섞어 놓은 듯한, 장르 파괴소설 인줄 알고 구입했다가, 낭패 받다.

로맨스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니다. 언젠가 리뷰어 나귀님이, 이선미의 초기 작품중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 일부분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몇 년이 지난 뒤에나 밝혀지자, 두 장르의 독자는 겹치지 않는가보라고 썼듯이, 로맨스소설은 내게 가까이 하기에는 먼 쟝르이다. 닭살 같은 묘사나 숫처녀에 대한 판타지, 현실과 거리가 먼 운명적인 로맨스를 싫어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에 그닥 끌리지 않아서라나할까나. 여하튼 학창 시절이든 지금 유부녀시절이든 간에 로맨스란 게  나에게는 재미없다. 이 책이 혼합쟝르니 뭐니 하는 그런 문구나 보지 않았다면, 도서관에서나 빌려 봤을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건질만한 책이다. 버진에 대한 판타지도 있고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남자 주인공도 있고,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형식을 갖춘데나 일본소설까지.

두개의 쟝르가 섞여 있는데, 하나는 주인공 아카리가 번역하는 로맨스소설과 또 하나는 주인공 아카리와 연인 칸나의 좌충우돌하는 일상이 담겨진 소설이. 이럴 걸 일석이조하고 하던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죽도 밥도 안 된 소설 같다.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았을 걸하는 아쉬움이 생기고. 로맨스는 넘 짧고 아키리와 칸나의 청춘의 일상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 책 심심풀이 땅콩같은 책이다. 읽고 나서 아무 생각 나지 않는. 작가 후기에 출판사에서 로맨스라는 주제를 의뢰받았는데 "능력도 없는 내가  연애 능력을 쥐어 짜가며 이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왠지 '불타오르는 사랑'과는 먼 내용이 되어 버린듯한 기분이 든" 소설이라고 토로하는데, 내 생각에도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ロマンス小説の七日間 (角川文庫)이 소설의 일본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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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두렵지 않아 우리문고 18
우슈 룬 지음, 신홍민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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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잠깐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엔 온통 빼곡하니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있었고 휘황찬란한 빛을 번쩍이며 밤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난 진짜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늦은 밤조차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 불빛은 우리 집 안방이나 거실사이사이를 넘다들곤 하니 말이다. 희미하던 휘황찬란하던지간에, 24시간 365일 온통 빛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지 진짜 컴컴한, 어둠속에 묻혀 사물조차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컴컴한 어둠과는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었다.

 

어둠속에서 수 많은 각양각색 발하는 빛을 보면서, 만약에 이 모든 불빛이 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면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면 두려울까. 차라리 똑같은 조건하에 있다면 즉, 세상이 암흑을 변해 우리 모두가 암흑 속에서 생활한다면 두려움 따위는 생기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나와 타인 모두가 같은 처지에 속해 있는데 두려울 것이 뭐 있겠는가.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모든 존재와 사물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와 가난한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그리고 정상인과 비정상인등등. 그 간격이, 그 차이가 두려움과 차별을 낳고 극복해 나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나서 성장하면 부모 곁을 떠나 한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에 박혀있다보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아무 탈 없이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어 지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던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족내의 불화와 갈등이 생기게 되고 그 극복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가족해체까지 불러올 수 있고 대부분은 세상과 접촉을 끊고 자기의 울타리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아무탈 없이 잘 자라다가 사고로 장애를 가진 소녀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용기내어 세상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려고 하는 10대 소녀 메를렌의 성장소설이다. 메를렌은 9살에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그 사건은 그녀의 모든 어린 삶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다. 눈이 보이는 않는 그녀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의 부모 또한 그녀를 돌보기 위해 24시간 그녀에게 매달리게 되면서, 메를렌의 가족은 세상과 문을 닫은 채 소극적으로 살게 된다. 주인공과 그 가족이 겪는 충격, 어려움, 갈등을 미화하지 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려냈다. 메를렌을 보호하고 세상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을 주저하는 부모와 메를렌을 세상 밖으로 그리고 그녀의 보호틀을 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디네와 그녀의 오빠 조지가 메를렌의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 장애를 가진 메를렌을 아무런 편견없이 자신의 친구로 받아주는 운디네와 조지와 친하게 지내면서, 메를렌은 서서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스스로 딛고 일어나야 하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감싸고만 들려는 부모님과 의견충돌, 갈등과 화해 그리고 조지와의 사랑이야기이다. 

작가는 장애를 독립적인 시선으로 보며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굳게 깔고 있다. 부모의 곁에서 언제나 보호받고 세상사람들과 단절한 채, 당당히 밖을 나오기를 주저하는 메를렌과 이에 부응하듯이 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 두려운 메를렌의 부모를 통해, 우리 세상이 얼마나 많은 장벽이 놓여져 있는 알 수 있다. 나 같아도 두려울 것이다.(까짓 거, 어둠이 문제야. 세상이 무서운 거지.)  그 심정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법. 언제가는 이 미지의 세계로 나와야하고 소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둠에 익숙해졌듯이, 세상에 나와야 만만치 않는 세상살이도 익숙해지고 이 땅위에 넉넉한 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이런 소설들은 장애를 보는 우리들의 인식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장애를 보는 시선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타인에게 해를 주는 것이 아니며 세상밖으로 나오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당신 삶의 권리이며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사람들뿐이다라고 말이다. 장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전환은 바로 이런 작은 이야기들로부터 시작된 것일 것이다. 판에 박힌 결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인식전환을 돕는 이런 책들의 출간이야말로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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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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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판타스틱 12월호에 실린 온다 리쿠 인터뷰에서 온다 리쿠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면서 문학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로서, 즐기는 쟝르로서의 인식을 기반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고 독자의 시선에 맞추어 서비스 한다는 생각으로, 독자가 즐겁게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고 글을 읽고, 일본문학은 이제 순문학보다는 쟝르문학이 대세고 쟝르문학이 판을 친다는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 삶의 성찰이나 사유가 목적이 아닌, 책을 읽는 목적이 글을 읽는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구나 싶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작가. 뭐 문학을 순수해야된다는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나. 그래봤자, 지루할 뿐이다. 평론가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세계문학의 탑을 차지한 책들. 제목만 유명했지 실제로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나. 끽해야 다이제스트용으로 읽고 읽었다고 떠들어 댄 것이겠지. 서경식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몇 번이나 포기했다고 하질 않나.  순문학의 거창한 문학이론들 이제 그만 떠들라고 해. 이젠 문학도 엔터테이먼트 사업이라고 하잖아. 쟝르 문학의 엔터테인먼트 기능, 그게 아무나 할 수 일이 아니다. 솔직히 글로 남을 즐겁해 해 준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재능이냐고. 한 때 순문학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의 편협한 세계관이 부끄러울 뿐이지 뭐. 그래서 독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일본작가들의 노력 가상하다고 생각한다. 돈 내고 기꺼히 읽어주마

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신간코너에 오츠이치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가 있길래 망설임 없이 집어들고 대출했다. 오츠이치의 <zoo>는 무서웠지만 그 이후에 읽은 <쓸쓸함의 주파수>는 괜찮아서(물론 이 책도 도서관), 이 책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살까말까 좀 망설였다. 워낙 이 책 소개코너에서 천재작가의 탄생을 알린 첫 작품이니 뭐니 해서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으면 빌려 본 후에 구입해도 늦지 않다. 아무리 일본에서 책이 엔터테이먼트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독자를 무슨 바보로 아냐. CSI 수사대가 이 책 읽으면서 웃겨서 배꼽 잡을라. 

17살에 이 책을 썼다고 했는데, 17살이 쓴 티 팍팍 난다. 아마추어 글이다. 이야기의 발상은 독특하다. 그리고 재밌다. 독자를 위해 반전서비스까지. 애쓴 것은 용타. 인정하마. 하지만  전개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일뿐. 비과학적이것도 어느정도야 말이지. 과학적인 설득력 없는 이야기만 풍부할 뿐 작가가 이야기를 가지고 무리해서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소설이 전혀 설득력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 과연 아이들이 놀다가 친구가 죽으면 친구의 죽음을 숨기기에 급급할까 게다가 켄은 시체를 가지고 숨바꼭질까지 하면서 즐기기까지. 아, 물론 소설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내가 우문이라는 것은 안다. 이러한 설정을 가정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말이다. 이건 좀 설득력이 약하지 않나. 두 남매가 사쓰키한테 무슨 치명적인 약점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자 있다가 켄의 여동생 야요이에게 사쓰키가 네 오빠를 좋아한다는 고백했다가 화가가 난 야오이가 사쓰키의 등을 탁 치는 바람에 나무에 떨어져 죽은 것인데, 어린 마음에 그 사실을 숨기고 싶다.......

둘. 과연 죽은 사쓰키를 아이들 둘이 옮길 수 있을까. 못해도 살아있을 때도 몸무게 30kg은 나갈텐데... 죽으면 더 빳빳해져 힘들지 않을까. 솔직히 성인인 나도 쌀 20kg 들어 쌀독에 옮겨 놓을라 치면 허리가 뻐근한데. 12살하고 아홉살짜리가 두 남매가 죽은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들고 옮겨 다닌다는 것이 설득력 no.(그냥 억세게 운 좋은 걸로 치부해!) 

셋, 마지막으로 시체 냄새인데, 그 자연적인 것을 숨길 수 있을까. 동네 양반들이 다 축농증 환자란 말이야. 내가 이 비과학성 때문에 네이버나 다음까지 다 뒤져 봤더니, 결과는 이렇더라. 

1.사체냉각:체온이 점점 떨어져 24시간 후면 주변 온도와 동일하게 됩니다.
2.사체건조:사람이 죽으면 수분 공급이 중단되므로 피부가 건조하게 됩니다.
3.각막혼탁:12시간 전후면 안개가 낀 것처럼되며 24시간이 지나면 현저히 흐려지고 48시간이 지나면 불투명하게 됩니다.
4.시반:통상 1시간 이후부터 저부위(발)에서 부터 적자색으로 나타납니다.
5.사체강직:사람이 죽으면 전신의 근육이 일시 이완되었다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근육이 점차 수축되어 다시 굳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시강이라고도 한다.이는 근육의 수축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에게서 현저하며,노인이나 유아의 경우는 약하게 나타나고 속히 이완된다. 급사체는 지속시간이 길며 대체로 2-4시간에 턱관절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경과하면 어깨-발목-손발가락순으로 진행한다.전신에 미치는 시간은 12시간 정도 걸리나 주위의 온도가 높을 수록 빠르게 진행되며 3-4일 후에는 다시 이완된다. 

이 책의 계절적 배경은 여름막바지. 겨울도 아닌 다음에야 파리가 여기저기 출몰하는 계절에 죽은 시체은 깨끗. 이게 이게 말이나 되냐. 애들이 구더기 득실거리는 시체를 눈 깜짝하지 않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나흘이나 버틴다는 게.  난 CSI에서 구더기 나오는 장면도 비위 상하던데. 나도 어른 장례 몇 번이나 치러본 사람이라, 이런 비과학적인, 설득력없는 비약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아무리 소설이 가능성 있는 이야기의 산물이라지만, 독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켄의 나이가 12살이 아니고 중고등학생이었다면, 그리고 켄의 품성이 냉혹하거나 불량했더라면, (혹 켄이 훗날 <zoo>의 단편 seven rooms의 그 살인마 아닐까하고 엉뚱한 생각이 나더라니깐) 그래, 그 정도면 어린아이 시체 하나쯤이야 옮기기도 쉽지하는 생각이나 들지. 애들 장난에 그냥 속아넘어 간다. 하지만 오츠이치에게 천재라는 수식은  빼 줘라.  다른 작가들보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트릭이 강해 재미가 있을 뿐, 천재까지는 아니다. 자신도 이 수식어에 낯뜨겁겠다. 미국쪽에서는 이 작가 팝노블 작가로 분류하던데.  마지막으로  켄, 넌 타인의 죽음의 그렇게 즐겁다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goth는 기다려지지만, 이번에도 천재 타이틀 붙어있으면 안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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