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도 오래 같이 있으면 싸우게 마련이다. 혈육도 아니고 몇 년 알고 지낸 대학 선배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몇 달간 함께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 두 개와 거실이 있는 집에 방 하나를 내게 줬다. 더욱이 큰방을 내게 줘서 나는 큰 방에서 굴러다니며 자고 글을 쓰고 인터넷을 하고 있다. 그 부분을 감안하고 나를 불러준 후배에게 나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넘게 매우 지친 일을 하고 그것을 종료 하며, 늘 목말랐던 꿈을 다시 한 번 펼쳐보고자 나는 독일로 왔다. 후배의 “언니, 이곳에서 그걸 한번 해 봐요. 석 달간 유럽에서 살아봐요.”라는 말에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늘 길어야 보름 정도 머물다 온 유럽에 석 달이라니. 그 꿈같은 시간이 내게 올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까지 했다. 간혹 소설 후기를 읽을 때마다 스위스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이 후기를 쓰고 있다는 등등의 허세 가득한 그런 일을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랬다. 허세와 허풍으로 지친 나의 그간의 일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독일 생활이었다.

 

 

 

 

그런데, 나도 후배도 우리가 처음 알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엔 그동안 변해 버린 모습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와 내가 서로 연락이 끊겼던 것이 십년이 더 됐다가 다시 만났으니 우리가 그 사이에 얼마나 변해 있었는지 서로 가늠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오래전의 카리스마 작렬했던 (그랬다, 대학 시절에 나는 끝내주는 카리스마로 소주병을 들고 다녔던 무시무시한 선배였다.) 그 모습은 사라지고 사회생활에 찌든 나이 먹는 여자가(차마 늙은 여자라고 쓰고 싶지 않고) 되었고, 후배는 뭔가 선했던 그 고운 결이 없어져 보였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유학 시절이 끝이 나고 간혹 연락을 했고 2년 전부터 후배가 독일에서 한국에 올 때마다 몇 번씩 다시 만나며 그동안 오래 만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후배도 아마 자신의 집으로 나를 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순수했던 대학 때의 그 모습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후배네 집에서 독일에서 사는 것처럼 나도 한번 살아보고자 왔는데, 후배는 자꾸만 혼자 여행을 떠나길 권했다. 사실 그동안 장기 여행은 모두 여행 파트너들이 있었기에 즐겁게, 위험하지 않게 다녀온지라 영어권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혼자 기차를 타러 다닌 다는 것이 겁이 났었다.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던 나를 두고 후배는 계속 혼자 기차를 타고 떠나라고 부추겼다. 그때부터 나는 화가 났었다. 나도 어느 정도 여행도 다녀 본 사람이고, 그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시간도 필요한데 무작정 떠나라고 하니, 나보고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저럴까 화가 났다. 우선 나는 그냥 독일 이 집에서 좀 더 쉬고 싶었다. 하지만 집세를 내지 않고 오로지 식비만 내고 있는 입장으로 잠시 화를 참았다. 후배도 뭔가 훌훌 털고 마음의 위안을 삼으라는 의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갈수록 그 도가 넘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후배는 나와 같이 살기 싫었던 것일까? 그러기엔 참 너무 빠른 시간이 아닌가? 나보다 그녀의 촉이 훨씬 좋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태도도 있었지만 나를 화나게 한 것은 언어였다. 후배는 중국어와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와 두 언어를 모두 자연스럽게 외국인과 얘기를 할 수 있다. 주변에 후배의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올 때면 나는 당연히 벙어리가 된다. 물론 영어권 친구들과 얘기를 할 때면 들리는 문장으로 그들의 얘기를 알 수 있지만 글로 써줘야 해석이 되는 참 답답한 고등교육을 한 나쁜 예가 바로 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이 비루한 영어로 15개국을 여행 다녔다. 물론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 답답한 경우도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다녔던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그 시간을 나는 힘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후배에게 영어 고자란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하지만 간혹 이놈의 영어때문에 나를 열받게 할때마다 나는 늘 생각했다.

'내가 영어는 너보다 딸리지만, 인격이 딸리는 것은 아니잖니....'

 

 

 

 

각각 다른 나라에서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후배는 외국에서 10년을 살았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했었다.) 우리가 서로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녀로, 나는 나로 존재하며 서로를 준중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혼자 여행도 못하는 사람, 외국인과 영어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뭔가 부족한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간혹 어제 현금을 찾았는데 오늘 유로가 내려갔다는 말을 하면 사소한 걸로 목숨 거는 쪼잔 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서로 성격적인 부분이 많이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사실 독일에 온지 일주일 지났을 무렵 알게 되었다. 사실 이게 뭐 큰일이겠나. 나는 한 달 정도 이곳에 머물고 다른 도시로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도시로 떠나는 날이 생각보다 늦어졌고, 그것 때문에 서로 보지 않아도 될 감정의 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었다. 절대로 후배와 나쁘게 헤어져 한국에 오지 않기로.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서 느끼는 그 사소한 모멸감을 참아 내기로 했었다.

 

 

 

이주 전에 나는 현금 인출기에서 돈이 나오지 않고 한국 인출기에서는 돈이 인출된 사고가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후배에게 서운했었다. 스스로 너무도 이성적이며 스스로 차분한 성격이라고 말하는 그때의 행동은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을 대하는 행동인가 싶어 처음엔 당황했었다. 낯선 나라에서 사고를 접한, 그것도 50만원이라는 나름의 거금을 날릴 것 같은 이 불안한 마음을 후배는 감정 조절을 못하는 나이 먹은 어른 취급을 했다. 후배는 어쩌겠냐며, 은행에 접수하면 되지 않겠냐. 그리고 못 받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기계를 확인 하지 않고 온 우리가 잘못 한 것이니, 누굴 탓하냐고. (은행에서는 기계의 결함이었다고 했지만) 그날이 토요일 이었으니 우선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주말이었으니 담당자도 찾을 수 없고, 은행 문이 여는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런 냉정함이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후배는 돈 50만원에 여행의 기분을 망치지 말라며 잊으라고 했다. 잊으라는 말, 나도 어떤 누군가가 같은 일이 생기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일의 당사자가 되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일은 아니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나도 마음을 다스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날 걱정스런 나를 뒤로 하고 태연하게 인터넷에서 쇼핑할 것들을 서핑을 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후배와의 동거가 불편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알았을 때 나는 이 도시를 떠났어야 했다. 독일로 오기 전에 우려 했던 이런 일이 결국 일어났지만 나는 그 일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분명 후배는 나에게 큰 배려를 해 준 셈이지만 그것으로만 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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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kkary 2017-07-1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