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앤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8년 출판된 한권의 책으로 인해 한 남자의 인생이 달라졌다. 한가롭게 거리를 거닐며 커피를 마실 수도 없으며 집 앞에 놓인 신문을 가져 올 수도 없고 어딜 가든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으면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아름다운 집에서 살지만 자유가 없는 불쌍한 모습이었고,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간이라는 이유로 집밖 출입이 거절되어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해야 하고, 방탄유리가 된 자동차가 아니면 탈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 해외나 어디서든 날아오는 “너를 죽이겠다”는 살인협박 편지를 매일 받아야 하고 그의 고향 인도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서 고향으로 가는 여행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인도는 그를 추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야기는 한때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살만 루슈디의 이야기다.




살만 루슈디는 암울했던 이야기를 중점으로 자서전을 썼다. 그것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써서 처음에는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인가 했지만 그는 그를 아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보통의 자서전에서 보이는 나는 너무 잘났다는 얘기는 많이 없기 때문에 3인칭의 자서전이 주는 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나만 잘났어’가 많이 들어간 그 누군가의 자서전만큼 두껍다. 800페이지가 넘는 그의 얘기가 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는 [악마의 시]라는 소설을 쓴 후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나가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유로 살만 루슈디를 처단하라는 종교 칙령인 파트와를 발표한다. 인도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생활하며 책을 출판한 살만 루슈디는 영국의 보호 속에 13년 동안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지속했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일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히키코모리 생활이 다를 바가 없다. 그 생활이 얼마나 지옥 같았으면 그는 늘 눈을 뜨고 내일이 있다는 것이 절망스럽다고 했을까. 눈을 뜨면 누군가 나를 죽이겠다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하루를 맞이해야 하는 그의 일상은 희망과 매일 멀어졌다.

“ 지독히 비통한 순간에 그는 생각했다.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제일 큰 문제라고. 내가 죽으면 내 경호 비용이나, 내가 특별대우를 이렇게 오래 받을 만한지를 놓고 영국에서 야단법석을 떨지 않아도 될 텐데. 비행기를 탈 권리를 위해 싸우거나, 신체의 자유를 조금씩 늘리려고 경찰 간부들과 다툴 일도 없을 텐데. 어머니, 누이들,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더 이상 정치인들하고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을 텐데.(이게 정말 큰 이점이다.) 인도에서 추방당한 것에 더 이상 상처받지도 않을 텐데. 스트레스지수도 현저히 떨어질 텐데.” P539

그를 이토록 지독한 순간으로 몰아세운 [악마의 시]를 읽어보지 못해 어떤 내용인지 몰라 찾아 봤다. 소설 속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인도 이민자 살라딘 참차와 지브릴 파리쉬타가 다양한 문화적 관점에서 본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함마드의 삶을 소설화하고 정신병자에게 천사의 역할을 맡겼다는 이유로 이슬람인들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만 루슈디에게 아직까지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결국 그를 도피생활을 하게 된 것은 소설이라는 문학의 종교 이야기가 문학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무신론자였던 아버지가 이슬람 종료에 매료되어 이슬람 문화와 종료를 접하면서 살았다. 그것 때문에 그가 이슬람 종료에 이권을 주거나 치중한 글을 쓴 것도 없고 그것에 역설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 같다. 단지 그는 많은 상상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 그의 문학 속에 담긴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자신들과 맞지 않다고 하여 이토록 매도되어야 하는 것일까. [악마의 시]가 왜 그들에게는 문학이 아닌 비난의 결과물이 되었을까.

“어째서 소년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등지고, 지구의 절반을 돌아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떠날 결심을 했을까? 문학 때문이었을까? (확실히 책벌레였으니까.)” P47

인도에서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문학 때문이었고, 그가 [악마의 시]를 쓰게 된 것도 문학 때문이었다. [한밤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통해 3번의 부커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어린 시절 먼 타국으로 문학을 위해 떠났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집시처럼 자유는 없지만 떠돌아 다녀야 했던 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를 지탱해준 문학이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시]를 쓰고 두려워 소설 쓰기를 중단하지 않았고 유명한 수잔 손택이 지금 쓰는 소설은 무엇이냐고 물어 볼 때도 그는 앞으로 더 깊은 소설을 써야 겠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는 좋은 글을 쓰는 것, 그것으로 그의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만을 바랐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쏟아 내는 말, 명성을 노렸다. 유대인들이 시킨 짓이다. 이슬람을 비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읽을 수도 없는 책을 누가 사겠느냐(P158)는 비난과 공격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문학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지킨 가족, 그리고 오십에 얻은 아들과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의 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를 가장 추켜세웠던 말은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조지프 앤턴,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P388

파트와가 발표되고 십여 년을 도피와 감시 속에서 그를 다시 추켜세웠던 이름은 조지프 엔턴 이었다. 그것은 그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소설을 쓰기 위한 가명이었다. 그가 그 가명을 벋고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책을 쓰는 날이 오기 전에 그가 독자들에게 쓴 글을 읽으며 독자와 작가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게 됐다.

“독자 여러분께

제 작품에 대해 친절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주 기초적인 논점 하나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책을 쓸 자유는 책을 읽을 자유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읽을 책을 성직자나 ‘분개한 공동체’ 등이 선택하거나 심사하거나 검열하는 일은 없어져야겠지요. 도대체 언제부터 예술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까? 예술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따라 진가가 정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랑받는 책이 오래갑니다. 계속 읽어주십시오.” P412

우리는 앞으로 열심히 읽는 것으로, 그리고 그는 앞으로 더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 독자와 작가의 일일 것이다. 그 어떤 편견 없이 그저 예술 작품이라는 것으로만 그 가치를 논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소원은 분명 조지프 앤턴, 살만 루슈디와 똑같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틈에 2015-04-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대우 때문에 영국에서 야단법석을 떨때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오후즈음 2015-04-23 23:22   좋아요 0 | URL
제가 살만 루슈디의 삶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보냈을까 생각해 봤거든요.
아, 정말 이건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겠지만 시상식도 가고...두번째 부인이랑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한걸 보면 뭐 큰 자유만 없었을뿐...이런 부분때문에 영국 시민들은 아마 살만 루슈디의 특별 보호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봤던것은 아니었을까. 머...어찌되었던...그는 전업 작가로 부를 누리며 사는것 같으니....(우리 나라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게 참 힘들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에 충격받아서 다른 나라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게 정말 대단한거구나 느끼거든요. 그래도 이름 값도 하고 책도 잘 팔리는데 전업 작가로 살기 어렵다는 말을 그 한테 들으니 좀....그랬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