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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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책이 나오면 반가운 사람이 있다. 몇몇 작가의 책은 표지에 인쇄인 이름만 봐도 오랜 친구 같은 사람이 있다. 그중에 한명이 성석제였다. 그의 오랜 팬으로 편중된 책 읽기였다. 성석제의 모든 장르의 책 중 유독 단편을 훨씬 좋아했다. 단편이 주는 짜릿한 반전과 유쾌한 통찰이 좋았고, 짧지만 긴 여운이 남아서 뒷얘기를 또 써주지 않을까 싶어 다음편의 단편들을 뒤적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내게 성석제의 장편은 이벤트 같은 느낌이 많다.

 

 

장편 중 <순정>을 제일 좋아했는데, 2007년에 <도망자 이치도>로 제목이 바뀌어 다시 나이기도 했다. 순정이 장편이지만 단편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들어 가 있는 것처럼 짧은 반전들이 볼만했다. 소설만 생각하면 그는 참 쿨하고 재치 넘치는 때로는 차도남 같은 분위기의 작가라고 할까? 그런 그가 난생 처음으로 연애소설을 썼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석제와 연애는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래서 이었는지 책 표지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성석제는 나름 젠틀한 남자인데 말이지, 표지가 작가와 어울리지 않게 촌스럽게 만들었을까?

 

이야기는 60년대, 아니 해방 이전부터 어진 어느 고래잡이와 일본인의 집에서 식모살이 하는 여자가 만나 딸을 낳고, 해녀의 아들과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설 배경이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연도를 가지고 시작된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도 이렇게 촌스러웠던 것일까.

 

고래잡이 딸 민현은 주인공 이세길과 초등학교부터 동창이다. 세길은 그녀의 첫 인상을 잊지 못한다. 그런 첫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향한 연정이 쉽게 멈추지 않고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매력적이라고 서술한 부분들이 참 많다. 이런 여자, 어디서 본것도 같은데 어디였을까.

 

 

“확실히 그녀는 비상한 언어력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썼던 은어나 일본말까지 그녀의 자산이다. 그보다 더 체계적인 고향의 사투리, 그 시절의 언어는 그녀가 능통한 또 하나의 언어 역할을 한다. 고향의 언어는 그 언어와 그 시절을 공유한 사람을 직격해 무장을 해제해 버린다.” P86

 

 

"남자들은 민현의 미와 매력에 끌려 접근해 와서 치근덕대는 것은 당연하고, 고래 수컷처럼 옆에서 다른 수컷이 죽어 나가도 암컷 주변을 맴도는 건 당연하고, 민현이 더 이상 관심이 없게 된 남자를 멀리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것은 오히려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전리품이나 쟁탈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자연스러운 전략일 수도 있었다." P147

 

 

60년대의 그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올라가고 민현은 늘 무리에서 뛰어난 인물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하기에는 너무 어린 녀석들은 이제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는 나이가 되면서 또 시간이 흐른다.

 

시대마다 중요한 이슈가 있었던 때를 거론하며 그들이 시대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민현을 외면하기위해 멀리 떠났거나 일부러 평범한 자신을 더 평범하게 살기위해 노력했지만 민현과 세길은 꼭 그렇게 만나야 할 사람처럼 다시 만났다.

 

 

포항에서 다시 서울로 대학을 다녔던 세길은 민현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민현을 찾아 다녔다. 그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향기, 고래잡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자유로움과 바다의 향취를 가지고 있던 그녀를 세길은 늘 찾았고, 눈에 두었다.

80년대의 우울한 대학 생활을 보낸 그들 세월의 흐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이었을까? 고래 사냥이 금지 되면서 더 이상 고래를 잡을 수 없어 직업을 잃은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위한 마지막 고래잡이에서 실종이 되었다. 아홉 살 어린 딸을 놓고 서울로 도망간 엄마는 그녀가 서울이라는 바다에서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제력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가 실종된 바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디디는 좁은 길도 고래를 찾아 떠났던 바다였다. 그녀가 고래였다면 세길은 그녀를 위해 떠있는 섬이었다. 그녀만이 찾을 수 있고 그녀만이 쉴 수 있고 환영이었다.

 

 

육국에서 전경으로 척출된 세실은 경찰병원에서 육 개월을 입원 치료해야 할 만큼 동료와 선임들에게 맞았다. 꼭 그때의 고통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요양을 해야 할 만큼 지쳐있었고 힘들었었다. 바다를 떠 나니는 민현보다 민현을 기다리는 세실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는 그녀는 세길에게 정박하지 못하고 다시 고래를 찾아 떠났던 아버지처럼 사라졌다.

 

그런 민현을 그리워하는 세길은 민현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까지 은인이라고 말한다.

 

 

“민현의 어머니는 내게는 은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었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자리를 잡고 내가 감당하기 힘든 풍파를 헤쳐 나가야 했을 때 늘 어둠 속에서 나를 밀어주었다.”P256

 

 

세실에게만 민현이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졸업을 하고 취직이 되지 않을 때 그의 직장이 결정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민현 때문이었고, 바다 속에서 젖을 먹여주고 바닷물의 저항을 덜 받게 수면으로 들어 올려준 어미 고래는 민현이었다.

 

왜 민현에게 세실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물어 볼 수 없다. 사실 책 중간까지 좀 지루해서 역시 성석제에게는 연애 소설은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민현이 왜 세실에게 정박하지 못하며 표류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궁금해서 끝까지 책을 놓지 못했다. 민현은 그런 여자였다. 오로지 사랑밖에 필요 없는 것 같지만, 사랑이 또 그녀를 떠나게 만드는 여자. 세길은 민현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태평양 어디쯤 자유롭게 떠돌다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 올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그녀를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세길이고, 세길의 사랑이다.

 

간혹 이런 책을 읽을 때 마다 나는 세상에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번 생을 모두 소비하는 날들을 가진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이 나에게는 이번 생에는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간혹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내게 다음 생이 허락 된다면 민현과 세길 같은 사랑을 꼭 해 보리라.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어. 너 때문에. 당신 덕분에. 고마워. 고마웠어요.

너는 나를 기억하겠지, 클레멘타인.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민현.”P297

 

 

“그녀는 떠났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침묵하리라. 침묵으로도 수많은 말을 대신할 수 있다. 그렇듯, 삶에서 그렇듯이.”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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