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접하게 된 책이 <프라하의 소녀시대>이었다. 이유는 소녀시대라는 말보다는 ‘프라하’가 주는 아우라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 중에 가장 가고 싶었던 장소였고 여러 사진에서 혹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영상들은 매혹적이었고 아름다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선택한 <프라하의 소녀시대>였는데 책 목차를 살피고 읽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내가 선택한 이유는 단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의 프라하였지만 요네하라 마리가 지냈던 그 프라하의 당시 상황은 큰 괴리감을 주었다.

물론 그녀의 선택에 의해 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의 공산당 간부였고 그 아버지를 따라 체코(당시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 가게 되고 외교관, 공산당원 간부들의 자녀들이 다녔던 국제학교인 소비에트 학교를 다닌 그녀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에 의한 친구들을 만나는 내용이라니.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던 세대였던 내가 느끼는 공산당원은 지금에 와서도 많은 거리감을 준다. 객관적으로 그녀의 삶을 볼 수 있을까 하는 흐릿한 판단력이 문제가 되고, 제 3국의 입으로 들려오는 ‘공상당’이라는 말은 너무나 이질감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공산주의와 소련, 중국을 벗어난 공산주의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처음에는 분단국가로 살아온 시간만큼 무거운 책장을 펼쳐야만 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약 5년 동안 프라하에 머물면서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던 요네하라 마리와 그녀의 동유럽 친구들과의 얘기들이 책속에서 펼쳐진다. 누구에게나 있는 유년시절을 그녀는 자신의 모국이 아닌 혼란스러운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있었던 시대를 프라하에서 보낸 그녀의 얘기들이 희망차게 때로는 가슴 아프게 담겨져 있다.

 

 

안테나의 오목면 같은 리차

 

“발코니는 꽤 넓었다. 그 왼쪽 반을, 지름이 내 키의 한 배 반이나 될 듯 한 거대한 안테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안테나의 오목 면은 그리스 하늘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리차가 사무치게 그리던, 그리스 하늘 쪽으로.” P79

 

간혹 떠 올려보면 그런 친구들이 한명쯤 있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친구들. 더 나이가 먹어서는 연애에 대해서 책을 전집으로 써도 될 만큼 조언을 척척 해주는 친구.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성교육을 담당하면서 뭐든 척척 알려주는 친구, 즉 리차 같은 친구.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란’ 그리스의 하늘을 자랑스러워하고 사진에는 없지만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부모님을 덕에 여자에게 인기 많은 오빠나 그의 외삼촌을 둔 리차는 반에서도 인기가 많은 스포츠 만능에 뛰어난 입담으로 친구들을 사로잡은 소녀였다. 하지만 유난히 수학을 싫어하고 무엇보다 공부가 싫다는 그녀는 되고 싶었던 배우가 아닌 독일에서 의사가 되어 있었다.

 

마리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모국의 하늘처럼 높고 깊고 단단해보였다.

왠지 남들과 다르게 살았을 것 같은 그녀라서 그런지 그녀는 독일에서 의사이면서 노동자와 결혼을 했고 한명의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지만 그 역시 리차스럽게 경쾌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공부를 싫어한 리차가 매년 낙제를 할 듯 아슬아슬했지만 반 아이들 모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진급할 수 있었던 (P34) 리차만 천하태평이었듯 그녀를 걱정하지만 그녀만큼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녀는 어떻게 그런 긍정을 오랜 시간 가질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 까지 했다.

 

 

그녀를, 그녀의 자신을 위한 새빨간 거짓말.

 

아냐의 얘기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왜 요네하라 마리가 아냐를 찾아 갔을까 고민스러웠다. 아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지나온 삶을 보고는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다 민망했었다. 루마니아인인 아냐는 통통하지만 예쁜 얼굴이긴 해도 행동이 완만해서 언제나 육중한 몸을 놀리는 듯 보이는 아주 평범한 소녀 같았다. 그래서 서로 동떨어진 나라에서 왔지만 부모님들에 의해 같은 시기에 한 나라로 모였고 공산주의 사상에 이념을 불태우고, 자기 생명조차 내 놓고 파란에 찬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이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할 수 있었기에 (P92)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집으로 초대는 그녀가 내세운 이념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하긴 레닌도 스스로가 생애에 단 한 번도 노동으로 자기 생활을 꾸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며, 지주로서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받아 생활 (P29)했다니 아냐가 대 저택에 살고 있다는 것이 뭐 이상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간 내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 사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김정일의 아들이 홍콩에서 호화 빌라 한 층을 다 빌려 살고 있으며 인터뷰 한 그날 보여줬던 명품 도배 패션은 충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의 모습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목숨 걸고 넘는 꽃제비들의 몇 년 전의 얘기가 떠올라 울컥했을 뿐이었다.

 

어쩜 그래서 아냐는 거짓말이 더 늘어갔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한 거짓말이 진짜라고 생각해서 모두가 간절히 원했던 그 노트를 차마 프랑스에서 오빠가 사다 준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 왔다는 거짓말을 했고 그것을 정말로 자신이 사 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거짓말쟁이 아냐는 그런 거짓말까지 모두 사랑받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아내였어도 요네하라 마리는 정서가 안정이 되고 듬직했던 아냐를 그리워했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일 거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다시 만난 아냐는 원어민 수준이었던 러시아어를 모두 잊어버린 듯 영어는 또 얼마나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지 그녀의 정체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삶이 그녀의 거짓말 습관처럼 그렇게 거짓말처럼 영국인 남편과 영국에서 잘 사는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을 다 듣고 나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야스나에게 보내는 엽서 한통.

 

리차, 아냐, 야스나 이 세명의 친구를 만나는 과정 중에 가장 서스펜스가 있는 것은 역시 야스나를 만나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아련한 유코 슬라비아의 소녀인 야스나를 만나는 얘기는 가장 감동적이고 가슴 아팠다. 특히 그녀를 위해 요네하라 마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그녀 또한 가장 가슴 아프지 않았을까.

 

그녀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던 교사들. 그녀의 발표 한 마디에 교실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던 그 강직하고 바른 성품과 품행들. 그것 때문에 활발하고 친화력 강한 리차 까지도 가까이 하기에 꺼렸던 야스나.

차분한 몸짓과 당당함. 너무 힘주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그러면서 자기가 말할 내용뿐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지 까지도 계산해가며 발표하는 야스나는 어쩌면 교실에 하나쯤 있는 완벽해서 더 가까이 가기 싫은 친구들 중에 하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림엽서 한 장에 고마워하고 감동할 줄 아는 그녀의 소박한 그 심성은 그간 그녀에게 있었던 그녀가 무슬림이라는 그 편견 또한 날려 버렸다.

 

터키 병사들이 그 ‘하얀 도시’에 반해 싸울 마음을 잃고 물러섰지만 폭격기 조종사들은 하얀 도시에 매료되는 일이 없이 베오그라드시를 덮쳤다는 문장에서 덜컥 겁이 났다. 이제 세상에 없는 요네하라 마리는 대체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써 놓고 더 이상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니 어쩌란 말인지.

 

그녀의 ‘추억 노트’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동유럽의 세 명의 소녀들의 얘기에 몰랐던 세계사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녀와 함께 숨차게 혹은 느긋하게 친구를 기다리며 또는 정말로 약속의 장소에 나와 줄 것인지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들의 친구들과 조우했다. 그리고 내게도 있었던 몇몇의 친구들을 새하얀 노트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노트에 적어 보았다.

 

이제라도 나도 그녀처럼 잊고 있던 그녀들을 만나고 싶었다. 리차 같은 엉뚱한 친구, 야스나처럼 가슴 아픈 친구, 그리고 만나서 유쾌하지 않을지 모르는 아냐 같은 친구일지라도 내 기억의 노트를 꺼내고 싶은 마음이다. 마리여사처럼 벅찬 그리운 마음을 맞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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