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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이경자 지음 / 문이당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2007년도 국내 최고 경매가인 45억 2천만 원에 낙찰 된 박수근의 [빨래터]는 위작 논란으로 법정으로 갔지만 2년 후 진품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박수근의 화법중 하나인 마티에르 기법은 캔버스, 종이, 패널등 재질에 따라 변화가 있을 수 있어 유화의 기름물감의 성질상 두껍거나 얇게 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특이한 습관들을 보면 유작을 구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법정에서는 결국 진품으로 추정된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미 세상에 없는 박수근이 다시 환생해서 이것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경자의 소설 [빨래터]는 유작 논란이 일어나는 그 시간부터 시작된다. 아버지의 재능을 모두 이어받은 둘째 성남의 시점으로 아버지가 그림을 그렸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어느 날 아버지가 써 놓은 이력서를 보았던 석남은 이런 문장을 보았다. 독학, 아버지는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그림을 알아갔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처럼 성남도 아버지의 모습이 교본이 되어 그림 그리는 것을 습득하게 되었다. 집에 돈이 없어 엽서 백장을 사와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모두 팔고 주변을 돌며 엽서를 그려 팔 수 있는 판로를 만들어 왔다는 것에 대단한 생각이 든다. 나였다면 절대로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 그가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 박수근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한쪽 눈이 안 좋아져 수술을 했지만 그 수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재수술을 했지만 결국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눈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눈일 텐데 한쪽 눈으로 그려내는 그의 세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런 그의 고난은 술을 먹고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단하고 힘든 몸을 잊고 싶어 먹어 댔던 술이었다.
그렇게 그가 술과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아질수록 간경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을, 생명을 갉아먹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술이 불러온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내를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떠나면서 그가 말했던 그 말,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너무 멀어...”
" 그에게 술은 길이었다. 술을 마시면 멸시와 비난과 소외와 서러움들이 모두 동전만큼 작아졌다. 가슴에서 피가 흘러도 되레 시원하기만 했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그이 꽝꽝 언 가슴이 녹아들었다. 마치 술은 어머니 같았다. 수근아 춥지? 술에 취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수근아, 저기 마을로 난 꼬불꼬불한 길이 보이지? 마을 어귀에 커다란 고목이 두 그루 섰잖니. 그 사이로 들어서렴. 등불을 켜 놓을 테니 창호지 문에 노란 불빛이 밝은 집으로 오렴. 밤이 깊을수록 불빛이 밝아지려니 P185"
그가 멀다고 했던 그 천당에 도착했을지 모르겠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며 보았던 순간이 사실 내게는 많지 않았다. 빨래터를 읽고 인터넷으로 그의 그림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하루의 모든 시간을 쏟아 냈을 그림들을 보니 마음 한편이 홀쭉해진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그의 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입되는 슬픔의 감정이 커지듯 박수근의 그림들도 그런 느낌이 가중된다. 싫지 않은 슬픔이 눈가를 살짝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