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질문 - 의문문으로 읽는 서양 철학사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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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을 펴낸 열린책들의 편집자 노트(웹 카페를 통해 확인)를 보면 이 책 자체를 놓고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책에 악행을 저지르는가?>, <이 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만들려 하는가?>, <최선의 편집 형태는 무엇인가?>가 그것들이다. 그럼 나도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읽는 나는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행복한 것인가?>, <나는 이 책의 텍스트를 믿어야만 하는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닮아있다. <하늘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 또는 <운명의 긍정>이란 하나의 구절로서 표현되는 그것이다. 그래, 이건 쉬이 생각할 수 있는 명제다. 그럼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그는 코스모스cosmos를 말한다)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어쨌든 많다. 저자는 『위대한 질문』에서 30가지의 질문을 한다. 아니 30명의 철학자들이 (초빙돼) 질문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아예 답이란 건 집어치우고, 내가 보기에 나는 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니면 내가 그 흔해빠진,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수식[~(~a)=a]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사실 이게 기막힌 논리일지도. 이를테면 <허구의 허구를 통해 실재에>, <없음의 없음을 통해 있음에 도달한다>거나 말이다 ㅡ 그나마 최근 사람인 사르트르의 눈으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욕을 해도 대꾸할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위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위에 나열한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내가 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하는가(이것도 멋진 <위대한 질문>이다)? 『위대한 질문』은 총 30명의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하나씩 질문을 해댄다. 그런데 등장인물(이라 표현하자)의 연대 순으로 19세기, 20세기까지 오다가 갑자기 마지막엔 플로티노스(204~269 혹은 205~270)가 나타난다. 대체 왜? 사실 이 양반도 일자一者를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 고대 그리스철학과 총체적 체계로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갑작스럽다. 사실 이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이것은 <허섭스레기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
 

▼ 『위대한 질문』의 저자인 폴란드의 소크라테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그는 작년 유有에서 무無로 되었다.
아니 원래의 무에서 변하지 않고 무 자체로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이제야 진정한 유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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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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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등장하는 현재시제의 문체는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불안한 영혼들의 불완전한 이야기. 옆구리를 툭 치면 활자화된 단어들이 눈에 보이게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 그런데 아뿔싸, 나는 절대 함정에 걸려들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에게 빈틈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그의 언어는 포물선을 그리며 도망갈 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머리 위를 향해 내리꽂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글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이 <나 역시 누구나 쾌락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 쾌락의 진원지가 상대방의 고통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라고 쓴 부분을 기억해내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전화』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듯 자기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거나, 정말 바닷물에 심하게 절어 손쓸 방법이 없는 양말 한 짝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 아니면 내가 보기엔 분명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는 의식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 이 책을 찢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누군가의 지시에 사로잡히고 만다. 차라리 그들이, 영화 《섬》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지지듯 ㅡ 자신의 입이나 성기가 아닌 물고기라는 타자他者 ㅡ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근원적인 고통을 피했으면 하고 바랐다(물론 『전화』와 《섬》을 같은 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악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씨발>이든 <씨팔>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kunst>이란 단어 하나로 맺어졌으니까(「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자동 응답기의 안내 멘트를 듣고 <왜 연극하는 것처럼 말할까?>하고 느끼는 B(「문학적 모험」), <이제는 전화가 지긋지긋해. 네 얼굴을 직접 보며 말하고 싶어>라는 말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라고 응대하는 X(「전화」), <내가 거울을 볼 테니까 너도 거울 속의 나를 봐. 그러면 거울 속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할 거야. 아무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거야>란 묘안을 내는 형사(「형사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여성 작가(「앙리 시몽 르프랭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은 전화를 이용하거나(때로는 편지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아니면 직접)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모두 타인과의 맺음에 있어 실패하고 고통 받는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전화』라는 타이틀로 묶어지며, 수록된 대부분의(거의 다) 단편들은 어, 하다가 끝나고 만다. 왜일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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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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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의 배경이 된 세계대전이나, 세상의 모든 전쟁, 총싸움, 전쟁을 그린 영화나 책, 정치적 입장 등은 뒤로 놓고, 오직, 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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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같은 청춘. 청춘이라! 우리는 모두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다고? 청춘이라고?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 본문

정말 그들은 노인이 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살고 싶다. 그들은 참호 안에서 느낀다. 시체의 영혼을 빨아들인 밤안개가 내일은 적의 포탄을 몰고 올거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오는,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아군 병사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왜 전쟁이 일어난 거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지? 대체 왜 땀으로 가득찬 군화를 벗지 못한 채 꼼짝않고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그들은 악마가 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고 피상적으로 변한다. 알싸한 연기를 맡으며 그들은 웅크린 맹수가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인형이 된다. 그들은 사자死者가 되어서 움씰움씰 춤을 추는 기관총이 되고 또 수류탄이 된다. 부상병의 신음 소리를 싣고 오던 바람은 이제 피냄새를 데리고 오며 천진난만한(했던) 소년들에게 메스꺼움을 준다.

그들은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침대 시트를 뒤집어씌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패기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사나운 개와 상대하면서도 거위 한 마리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시간이란 이미 사라졌다. 두개골이 없어도 살아 있는 사람과, 두 다리를 잃은 채 달리는 병사와, 흘러내리는 창자를 움켜잡은 채 치료소까지 오는 병사를 본다. 그들은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입 안에 떠 넣고는, 달리고, 던지고, 쏘고, 죽이고, 널브러져 누워 있다>(p.110). 그리고 그들은 어느 판자벽 광고물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있는 한 소녀를 보고, 평화를 본다. 그리고는 곧 눈을 내려 자신들의 더럽고 꿰맨 자국이 있는 군복을 본다. 그리고 다시금 가슴에 총알 하나가 알을 슨다.

--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본문

파울 보이머는 휴가를 나와서야 비로소 전쟁이란 것을 안다. 그가 전선에 있을 때는 활기를 띠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다. 그가 휴가를 나와 어색해하고 혼자 있고 싶어할 때는 나 또한 그러했다. 병영에 있는 미텔슈테트가, 그에게 낙제를 줬던 칸토레크 선생에게 ㅡ 그는 이제 향토 방위대에 편입되어 미텔슈테트의 아래에 있다 ㅡ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을 때는 나도 따라 히죽거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의 전쟁이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논쟁거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란 거다. 우리의 파울 보이머(를 비롯한 모든 군인)는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로 인해 얼마나 고뇌했으며, 그의 지갑에서 발견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으로 얼마나 맹목적이게 되었는가. 결국 전우애는 허망함 그 자체로 돌변하고 그 속의 수많은 사연들은 총탄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전쟁의 허망함과 어린 소년의 낡은 단추만이 아니다. 고약한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대들던 차덴을, 몰래 잡은 거위를 요리하던 카친스키를, 포화 속에서 교과서를 끼고 다니던 뮐러를, 머리가 비상해 가장 먼저 일등병이 된 크로프를, 막상 전방에서는 겁에 질린 원숭이가 되어버린 히멜슈토스 하사를, 약혼자에게 보내겠다며 구리로 된 포탄 띠와 프랑스제 조명탄의 비단 낙하산 천을 줍던 하이에를, 휴가를 얻어 만난 부모님과 누나를, 그리고 참호 속에서 죽어간 제라드 뒤발이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군인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작가의, 파울 보이머의, 그의 전우들의, 누군가의 나지막하고 담담한 외침을 듣는다.

--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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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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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가 춤을 춘다. 불어치는 바람에 맞춰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허수아비는 누가 옷을 입혀주지 않고 말뚝을 박아주지 않으면 아무짝에 필요가 없다. 옆의 누군가가 절망을 섞어 부르는 노래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허수아비니까. 오늘 아침, 신문에서 <탐욕에 눈먼 권력에 국민은 절망합니다>란 헤드라인을 달고 이 『허수아비춤』의 출간 소식이 기사화된 것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 기득권은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바깥 소리에는 외면하고 있지만, 국민도 그들을 외면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허수아비다.

책을 읽다가 <백성은 바다요, 권세는 그 위에 뜬 일엽편주一葉片舟다>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구절인 것 같아 생각을 거슬러보니, 그래 이거였다. 저 옛날 맹자의 <백성이 귀중하고 군주는 가볍다>, 순자의 <군주는 배요, 뭇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실을 수도 있고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란 말이었다. 바로 중민重民사상이다. 이건 백성의 의지와 원망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허수아비춤』으로 돌아가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여 로비를 하고 그룹 후계자의 경영권 및 재산권 상속을 추진하는 과정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펼쳐진다. 정말 <세금 내라는 것 다 내고는 사업 못해 먹는다>란 말이 맞는 걸까. 소시민인 내 눈으로 보건대, 글쎄.

어릴 적 <훌륭한> 사람 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여기서 조금 눈目이 트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하겠지. 그런데 한발짝 더 나가면,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나을 거다. 사는 평생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람은 없기에. 이건 거꾸로 봐도(당하는) 마찬가지다. 그 <폐弊>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허수아비춤』에서는 어마어마한 로비 자금을 뿌리는 기업, 그 기업을 까는(!) 기사를 실어 광고 압박을 당하는 신문,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표현되는 검사들,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하는 노조 간부, 공모에 가담했지만 회장이 내린 스톡옵션이 적어 다른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간부 등이 등장한다. 매일 저녁 아홉시 땡 하면 으레 들리는 소리. 그런데 그 뉴스보다는, 상류 사회의 치마 속을 한층 더 불편하게 까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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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야 산다 - 인간의 질병.진화.건강의 놀라운 삼각관계
샤론 모알렘 지음, 김소영 옮김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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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을 본 사람이라면,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바이러스> 보다는 자연스레 끔찍한 괴물의 형상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흉물스런 비주얼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에서는 바이러스가 유출되고, 그로 인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앞으로 이야기할 주제와는 다소간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에서 소재를 취한 영화라는 점에서는 분명하다. 바이러스가, 숙주宿主인 우리 몸에 기생한다는 것. 인간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는 그 가짓수도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신기하고 희한하게도(!) 우리의 몸은 개개의 항체를 만들어낸다. 유전자 변형이든 뭐든 간에, 인체란 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이건 어떨까. 영화 『수퍼사이즈 미super size me』다. 누군가 24시간 패스트푸드만 먹으며 자신의 몸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한다. 비만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만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병을 초래하는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당뇨병이 드렇다. 당뇨병의 원인 중 하나는 바쁜 식습관, 운동 부족, 비만 등이다. 과거 사냥으로 먹을 것을 해결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육류 위주의 식단을 했고, 또 농사를 짓던 유럽인들은 탄수화물과 설탕이 많은 식단을 했다(육류와 당분).

이처럼 당뇨병을 초래하는 원인들은 많긴 해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유전 요인이 있으면 다른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당뇨병에 더 잘 걸리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나는 바이러스와 당뇨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을 알고 있다. 부모의 좋은 것만 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태어난다. 유전자도 부전자전으로 이어진다. 즉, 바이러스도 유전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쉽게 주변에서 암이나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부모나 조부모도 그러한 병을 앓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제 『아파야 산다』로 넘어간다. 정말 <아파야 살까?> 철분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몸이 건강하고 정상일 때, 인체는 철분 보조제를 과다 복용하건 간에 알아서 철분 양을 조절한다. 그러자 혈색증(혁색소침착증)에 걸린 사람의 몸은 철분이 항상 부족한 것으로 인식해 거침없이 철분을 체내로 받아들인다. 이 철분이 몸에 계속 쌓이다 보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체가 녹슬어 죽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헌혈이 체내의 철분도를 낮추는 데 안성맞춤인 것이다. 예를 들어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플 때 부항을 이용해 피를 조금 빼내고 나면 왠지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느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뿐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방혈이다.

-- 수백 년 동안 서방에서 방혈이 필요할 때 가는 곳은 이발소였다 (...) 이발소 앞에 세워놓은 기둥은 사실 방혈을 상징했다. 꼭대기 주발은 거머리를 보관하던 사발을, 밑바닥 주발은 피를 담던 사발을 나타냈다. 적색과 백색 나선은 중세 때 붕대를 세탁한 후 기둥에 널어 말리던 데서 비롯되었다 -- 본문

여기 비타민D와 엽산葉酸이 있다. 인체 생화학의 필수요소이며, 부족할 경우 각종 암, 당뇨병, 심장병, 관절염 등 수많은 질병을 초래하는 <비타민D>. 그리고 DNA복제를 도와 세포 성장 체계에 필수인 <엽산>. 다시 돌아가야겠다. 햇빛은 인체의 비타민D 생성을 돕는 동시에 체내에 저장된 엽산을 파괴한다고 한다. 우습지 않은가? 양쪽 모두 우리 몸에 필수 요소인데, 이건 정말 엄청난 아이러니와 딜레마가 아닌가. 그럼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힌 채(엽산 파괴 방지), 비타민D가 풍부한 생선이나 우유만 마시면 해결될까?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유전자는 우리 몸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유전자 덕분에 건강한 몸을 가질 수도 있다. 『아파야 산다』는 흥미로운 책이다. 전혀 딱딱하지 않다. 위에서 인용한 이발소 기둥의 정체(!)가 무엇인지, 술만 마시면 빨개지는 얼굴이 허약한 내 몸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빛에 노출될 때 갑자기 재채기 나는 것이 장애라는 것 ㅡ 이것이 아추ACHOO 증후군이란다. 본래의 이름도 길다. 재미로 써보자면 이렇다. autosomal dominant compelling helioopthalmic outburst syndrome. ㅡ 등의 재미난 이야기와 우리 몸에 감춰진 중요한 사실이 들어있다. 

 

유해하고 열성인 유전자는 도태되고 유익한 것만 남아 계승되는 것이 진화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이 책으로 뒤바뀌었다. 정말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왜 타이틀이 <아파야 산다>인지 이제 알았다.

그럼 이제 이것도 읽어봐야 한다. 『그린 비즈니스의 미래 지도』. 유전자, 질병, 항체, 각종 요소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몸이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환경이다. 범위를 넓히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 우리의 후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건드려보기>라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고 타인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살아가는 것. 환경, 세상. 그 환경을 건드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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