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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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등장하는 현재시제의 문체는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불안한 영혼들의 불완전한 이야기. 옆구리를 툭 치면 활자화된 단어들이 눈에 보이게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 그런데 아뿔싸, 나는 절대 함정에 걸려들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에게 빈틈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그의 언어는 포물선을 그리며 도망갈 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머리 위를 향해 내리꽂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글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이 <나 역시 누구나 쾌락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 쾌락의 진원지가 상대방의 고통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라고 쓴 부분을 기억해내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전화』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듯 자기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거나, 정말 바닷물에 심하게 절어 손쓸 방법이 없는 양말 한 짝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 아니면 내가 보기엔 분명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는 의식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 이 책을 찢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누군가의 지시에 사로잡히고 만다. 차라리 그들이, 영화 《섬》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지지듯 ㅡ 자신의 입이나 성기가 아닌 물고기라는 타자他者 ㅡ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근원적인 고통을 피했으면 하고 바랐다(물론 『전화』와 《섬》을 같은 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악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씨발>이든 <씨팔>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kunst>이란 단어 하나로 맺어졌으니까(「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자동 응답기의 안내 멘트를 듣고 <왜 연극하는 것처럼 말할까?>하고 느끼는 B(「문학적 모험」), <이제는 전화가 지긋지긋해. 네 얼굴을 직접 보며 말하고 싶어>라는 말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라고 응대하는 X(「전화」), <내가 거울을 볼 테니까 너도 거울 속의 나를 봐. 그러면 거울 속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할 거야. 아무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거야>란 묘안을 내는 형사(「형사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여성 작가(「앙리 시몽 르프랭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은 전화를 이용하거나(때로는 편지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아니면 직접)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모두 타인과의 맺음에 있어 실패하고 고통 받는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전화』라는 타이틀로 묶어지며, 수록된 대부분의(거의 다) 단편들은 어, 하다가 끝나고 만다. 왜일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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