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달러로 먹고살기 - 당신은 무엇을, 왜 먹고 있는가?
크리스토퍼 그린슬레이트 & 케리 레너드 지음, 김난령 옮김 / 타임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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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왜 하루에 1달러로 먹고 살려는 시도를 하는 건가. 무한도전으로 시작해서 무모한 도전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젠장. 달러를 한화로 계산하든 말든 난 1달러로는 하루를 (먹고) 살 수 없다. 식욕은 본능이니까. 그것도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나는 <1달러로 먹고 살기>를 실천하는 도중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버거킹에 가 무료로 주는 시럽 두 봉지를 얻고서 <마이 프레셔스!>를 외치는 골룸이 되고 싶지는 않다(p.54). 이 책의 저자 중 남편인 크리스토퍼처럼 한 달 동안 했던 <악마의 프로젝트> ㅡ 나는 이렇게 부르려 한다 ㅡ 를 끝내고 난 후유증(!)으로, 처가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식사 때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에 놀라 <물, 물이면 족해>라며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싫다(p.125). 1달러 프로젝트는 분명 영양 상태와 체력 그리고 에너지에 관해서도 충분치 않은 계획이다. 저자는 이 계획을 실천하기 전 식료품을 구입하는 비용에 대해 생각했고,  나아가 그 생각은 저소득층 가정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리고 대학 시절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떠올리기에 이른다. 거기서 저소득층을 위한 식량보조 프로그램인 <푸드스탬프food stamps>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적 한계를 느낀 거다. 그리고 이런 탁상공론에 염증을 느끼고 여러가지 탐구를 하게 된다. 물론 그 실천은 위에서 말한 <악마의 프로젝트>로 귀결되지만. 그리고 우리(나)는 여기 『하루 1달러로 먹고 살기』에서 중요하고도 단순명쾌한 결과를 얻는다. 쉽게 먹는 것은(이를테면 인스턴트 식품) 말 그대로 간단한 일이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건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걸 ㅡ 진부한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더해 <건강하게 먹으려 노력하면 식비는 자연스레 절약된다>고 한다(p.266). 물론 현대의 편리성과 이기성에 맞서 최소한의 노력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결국 이 책은 뻔한 소리만 늘어놓게 될 운명에 처하지만 빠뜨리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 저자가 실제로 이 1달러 프로젝트를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의 탁상공론보다는 보다 현실감 있고 지혜로운 <먹고 살기>를 피력한다. 『하루 1달러로 먹고 살기』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저자의 실험이 아니라 그것에서 파생된 실제 현실과의 고민이다. 과거 TV 프로그램 <만 원의 행복>이란 타이틀에 왜 <행복>이 함께 있는가는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해준다 ㅡ 실제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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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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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란 타이틀의 이 책은 1946년에 조지 오웰이 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제목 그대로 사용한, 그의 29편의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이다. 나로서는 무려 29편이나 되는 (양적으로) 투박한 이 에세이들을 한 권의 책에 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조지 오웰이니 넘어간다. 그런데 『나는 왜 쓰는가』는 에세이와 소설의 접점에 있다 ㅡ 소설을 가장한 에세이인지, 에세이를 가장한 소설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
두 가지 업을 다 해본 입장에서 말하건대 서평자는 영화평론가보다는 낫다.
영화평론가는 집에서 일할 수도 없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오전 11시면 시사회에 참석해야 하며,
한 잔의 싸구려 셰리주 값에 자신의 명예를 팔아야 하는 것이다.
ㅡ 본문 「어느 서평자의 고백」 中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ㅡ 본문 「나는 왜 쓰는가」 中
 



조지 오웰은 식민지 경찰 생활 덕분에(!) 교수형을 집행하기고 했고(「교수형」), 코끼리를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세 번이나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다(「코끼리를 쏘다」). 이러한 <흔치 않은 별의별> 경험들은 ㅡ 헌책방 직원, BBC 라디오 프로듀서, 서평 쓰는 일 등등 ㅡ 그의 문학적이고 지적인 자양분으로서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지 오웰이란 이름을 언급할 때 『1984』나 『동물농장』의 작가란 것 외에 <훌륭한 에세이스트>라는 점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ㅡ 아내와의 사별과 일 년 반 동안이나 출판사를 못 만나 출간이 지연되었던 『동물농장』이나, 폐결핵 상태에서 매달린 소설 『1984』가 너무도 대단해서 감히 <에세이>의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에서 그는 책과 일종의 직업적 관계에 놓이다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알게 되고,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적어도 여기서는) 틀렸다. 비록 내가 쓰는 이 글은 변변찮은 것이지만, 내 본심은 『나는 왜 쓰는가』가 조지 오웰이 말한 <열에 아홉의 책>이 아니며, <서평자의 본심>의 그것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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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테라피 - 크리에이티브는 뇌로하는 섹스다
윤수정 지음 / 상상마당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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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creative>와 <테라피therapy>라는 단어의 조합이 희한하다. 책을 펴면 크리에이티브<로> 테라피하다, 크리에이티브<를> 테라피하다, 이렇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걸 알 수 있다. 저자는 카피라이터다. 우리는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꽃 같은 세상 날려버린다!>, 《워낭소리》의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 《가족》의 <일곱 살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열일곱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떠날까봐 눈물납니다>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ㅡ <꽃 같은 세상...>에서의 <꽃>은 비속어 <좇>을 바꾼 거다. 어감도 살아 있으며, 기발하고 발칙하다. 이 책의 카피 <크리에이티브는 뇌로 하는 섹스다>에서도 드러나듯.

다시 돌아간다. 이 책은 <크리에이티브>와 <테라피>를 학문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ㅡ <아마도 이 책은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팔리게 될 것이다>라고 저자는 적고 있지만. 그런데 왜 크리에이티브는 <뇌로 하는 섹스>인가. 저자는 섹스와 자위로 예를 든다. 그리고서 자위는 버리고 섹스의 손을 들어준다. <소통과 배려, 책임, 사전에도 고민하고 사후에도 고민하고,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고, 늘 조심해야 하는 그 과정(p.133)>이란다. 나는 이 말을 근저로 <삐딱>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삐딱>은 나쁘거나 불손한 의미가 아니다. 그저 다수결에서 밀려났을 뿐이니까.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는 거다 ㅡ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이렇게 살았다. 그래서인지 괴상하다는 소리도 들어왔다. 왜냐하면 나는 다多에 속하지 않는 생각들 역시 했으니까.

카테고리를 찾고, 그것을 어떤 상태로 상징화하며, 어떤 방식으로 어필할 것인가. 우리(인간)는 항상 뭔가를 하고 싶어 하고, 궁금해한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간단한 정보에 스토리를 입혀 대다수가 ㅡ 여기서도 다수결이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ㅡ 아! 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조언. 그래서 이 책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크리에이티브<를> 크리에이티브<로> 테라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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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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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서평처럼 <확실히 완전히 개운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Ctrl +C>와 <Ctrl +V> 만으로는 세상만사가 탈 없이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이기주의적이고 무신경한> 열일곱의 작가는 본문에서 이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혹은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가차없이 빼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줄거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왜 이다지도 극찬을 받고, 미프티는 (맙소사!) 세상의 모든 원죄를 혼자서 짊어진 얼간이가 되었는가에 대한 감흥은, 책 겉표지의 새빨간(혹은 핏빛의) ㅡ <핑크색>이나 <분홍색>으로 묘사하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다 ㅡ 아홀로틀로 대신하자.

나는 죽었다 깨도 미프티처럼은 될 수 없다. 심하게 탈골된 언어를 구사하며 마치 카타콤catacomb에 갇힌 로마 병사처럼 기는 그녀의 삶은, 당최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프티는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限りなく透明に近いブルㅡ』의 미군기지 근처에 사는 소녀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처럼 읽었다면 과장일까?(그렇다, 고 나는 생각한다) 미프티의 트라우마가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 앞에는 수식어로서 <탈脫>이나 <반反>을 붙이는 것도 좋겠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성장 소설보다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불온서적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일관되게 악마적일 수는 없다!) ㅡ 이것은 다양한 의미로 그렇다는 얘기다.


 

왜 다른 사람들은 너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는 건데?
ㅡ 본문 p.43


그래. 우리(나)는 <너(미프티 혹은 헤게만)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좀처럼 진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조르주 바타이유의 『문학과 악』)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어긋남, 통찰력을 잃고 더쳐가는 상처들. 이것들은 작위성이나 상투성, 비개연성이란 말로는 쉬이 해결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봉합>이 안 된다는 거다. 헤게만의 연출력은 평면적이지만, 붕괴, 그 직전이다. 그래서 미프티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우주적으로 변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편의 문턱을 넘어 버린, 착한 어린이는 될 수 없는, 반추상의 구어체로 이야기하는 미프티만 남는다 ㅡ 나는 분명 『아홀로틀 로드킬』이란 <책>을 읽었음에도, 에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게다가 미프티는 좀먹은 행려병자 꼴을 하고 <자동 응답기의 부재중 전화 표시를 보고서, 언젠가 죽으면 자신의 일부도 이렇게 남아 있게 되리라(p.300)>는 것을 알고 있다(물론 우리도 안다). 상당히 불쾌하고 조금은 위악적이며, 동시에 순수하고 쉽사리 로드킬 같은 건 당하지 않을 미프티 ㅡ 시속 120km로 달리는 차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면 뛰어들었지. 헤게만의 실험은 텍스트를 그러모으는 것에 더해 그녀 자신을 해부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책을 덮는 순간 내 귀에 이명이 일며 어디선가 블러드하운드 갱bloodhound gang의 Foxtrot Uniform Charlie Kilo」가 들려오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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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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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최초 완역본>, 태생은 그 해 <가장 아름다운 체코슬로바키아 책>이 된 1965년판.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간기면에는 <초판 1쇄>라고 적혀 있다. 여기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는 누구냐는 질문에 키플링 ㅡ 아마도 『정글북the jungle book』을 쓴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ㅡ 을 꼽는 도롱뇽(놈들은 언어구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방문객으로부터 초콜릿과 단 것을 너무 많이 얻어먹어 위장염에 걸리는 도롱뇽(들)이 등장한다. 게슈타포가 공공의 적 no.3로 지목할 정도로 악명높은(?)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 우리는 곧잘 체코the czech republic, 또는 프라하prague라는 단어 자체에 매료되곤 한다 ㅡ 파리paris나 도쿄tokyo의 다리 위 야경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그리고는 약간의 안개와 어쿠스틱 기타를 상상하기도 한다(적어도 나는 이런 몽상을 즐긴다). 하지만 무대가 된 체코는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주인공) 포본드라의 <내가 전 세계를 망쳐 버린 거야……>란 말을 끝으로 도롱뇽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도롱뇽들은 도롱뇽들이니까」
그는 목소리를 깔며 얼버무렸다.
「2백 년 전에는 깜둥이들은 다 깜둥이들이라고 했죠」
「결국 그 말이 다 맞잖소. 체크!」

나는 결국 그 게임에서 졌다.
갑자기 체스 판 위의 수들이 하나같이 케케묵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로 벌써 결판이 나 있고,
우리는 그저 우리 말들을 똑같은 네모 칸으로 옮기면서
과거와 똑같은 패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까만 말이 졌구먼」

ㅡ 본문 p.215


파시즘의 풍자와 즉각적인 현실의 반영은 차치하고라도(그럴 수 없겠지만 미루자) 『도롱뇽과의 전쟁』은 환상문학이며 거기에 고급 저널리즘을 융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시종일관 영민한 위트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수도원 꼭대기 탑루에서, 히죽거리며 금서를 읽는 노망난 수도승을 어떻게 골려줄까 하고 고심한 끝에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의 호르헤를 흉내내 <이 책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라는 쪽지를 몰래 책 속에 넣어 수도승을 놀래킨다(물론, 당연하지만, 비약을 인정하며, 에코의 작품이 훨씬 나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탑루 위의 수도자)는 사람들(수도승들)을 (아직은)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한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어두운 결말로 맺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의사소통과 직립보행이 가능한 도롱뇽들에게, 인간은 각종 노동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ㅡ <우리는 진주의 모험 소설 대신 환희에 찬 노동의 찬가를 부를 겁니다. 우리는 구멍가게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창조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p.169).> 그리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도롱뇽들이, 그들의 거주지(!) 확보를 위해 인간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는 걸 더 잘했던 것 같구나」(...)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으면,
너무 잘해서 네 녀석도 깜짝 놀랄걸?」

ㅡ 본문 p.361


하! <우두머리 도롱뇽은 이 순간, 아직은 세계를 무력으로 접수하기보다는 인류로부터 구매할 의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p.352).>라니. 게다가 <아직은>이라니 ㅡ 우두머리 도롱뇽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다. 책의 마지막 <작가, 혼잣말을 하다>를 읽어보시라. 작품에선 도롱뇽이 인간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세상이 온다. 물론 사람들은 이전에 수많은 도롱뇽들을 죽이거나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이 <마카로니(작가는 특별히 억센 놈들이라 표현한다) 같은 도롱뇽들만> 살아남아 계속 번식을 유지했나? 운명이 질긴 놈들이다(물론 작가의 저항의 몸짓이겠지). 말을 할 줄 알고 지식을 쌓아 교수가 된 도롱뇽(!)의 논문을 인용해 파문당한 과학자의 (이유 있는) 할복이나, 도롱뇽들이 사는 강에 독극물을 부어 그들을 독살하는 영국 사령부에 관한 에피소드는, 독자(혹은...)에게 전하는 놀라운 위트로 무장한 잘 다듬어진 촌철이다.

명랑 개그 만화처럼 ㅡ 단발적인 개그가 아니라 촘촘히 짜여진 코미디에 가깝지만 ㅡ 내내 히죽거리게 만드는 『도롱뇽과의 전쟁』은 칼레이도치클루스를 떠오르게도 하는데, (물론 모두 작가가 의도해 적었고 동시에 허구인) <도롱뇽들의 성생활>을 고찰한 부록, 도롱뇽들에 관한 각종 신문 기사들, 과학 총회를 목격하고 쓴 기록들, 저명한 명사들의 소견들, 학교 교육을 받은 도롱뇽의 회상, 국제 공산당 선언문, 전시에 보내진 전보들...이 색색의 면지로 구성되어 있다(일본어로 된 부분도 있는데 일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끄럽게도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엉터리 일본어가 아닐까 한다) ㅡ (세심한 옮긴이주와 별도의 색인으로 엮어진 지명 색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편집) 출판사에 감사와 영광을!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동물에게 주는 메시지건, 그가 풍자하려는 파시즘이건, 뭐가 어쨌건 아쉽다. 그래서 나는 작가 내면의 목소리를 빌린다. 「이렇게 끝낼 거야?(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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