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를 맞는 사과, 쪼아 먹히는 사과, 잡아 떼이는 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 썩는 사과, 운반되는 사과, 소화되는 사과, 소비되는 사과, 사과라 부를 필요도 없는 사과……. 징그러울 정도로 사과를 고집하는 시인의 글이다(시 전문은 더 징글맞다). 시는 시인의 감정 표현을 넘어서 때때로 언어 자체에서 이어지는 연상과 상상, 결합, 해체, 조탁, 실험에 의해 깨지고 부서지기도 한다. 존 스튜어트에 의하면 서정시는 곧 엿듣는 발화이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어떤 이야기를 엿듣게 될 때, 우리가 전형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발화자와 문맥을 재구성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다.(조너선 컬러 『문학이론』) 비단 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 대상이 운문이라면 한층 유달리 이런 자세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텍스트 하나하나의 가리킴과 방향은 물론이거니와 발화자의 태도(혹은 성격)를 감상하고 상상하며 엿듣는 거다. 나는 시집에서 처음 언급한 표제작 「사과에 대한 고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시집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그 때문에 마음에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시의 삼분의 일가량은 사과에 관한 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과에 대한 모습이 나오긴 하나 그 역시도 어느 찰나의 사과를 그대로 나열한 듯이 무미건조할 뿐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오로지 사과만 남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시인에게 이런 취급(정의됨)을 받는 사과로선 불행할지도 모르겠다(정의된 순간 그 정의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는 식의 어렵고 난해한 메커니즘은 모르겠으나 사과의 입장에 서면 자신을 지독히도 고집하는 자, 혹은 지독할 만큼 자신에게 충실한 자가 마냥 탐탁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이 세계에서 시인에게 선택되어 불행하지 않은 삶은 사는 대상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양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을 멍하니 기다릴 때가 많다고 밝혔는데, 그러면서 남의 눈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도 썼다. 어딘가에서 귓결에 얻어듣기로, 작가란 가만히 있을 때야말로 진정으로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다니카와 슌타로도, 시인인 자신이 일반적인 노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혹 시인이 안개를 먹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한 마음을 품고 있다(어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시인은 밥이 아닌 안개를 먹는 건지도 모른다(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렇기에 사과를 향한 집착도 보이고(「사과에 대한 고집」) 방귀 뀔 때 나는 소리도 정밀히 연구하는가하면(「방귀 노래」) 어느 때는 시 자체의 태생적 전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거다(「2페이지 둘째 줄부터」).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시/시인의 그럴싸한 허무맹랑함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내가 이 시집에 대해 고집을 부리는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 폴란스키의 《혐오》에선 남성 혐오증을 가진 여주인공이 (말 그대로) 남자들을 죽인다. 너스바움에 의하면 혐오라는 감정에 담긴 핵심적인 사고는 자신이 오염될 것이라는 생각이며, 혐오의 감정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p.186) 역시 그녀는 '분개'가ㅡ 우리는 취약한 존재이므로ㅡ 우리가 마음 쓰는 대상이 어떤 부당한 행위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면, '혐오'는 자기기만과 헛된 열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본다. 폴란스키 영화의 남성 혐오증을 가진 여자와 같이 『혐오와 수치심』에도 비슷한 사례가 등장한다. 그는 야영지에서 섹스하던 레즈비언 둘을 총으로 쏜 남자로(한 명 사망, 한 명 중상), 일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뒤 리즈비언의 섹스에 주체할 수 없는 혐오와 불쾌함에 휩싸였다며 자신의 죄는 과실치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성적인 사람은 그냥 지켜보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라며 두 여성에게는 피의자를 도발하려는 행위가 없었다는 의미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 판결이 온당하다고 본다ㅡ 또 여전히 '도발'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지극히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도 생각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너스바움이 수시로 사용하고 있는 '이성적인 사람',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 '클래펌 사람(man of the Clapham omnibus)'이라는 표현이다. '클래펌 사람'은 클래펌(처음 사용했을 당시 일반적인 런던을 대표하는 평범한 통근 교외 지역) 통근 버스를 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영국 민법에서 이성적으로 교육받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이를테면 잭, 질, 마이크, 낸시와 같이 별 의미 없는 필부필부). 그런데 위에서 말한 '도발'과 같이 '평균적인 사람'도 보기에 따라서는 꽤 모호한 속성을 띤다. 물론 클래펌 사람은 포르노 영화나 소도미, 시체 성애 행위를 찾아다니는 부류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겨지긴 한다.(p.250) 그런데 책에 소개된 음란물에 대한 법률적인 기준과 설명(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확립된)에는 바로 이 '동시대의 사회 기준을 적용하는 평균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바로 외설과 음란에 대해 '호색적인 관심'과 '명백히 불쾌한' 것이라고 말이다. 당시 대법원 판사는 '음란한'에 대한 정의로 「혐오스러운 느낌을 주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에 완전히 거슬리는…… 감각이나 취향 또는 고상함에 거슬리는…… 혐오스럽고, 더러우며, 메스꺼운……」이라고 옥스퍼드 영어사전 등에 실린 내용을 인용했다.



……혐오는 (인지된) 위험과도 다르다. (독버섯과 같이) 위험한 대상은 그것을 섭취하지만 않는다면 같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지만, 혐오스러운 대상은 그렇지 않다. 또한 독을 제거한 독버섯처럼 위험이 제거되면 위험한 대상은 먹을 수 있지만, 혐오스러운 대상은 모든 위험이 제거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다.
ㅡ 본문 p.168



책에서 혐오는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너스바움은 혐오를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로 나눈다), 역자가 적은 예시에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지적장애인이 등장한다. 거기서 나는 그가 내게 가까워질까 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 그러나 이런 장애인에 관련된 또 다른 요소, 그리고 너스바움이 이야기하려는 또 하나의 명제가 바로 '수치심(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런 감정)'이다. '선천적' 혹은 '핸디캡'이란 단어를 써 가며 사회는 그들에게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시력이 안 좋거나 무릎이 약하거나 건망증이 있는가하면 결국에는 또 죽을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엄청난 노력을 해 특정 성취를 이루더라도 그것에 대해 '정상적인' 일반들에게 똑같이 요구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4분에 1,600여 미터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그런 사람만 존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지는 않는다는 거다(대신 우리에겐 자동차나 버스가 있다).(p.553) 분명 사회는 장애인 혹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만 존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는 않았다(자동차는 일반적이고 휠체어는 일반적이지 않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불편한 장애인을 비정상적이라고 낙인찍는 인식 자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장애인은 사람 혹은 도구에 의존해야 하는데,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혹은 덜 가진 사람)은 그보다 덜 의존할 뿐이라는 거다ㅡ 이러한 낙인찍기는 성 범죄자의 신상 공개가 타당한지 여부에서도 논의될 수 있다(심심찮게 벌어지는 인종차별도 매한가지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훌륭한 저작 『노년』에서도 이러한 '혐오'와 '수치심'이 이야기되고 있다. 노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에 접어든 사람들이 하는 섹스나 연애는 때때로 추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또 젊은이(노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노인들이 기계 같은 도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으면 직접 도와주기보다는 말로만 설명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실컷 구경한 뒤 한참 뒤에야 거들며 타박하는 거다ㅡ 여기에는 혐오(드러내기)와 수치심(주기)이 잘 나타나 있다. 『혐오와 수치심』이 특이한 건, 이 두 가지 개념을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적 근거 위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혐오가 어떤 행위를 불법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중심적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하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와 같이 말이다. 잘못과 잘못을 저지른 대상을 구분 지어 존중하라는 은유임은 알고 있으나 이러한 인식은 쉬 이루어지지 않는다(나 역시도).



낙인찍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낙인찍는 행위로 엄청난 피해를 본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도 법적 측면에서나 시민으로서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된다. 동의하지 않는 제3자에게 아무런 위해를 주지 않음에도 종교나 생활양식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법 아래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다.
ㅡ 본문 p.411



(여기 다른 차원의 좋은 예시가 있다. 죄인을 수레에 태워 저자를 한 바퀴 빙 도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진 자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동시에 죄인들에겐 수치심을 안긴다.) 레즈비언을 죽인 사례와 같이 두 여성은 피의자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고, 그들은 (재판부에 따르면) '합법적인 도발'을 하지 않았으며, 피의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공격적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법정에 선 남자는 그들로부터 혐오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그를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녹록하지 않은 문제가 간섭하게 된다. 이 '혐오'에 대한 인식이 늘 법적 잣대 위에서 놀거나 늘 충분히 인정될 만큼의 적확성을 띤다면 두 레즈비언에겐 피의자에게 혐오감을 주었다는 죄명이 씌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피의자의 정당방위 어쩌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차치하고)ㅡ 그런 인식의 바탕에서 '클래펌 사람'이라는 표현 또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너스바움이 혐오와 수치심에 우려를 드러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배적 집단과 구성원들이 예속된 집단과 그 구성원들에게 표출하는 불안감과 혐오는 결과적으로 차별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예속된(하부) 집단에 통제력을 가해 낙인을 줌으로써 지배 집단은 '정상'이라는 편안함을 안겨 주는 허구를 통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불안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p.603) 그러므로 법은 일정한 위해 형태를 대상으로 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는 행위의 경우에만 규제해야 한다는 거다. 물론 우리가 타인이 겪는 다양한 고통과 슬픔 등을 공감할 수 있다면 동시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긴 한데, 이것들을 나열해 놓고 선을 하나 그어 일거에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바로 생각해볼 문제다(분노, 동정, 의존 또한 마찬가지). 지배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즐길 수 있는 능력, 자신(은 물론이거니와)과 다른 사람의 불완전성과 동물성,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ㅡ 인간 삶에 내재된 깊은 어려움을 고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일 테니까.(p.6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위대한 생각 시리즈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 인권 선언이란 것이 있는데, 그중 제7조 항목에 이런 말이 있다. 「백수는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 사회는 백수의 문화생활 진작을 위해 노력할 책무가 있다.」 나도 백수이긴 하나, 또 하물며 백수라 해도 문화생활을 누릴 만한 정신적 여유는 가져야 온당하다. 특히 나는 책에 대해서는, 그것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공공의 미(美)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독서에 관해 설파한 것과 달리 내겐 '잃어버린 10년'이 존재한다. 십대 중반부터 이십대 중반 즈음까지, 교과서와 강의에 쓸 것이 아니면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는 것은 두루뭉술한 표현이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 권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주 고리타분하고 청맹과니 같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꽤 무서운 일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도서관이란 것을 처음 보았고 그때부터 그 언저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규모가 더 큰 도서관이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던 이 습성은 내게 한 가지 우울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 세계에 있는 책, 내가 읽고 싶은 모든 책을 죄다 내 방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입지로 보건대 어느 쪽도 충족하지 못했던, 책이란 것은 모름지기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을 시절의 발상이었다. 때문에 나는 일종의 리스트를 작성하게 되고 그때부터 부러 책을 읽지 않았다(일종의 시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작가와 책 제목, 출판사, 출간연도를 적는 메모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물론 그 시절과 달리 꽤 책을 많이 읽고 있다. 내 '잃어버린 10년'이란 그때의 우울감에서 발생했다. 지금 당장 여력이 없으니 리스트를 만들어 어른이 되었을 때 모조리 다 읽어보자, 하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나는 절판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대체 한번 만들어진 책이 왜 사라진단 말인가? 어릴 적 만들었던 메모를 지금 펼쳐보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책들이 부지기수다. 누구도 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줄 수는 없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프루스트가 쓴 「독서에 관하여」는 실은 존 러스킨의 책을 번역하며 쓴 역자 서문이다. 서문치고는 꽤 장문이나 그가 책과 독서라는 행위에 관해 적어놓은 생각들이 정겹기만 하다. 「독서가 그것 없이는 들어가지 못했을 마법의 열쇠로서 우리 내부에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독서는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 도대체가 나는 스스로 내 인생에서 10년(혹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이라는 시간을 지우고 뭘 했단 말인가? 내 감성에 불을 켜 줄 마법의 열쇠를 스스로 마다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프루스트가 독서를 중단하고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했던 길디긴 점심식사를 저주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도 독서에 관한 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누군가 말을 걸어 독서를 방해하는 것에서 그가 보였던 반응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독서란 적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정이고 그 대상이 죽은 자, 사라진 자라는 점은 사심 없음을 증명해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므로ㅡ 덧붙여 그는 독서를 추한 면을 보이는 다른 우정들에 비해 자유롭다고 말한다. 책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독서라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자신과는 다른 영혼이 개입하되 혼자 있을 때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p.37), 그리고 게으른 정신을 가치 있는 세계로 영구히 끌어들이는 임무를 띠는 것이다.(p.35) 내가 지나칠 정도로 수상쩍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잃어버린 10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 게으른 정신은 여전히 그때의 어린 꼬마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어릴 적 프루스트는 길었던 점식식사를 뒤로하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야 만다. 그러고는 자신의 안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방 안인지 밖인지 어디에 시선을 고정시켰는지 모른 채로 일어나 침대를 돌며 걷는다. 내일이면 잊힐 페이지 위의 어느 이름에 불과할 존재들이라고 해도, 자신이 탐닉하던 책을 무사히 끝장 보았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하고 대단한 일인가! 「우리의 어린 시절을 이루는 날들 중에는, 우리가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고 여겼거나 좋아하는 책과 같이 보낸 날들만이 어쩌면 진정으로 충만하게 보낸 날들이다.」 프루스트가 쓴 글의 첫머리이다. 맙소사, 내게 있어 진정으로 충만했던 날들은 언제였었나?



사족) 그런데 참 희한하지. 어째써 한번 빌려준 책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도, 신화로 말하다
현경미 글.사진 / 도래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굴제국 황제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들었다던 타지마할. 이를 넘는 인도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대학 시절 수상쩍은 책을 읽다가ㅡ 인도에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입보다 손으로 먼저 음식을 느끼기 위한 '사치 부리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보다 더 괴상하게도 나는 어릴 적부터 사찰이나 불구(佛具), 이슬람과 힌두 문화에 묘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집 밖에 나서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만 돌리면 예닐곱 개나 되는 십자가를 볼 수가 있는데,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십자 모양 네온사인을 보면서 정체를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알지도 못하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만 기분을 느껴 외려 그쪽에 반감이 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팔이 두 쌍 이상 달린 힌두교 신들이 그렇게나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브라마(Brahma, 창조주)인지 비슈누(Vishnu, 보존자: 영화 《아바타》의 모델이란다)인지 시바(Shiva, 파괴자)인지 꼭 맞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다만 재물을 관장하는 신 락슈미(Lakshmi)와 시바의 아들 가네슈(Ganesh)만큼은 확실히 알 수가 있고, 그 때문인지 이 두 신에 가장 흥미가 동했다. 부의 상징인 락슈미는 연꽃 위에 오른 풍만한 몸매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락슈미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재물을 관장하기 때문인데, 단지 부를 가져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게으르고 낭비를 하거나 겸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모든 재물을 거두어 간다고 한다. 그러나 외양만으로 보자면 가네슈가 주는 강한 인상을 따라갈 수 없을 듯하다(개인적으로도 가네슈에게 더 흥미를 느낀다). 가네슈는 파괴의 신 시바의 아들인데, 시바가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 악업, 무지 등이다.(p.23)






이 파괴의 신의 아들인 가네슈는 일단 코끼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몸은 사람의 것인데 조그만 쥐를 타고 다니며, 인도 사람들은 풍요와 지혜의 신인 가네슈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복을 준다고 믿는단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쪽 상아가 부러져 있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를 받아 적기 위해 자신의 상아를 잘랐다는 전설 때문인데 신이 제 뼈를 잘라 필기구로 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하고 기묘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 어떤 문화(권)의 어떤 신(화)이건 사후세계와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볼 때, 대개 그 이야기는 '이러하면 복을 받고 저러하면 벌을 받는다' 쯤이 될 거다. 특히 힌두교의 장례에서는 화장한 뒤 뼈와 재를 강물에 흘려보낸다는데 처음의 불[火]은 해탈과 해방을, 나중의 물[水]은 윤회와 재탄생을 뜻한다. 여기엔 아예 처음부터 인간 영혼이 이 두 가지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말을 끌어와도 죄를 범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사후세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는 ①종교가 인간생활에 있어 별 효용이 없거나 ②종교의 교리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사회가 유지되거나, 이 둘의 논리 사이에서 언제나 휘청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힌두교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종교에 대해 이렇다 할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나름대로 인간 삶에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면 그저 그걸로 됐다는 입장이다. 언제 어디에서건 대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내가 힌두 문화에 대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그것이 이 세계에서 확인되지 않을 때 더 신기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일러 있음]




껏 재며 고독한 척은 혼자 다 하는 해리. 알코올뿐 아니라 범죄 자체에도 중독된 해리. 그래도 끝내 소위 '오슬로 3부작'이라는 미니시리즈의 마지막 능선을 넘으며 두 개의 범죄가 마무리된다. 하나는 『데빌스 스타』만의, 또 하나는 『레드브레스트』와 『네메시스』를 이어 비로소 완결되는 내부 속의 내부의 문제. 여기서 해리가 가부좌를 겯고 앉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계시라도 받으려는 듯 틀어놓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이 재미있다. 설명대로 영화 《컨버세이션》에서 진 해크먼이 야간 버스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인파가 넘치는 공원에서 특정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는데 『데빌스 스타』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원이라는 장소가 심심찮게 무대로 활용되고 있고, 심지어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 이름 역시 모두 '해리'로 같기 때문이다ㅡ 그리고 양쪽 다 공원이라는 개방된 공간 속에 숨겨진 은밀한 작업이 부각된다, 영화 속 해리는 버스에 앉아 타인들과 격리된 고독을 느끼며 소설 속 해리 또한 마찬가지로 여름의 땀 속에서 자신을 황폐화시킨다. (허황한 개똥철학은 여기까지만) 그런데 실은 『데빌스 스타』의 본줄기는 아주 단순하다. 전작들에 비해 정치적이거나 심각한 정립의 문제 따위는 없고,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처럼 시원시원하다ㅡ 그저 연쇄 살인범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므로. 이런 단순한 구조(構造)를 구조(救助)하기 위한 방편은 전작들에서 이어져 또 다른 비중으로 간섭하는 사건일 텐데, 바로 <해리 홀레 vs 톰 볼레르> 요소이다ㅡ 연쇄 살인범과 톰을 비교하면 어느 쪽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있다. 물론 이쪽도 고전적 클리셰 냄새가 짙게 나지만 그 클리셰를 상쇄하기 위한 클리셰가 들어있기도 하다. 시종일관 톰은 해리로부터 사정 대상 1호라는 분위기를 자아내 독자는 어떻게든 그 빌어먹을 작자가 법의 심판대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거나. 그런데 희한한 건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톰이 마지막에 가서는 악당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는 거다. 어찌 보면 괴물을 쫓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해리(정말 그럴까?)와는 달리 이자는 진정한 악당은 되지 못할 팔자인 것만 같다. 비유가 다소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김기덕의 《악어》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의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용패라는 인물은 물속에서 여인과 자신의 손에 수갑을 한쪽씩 차고 있고(그는 죽으려 한다), 시간이 잠시 흘러 죽음(익사)의 고통을 참지 못한 그는 수갑을 끊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대로 죽고 만다. 추잡한 죽음이다. 이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톰 역시 끝에 가서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마는데, 이로써 배트맨과 한 쌍인 조커와 같이 일관된 믿음과 자아 드러내기를 거리끼지 않는 인물은 톰 쪽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직업처럼 예술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데빌스 스타』는 이 단일 소설만의 이야기, 동료의 죽음에 있어 비로소 끝장을 보는 해리의 이야기, 해리 자신의 정신적 부침(浮沈)의 이야기, 이 세 가지 줄기로 갈라지는데, 어딘지 모르게 앞의 소설들을 다소 힘겹게 읽었던 터라 굉장히 깔끔하고 단출하게도 느껴진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과연 시버첸 부인의 하숙인의 등장이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는 것과, 진심을 담아 고백하건대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보다 택시기사 외위스테인 쪽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는재로 2015-04-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는말그대로악을쫓다스스노악에물들어가는인물이고 프린시는악에물든해리의또다른인생의하나가아닐까하는생각이드네요결국자신의손으로모든일을해결하러고하는ㄱ모슨도그렇고

아잇 2015-04-19 10:4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가면 갈수록 배트맨처럼 안티히어로의 모습이 부각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