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기지 만들기
오가타 다카히로 지음, 임윤정.한누리 옮김, 노리타케 그림 / 프로파간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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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 『명탐정 코난』에서 본 기억이 있다. 멈춰있는 벽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내려가면 그 아래 흩어진 트럼프가 있고, 유일하게 핀으로 고정된 카드의 무늬(아마도 스페이드였을 것이다)를 따라가면 또 다른 단서가 있어서 결국엔 누군가가 숨겨놓은 재미난 것들을 발견한다는 에피소드. 책에서 비밀기지라고 거창하게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비밀이라는 건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 거다.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도시에 현대적 건축물이 많아짐에 따라 공략할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비상금을 숨기기도 하며, 자물쇠 달린 상자를 구해서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넣어 놓는가하면, 학교 창고 어딘가에서 몰래 빨간책을 공유하기도 한다(때때로 거기에서 오는, 그러니까 나만이 혹은 나와 몇몇의 친구들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매료되어서 즐거움을 느낀다). 사탕이 들어있던 네모반듯한 깡통에다가 어린 시절의 물건을 담아 묻은 뒤 십수 년이 지난 후에 땅을 파내 친구들과 파안대소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타임캡슐을 비롯해 아파트 주차장 부근의 어두침침한 공간, 퀴퀴한 다락방, 체육관 창고, 집 근처 공터에서는 아직도 어린아이들이 저들만의 비밀기지를 만들어 즐거이 놀고 있으리라(정말이지 그랬으면 한다). 『비밀기지 만들기』의 첫머리에선 '세 가지 간(間)'을 언급한다. 하나, 공간(空間). 둘, 시간(時間). 셋, 친구(仲間, 일본어로 동료, 친구라는 뜻). 도시에서의 공간 찾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이 짬을 낸다는 것 역시 쉽지 않고, 같은 이유로 자신의 또래와 어울리는 것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 책에서는 아주 작은 비밀기지부터(집 안의 매트리트 틈새, 다리 밑, 폐허 등) 아예 사람 몇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물까지 다루는데, 그보다 저자 오가타 다카히로라는 양반이 설립한 일본기지학회라는 단체가 흥미롭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2006년에 회원이 120명에 달했고 각종 워크숍이나 앙케트, 전람회 등의 활동을 한단다(회칙도 있는데, 기지학회 회원은 기지에 대해 말할 때 자연스레 미소 짓는 사람, 무엇을 보아도 '기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세상을 좀 더 재미있게 살아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것은 이미 이 책만 가지고라도 많은 부분을 달성한 듯싶다. 이렇듯 가전제품을 싸고 있던 골판지나 빈 페트병만으로도 얼마든지 비밀스런 작업이 가능할 텐데, 그런데, 그런데, 얼마 전 SNS에서 접한 누군가의 멘트가 생각난다. 텔레비전 방송이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구를 보여준다는 거였다. 말인즉슨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집을 바꾸는 걸 보여주다가, 어딘가에 나가 하룻밤을 자며 노는 것을 보여주다가, 결혼하는 것을 보여주다가, 애 키우는 것을 보여주다가, 이제는 집에서 밥 먹는 것까지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들판에 자란 잡초를 묶어 어설픈 덫을 만들거나 골판지 상자를 접어 구멍을 뚫은 뒤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일이 점점 없어진다는 이야기일까? 그럼 앞으로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노는 법'을 알려줘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쓰레기라도 생각했던 그 물건이 근사한 나만의 비밀기지로 탄생할 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작업물이랍시고 만들었던 걸 들켜 혼났을 때, 총 공사비 0원의 말도 안 되는 건축물을 완성했을 때, 그때 까무러칠 듯 좋아했던 기억이 그저 기억으로만 남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이미지 출처: 출판사 홈페이지 http://graphicmag.co.kr/wordpress/?p=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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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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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무감동에 불안이 더해진다. 오늘의 사람/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는 것을 거리끼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사람/사람들의 불안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혹여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내게 오지는 않을까 하면서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불안감에 불안해한다. 동시에 (대체로) 내 신체와 소유물을 해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게 실질적 위협이 없는 한 다수의 쪽에 서 있고자 한다. 그편이 내 불안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불안(감)이라는 건 때때로 내게 긍정의 작용을 이루어내기도 하는데, 적절한 불안과 긴장은 나를 무기력에 빠뜨리지 않고 더 이상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추진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편 또 당연히, 그러한 불안은 그것 스스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따라서 책의 결론 부분이 다소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터라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기도 하다). 불안은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수작을 건다. 전쟁, 건강하지 않음, 자연재해, 욕망 채우기에 실패한 뒤 느끼는 불만족. 특히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실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또 다른 불안이 야기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소비자인 우리의 '선택의 자유'라 일컬어지는 방식에서 오는 '선택의 권력'이 각각의 소비자가 아닌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것, 좀 더 나은 조건을 기대하며 통신사를 끊임없이 바꾸는 사람들, 이런저런 불안을 덜고자 자기계발서와 각종 멘토를 찾는 모습 등에서(p.112),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시콜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의 틈바구니를 돌아다녀야만 한다는 한층 더 나아간 새로운 불안에 휘둘리고 만다.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끔 설계되어 가면서도 그런 만큼 인간관계 또한 단속적이거나 혹은 정반대로 흐를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의미인데, 예컨대 가짓수 많은 선택지에서 특정한 것을 고르기는 쉬워도 '무한에 가까운 선택의 자유' 앞에 서면 외려 갈팡질팡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선택지는 없으니 그냥 원하는 것을 아무거나 하시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p.113: 오늘날 소비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파트너를 구하는 논리와 새 차를 사는 논리가 다르지 않다. 즉, 먼저 광범위하게 시장조사를 한다. 다음으로는 욕망하는 ‘대상’의 품질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러고는 혼전 계약서를 작성한다. 시간이 지나면 중고를 새것으로 바꾸거나, 번거로운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정하고 단기 임대 계약을 맺기도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 첫머리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위험(과 거기서 생겨나는 공포 혹은 불안)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위험, 사회질서의 지속 가능성과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 등. 그러나 이런 위험의 가짓수는 비단 바우만이나 살레츨이 지적하고 있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불안 요소라 인정하는 것들 외에 새로운 공포의 영역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불안감과 무서움으로 점철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서 늘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공포에 빠져서 지내지는 않을 것이므로.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는 그런 무서운 사태의 가능성을 잊어버릴 교묘한 전략을 넘칠 만큼 갖고 있다.(앞의 책 p.1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계속해서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의 형태 또한 그럴 공산이 커야 하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불안 요소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개인/단체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좋지 않은 부담스러운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텐데, 살레츨이 책을 끝내며 말한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 가지는 의미, 즉 약간의 불안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안녕과 평온을 저해한다기보다 주의의 결여를 방지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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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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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7부작으로 정리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중 1부 『로마의 일인자』 제1권. 하나같이 두껍기 그지없어서 한국어 번역이 완료되면 총 스무 권쯤은 될 것 같다. 꾸준한 투자와 관심이 없으면 좌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소위 대작이 갖는 불안감과 분권 없이 출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과거 2부까지 출간되었다 절판을 겪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니 이번만큼은……).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해도 될 정도가 아닐는지. 『로마의 일인자』 1권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리우스(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 세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열여덟 먹은 딸과 그녀보다 서른은 좋이 나이 든 군인 마리우스를 결혼시키고자 하고, 카이사르의 아내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사업 문제'라 부르며(맙소사!), 마리우스가 앞으로 철저히 혼자가 될 거라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의 이혼을 요구하면서 내뱉는 '그러게 작은 개라도 길러보라'라는 우스꽝스런 어조, 명문가 출신이나 파락호에 난봉꾼인 술라의 운명 등이 얽히고설킨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자신의 피호민(被護民)인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이 유독 자기 피호민들이 많은 지역에 공공사업 계획을 추진하거나, 유서 깊은 가문과 돈이 결혼이란 방식으로 어우러져 일종의 파급효과를 내거나, 유력 정치인(들)이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는 모양새 그리고 끔찍하고 더러운 파벌 정치는 역시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총 세 권으로 제작될 1부 『로마의 일인자』를 다 읽어보아야 이 걸작의 겉핥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여기까지다. 다만 시리아의 점술가 마르타가 마리우스를 두고 일곱 번이나 집정관이 되어 '로마 제3의 건국자'란 칭호를 얻을 거라 읊은 예언과 더불어, 독버섯 등으로 두 여자를 저세상으로 보낸 야심가 술라가 카이사르의 둘째 딸과 결혼하며 얻은 카이사르 가문의 후원(동시에 동서지간이 된 마리우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시작할 정치적 입지 다지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가 되리라. 『로마의 일인자』가 모습을 갖추고 가이드북(용어와 개요를 정리한 소책자일 듯하다)과 함께 출간되는 것은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 유명했던 책도 읽지 않았고 로마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전반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콜린 매컬로의 팩션이 일반 역사 서적에 비해 제격이지 않겠나. 아마도 로마제국을 다룬 딱딱한 역사서 한 권을 읽으라 했다면 쉬 접근하기 어려웠을 터다(13년간의 고증과 20년에 가까운 집필 기간을 거쳤다던가! 심지어 연구와 독서로 인해 심지어 매컬로 자신은 시력마저 잃고 말았단다!). 그리고 이제 <마스터 오브 로마> 1부가 모습을 갖춘다. 카이사르 가문과 마리우스의 결합에서 시작된 로마 이야기의 시작이,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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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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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을 읽어 본 거라곤 시집 『햄거버에 대한 명상』뿐이다. 그의 공부 책을 읽는 것도 거의 십 년 만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어딘지 모르게 나는 장정일로부터 '도망중인 사나이'인 것만 같다(실제로 그의 작품 중 「도망중인 사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내가 쓴 맥락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장정일이 꿈꾸는 인문과 내가 꿈꾸는 인문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여기는 인문 또한 매한가지일는지도. 「존경받던 어른이 어쩌다 우리의 실망을 사는 경우는 바로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문에 적어놓은 말이다. 중용? 좋다. 어디에서든 중간만 하라, 모나게 튀지 말고, 앞서가지도 말며, 뒤처지지도 말아라. 어르신들의 현명한 가르침이다. 아니, 현명한 가르침이었다. 다시 한 번 중용이라고? 좋다, 좋다. 그런데 흑과 백 사이의 회색분자며 기회주의자라니? 얼토당토않다. 외려 흑과 백에 있는 자들의 정체가 아리송할 때가 더 많은 건 왜일까(이 세계를 흑, 회, 백으로 딱 잘라 삼등분해서 세 개의 자루에다가 담을 수 없을지라도).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다. 내가 서서 발을 딛고 있는 곳과 내 입을 통해 말해진 것을 나조차도 알지 못한 채 강 한복판에 있다면 이것도 중립은 중립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기계적 중립'이다. 그러므로 다시 '공부'인 거다. 하다못해 남을 응징하거나, 내 처지를 변명하거나, 무언가의 뻔뻔함을 타파하거나, 과거에 머무르고 싶지 않거나, 어느 쪽이건 공부다. 행동하는 철학자가 없다며 우는소리하기 전에 일단 공부다. 물론 장정일의 때로는 수상쩍은 공부가 나나 우리에게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명제를 던져주지 않을 공산도 있다. 탱크같이 밀어붙여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계적이고 무지한 중용'을 고민하도록 만들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식과 사유의 덫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장정일의 공부에 대한 절절한 노력은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뾰족한 가시 위에 앉게끔 유도한다. 세모꼴 지붕 한가운데에 달걀을 얹어놓으면 어느 쪽으로든 굴러가는 것처럼. 균형을 잘 잡아 그대로 있으면 또 어떤가. 그쯤 되면 이미 수많은 고민을 한 끝에 중용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텐데. (다만 깨지지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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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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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가 가졌던 알제리나 나치에 대한 생각은 저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재난 소설로서의 『페스트』를 읽고 싶었다. 직간접적 영어(囹圄) 생활 속에서 불특정의 사람들이 병들고, 죽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탄복하고, 타인의 불행하지 않음에 화를 낸다.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도 닮아 있는데, 실제로 리유의 한 발짝 떨어진 서술과 진노 선생 집에 얹혀사는 이름 없는 고양이의 깨달음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전염병 출현, 심각성 대두, 안정기, 소설은 대략적으로 이 구조에 따라 움직인다. 당국은 도시를 폐쇄하고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려 하나 이미 늦었고, 병명이 공포되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긴 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며, 또 어김없이 종교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타인의 괴로움에 기꺼워하던 아무개는 전염병 확산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자기 혼자만이 고통에 빠져있다고 여겨 이젠 그 스스로가 전염병과 같은 불행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해하려 한다. 특히 랑베르의 인물상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폐쇄된 도시를 빠져나가고자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어 리유(의사)를 돕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이런 고담준론 같은 명제가 현실에 적용되기란 요원할는지 모른다. 『독감』(사이언스북스, 2003)을 쓴 지나 콜라타는, 저 옛날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 기록을 쓴 투키디데스를 인용한다. 「전염병은 격심한 무절제와 방종을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던 일을 공공연하게 시도했다.」 그때와 지금의 의학 수준과 사고방식의 상이함은 차치하고라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구분하기 힘들다. 소설 속의 시민들도 탈출할 수 없는 도시 안에서 영화와 술에 빠져 피로와 죽음의 고통을 잊으려 한다. 질병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 건강 증명서를 써주지 않는 의사를 비난하는 자, 혼란스런 틈을 놓치지 않고 암거래에 손을 대는 자, 이런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자. 이제 불행은 비현실에서 이편의 현실 속으로 편입된 지 오래고, 작중 타루라는 인물의 '죽음 권하는 사회'에 관한 환멸에 가까운 폭로만이 허위허위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관찰, 그리고 관찰. 『페스트』는 끊임없는 관찰로 사람들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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