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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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산도 식후경이고 혁명도 웃고 난 뒤에.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이 언제 어디서건 유효성을 갖게 된다면 그건 풍자라는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현재 <민상토론>이라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꼭지가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 또한 매한가지. 씁쓸함이 배가되는 건 그 꼭지가 '정치판'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판을 마음껏 풍자할 수 없는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아지즈 네신 본인이 이러한 글로 수감되기도 한 걸 보면 풍자와 웃음의 자유가 갖는 파급과 이중성이 더더욱 부각된다). 수록된 첫 글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는 동네 이장 선거를 다룬다. 오랫동안 이장이었던 외메르를 갈아 치우자는 주민들의 결심이 굳은 가운데,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외메르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소송이다 뭐다 하며 어려움 하나씩을 격고 있고 외메르만이 그 해결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행여 단합이 깨질까 조심조심 외메르와 접선(!)하려는 주민들의 의지와는 달리 결국 그들은 한날한시 외메르 영감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고, 절대 외메르를 뽑지 않겠다는 말은 선거 당일 무색해지고 만다. <혁명이, 아무도 모르게>의 모습은 혁명을 꾀하는 자들이 성공한 후 그 사실을 알릴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 심지어 자신들이 꼭 혁명을 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다른 혁명 단체를 발견한 뒤 그들을 체포하고 나서야 기어이 자신들만의 혁명에 성공한다. 그런가하면 <모든 것은 주지사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화통만 붙잡은 채 서로 일처리를 미루는 공무원들을 꼬집는다. 사실 '웃음의 자유'는 저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야기된다. 거기에서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을 싫어한다. 왜?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없애면 신앙도 없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네이버캐스트, 진회숙) 웃음이 끊기고 헤게모니를 쥔 자에 대한 풍자마저 사라진 세계가 어떨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 사회가 공포로 가득 차고 황폐해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외국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가재도구를 집으로 들이는 이야기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온다>에서처럼 쓸데없는 습성으로 점철된 사람들은 비단 소설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지붕 위에 미친놈이 있다>와 같이 끊임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작자들 또한 텍스트 안에만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담론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풍자라는 것이 웃음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풍자는 풍자 그 자체가 주어가 되어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공격해야만 한다. 때로는 계몽의 성격을 띠면서, 이를테면 (이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으나) 하부(계층)에서 상부(계층)를 공격하는, 그래서 특히 기득권과 그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는 대상을 깎아내리고 우습게 만들어 조소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풍자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언가를 깨부수고 공격함으로써 사회를 밝게 만들기도 한다. A가 B를 공격하고 조롱거리로 만드는데 사회가 밝아진다? 일견 이상하게도 들리지만 적절한 시의성을 지닌 풍자가 잘못된 것(들)을 꼬집는다면 자연스레 수긍이 간다. 왜? 앞에서 언급했듯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에, 기득권(층)을 조롱해 거기에서 웃음과 해학, 나아가 경종을 울려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상부의 무게에서 벗어나려고 할 게 빤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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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 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3
미우라 시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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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의 플로베르는 어느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 내가 늙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영혼의 증거인가! 나의 육신은 쇠약해지고, 나의 사고는 성장한다. 나의 노년에 일종의 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책세상, 1994) 구니마사와 겐지로는 어느 쪽일까. 특히 구니마사는 '망설이고 힘없는 노년'의 전형으로, 젊은 사람들로부터의 비웃음의 대상이고 자신을 키워준 사고방식과 문화에 이제는 거꾸로 당하고 있으며 늙고 지쳐 가족들에게서 팽(烹) 당한 뒤 멸시받는다. 겐지로는 일반적이지는 않으나 짱짱한 정신상태로 무장한 노인이고. 둘의 차이는 '꼰대스러움'의 정도인데,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다루는 방법에서 구니마사와 겐지로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둘 다 겐지로처럼 파락호 같은 남자들이었다면 일흔을 넘기기 전에 양쪽 모두 저세상으로 갔으리라). 그러나 어느 하나가 요통으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해도 단박에 달려와 줄 사람은 죽마고우뿐이고, 결혼을 위해 야반도주를 획책하는 것에도 도움을 줄 사람은 죽마고우뿐이며, 때때로 심술궂게 타박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죽마고우 그들뿐이다. 그리고 두 인물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노인이라는 설정이 소설을 이채롭게 만든다. 퇴직한 은행원과 전통 비녀를 만드는 직인의 이야기, 구니마사와 겐지로라는 양반들은 한량처럼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그들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평균적 인간이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체득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개념이 약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매일같이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는 지금 어딘지 모르게 경험과 지식 혹은 지혜는 날이 갈수록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으로 추락한다.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열등한 존재이고 모든 일에 서투름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이 지휘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가끔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살아갈 의욕을 얻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연배의 사람들과의 병실 생활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조직 문화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그치지 않는 것이, 병실 밖 세상은 줄기차게 그들을 향해서 젊은 사람들의 부양을 받아야 하는 인간이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사 & 겐』은 소위 '요절복통', '좌충우돌'과 같은 말처럼 건강한 웃음을 자아내는 소설이다(한편으론 그들이 살아온 이력을 끼워 넣음으로써 애잔하게 보이기도 한다).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털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노인네라니, 이런 작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모쪼록 구니마사 씨, 겐지로 씨, 오래오래 사세요(주제넘게 명령조로 말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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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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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전문적 지식 없이도 쉬 읽을 수 있도록 쓰인 글이라는 걸 알 수가 있다. 특히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난방법을 읽을 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도 했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일본에서 살 적 멍청하게도 오른손을 다쳐 꿰맨 적이 있었는데, 소독과 붕대 교체를 위해 병원엘 가는 길이었다. 택시로 이동했던 첫날과 달리 지리를 몰라 헤매다가 점잖아 뵈는 노신사에게 대뜸 길을 물었고, 그는 흔쾌히 가는 길이라며 나와 함께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밑도 끝도 없이 온돌 얘기를 꺼냈다. 초로의 신사는 일전에 다녀 온 한국 여행길을 떠올리면서 참 부럽다는 말을 내처 이었고 모퉁이 몇 개를 돌아 우리는 병원 앞에서 헤어졌다(일본에는 고타쓰라는 재미있는 물건이 있질 않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 옛날 일어난 반란에 대비를 하지 못한 한반도 이주 세력의 패배와 습기 많은 기후를 떠올려보건대 일본에 구들이란 딱히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불을 넣지 않는 여름철 구들 내부에 습기가 차 벌레가 끓거나 벽이 쉽게 무너지는 결함이 있단다. 여름이면 자연스레 습기가 많아지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잠시나마 겪었던 일본 날씨란 단순한 습기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아니면 샤워는 꿈도 못 꾸었다. 귀가해 씻는다 해도 그때부터 침대로 기어들어갈 때까지 다시 땀범벅으로 몸이 젖어버리기 때문. 재미있는 것은 온돌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땔감의 공급이 당시 서민 계층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느냐 하는 거다. 온돌이 상류층에서 서민 계층까지 두루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은 한국 건축이 갖는 문화적 특질의 중요한 요소인데, 보통 상류 계층과 하류 계층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p.233). (책에선 연료의 공급에 관한 수수께끼는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류층과 서민의 살림집 규모나 격차는 차치하고라도 기본적 실내 바닥 구조에서 공통된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류와 하류 계층의 문화적 동질성이 계층 간 이질성을 지닌 타 문화권의 건축과 구분 지을 수 있는 특질이라는 것이다. 또한 온돌이란 장치가 난방이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수단임은 분명하나 연료 소모에 있어 산림 고갈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한 나라 안에서도 건축의 구조가 다 다른데 산 넘고 물을 건너면 또 얼마나 다른 양상을 보일까. 지붕에 사용하는 구조물만 보더라도 반원형에서 원형으로 정착되어간 기와, 용마루 양 끝을 장식하는 장식물 치미(鴟尾, 바다에 살며 비를 다스리는 '치'라는 동물의 꼬리를 형상화했단다), 널빤지 위에 흙 대신 회를 얇게 깐 뒤 빈약하게 보이는 외관을 위해 화려한 채색 기와를 덮는 지붕 변화(중국), 또 잦은 비로 지붕의 기울기를 상대적으로 높이거나 암키와와 수키와를 하나로 만들어 무게를 줄인 간이식 기와의 등장(일본)까지, 한중일 삼국의 건축은 그야말로 서로의 기술과 양식의 소통과 함께 저마다의 특질을 살려 같고 또 다르게 걸어왔음에 다름 아니다(간간이 나타나는 쇄국정책으로 각국 문화의 단절이 초래된 점을 떠올려보라). 산이 많거나 적고, 기온이 높거나 낮고, 지질학적으로 안정되거나 불안정한 측면 등이 아니더라도 한데 모인 세 나라의 건축 차이는 (때로는) 미시적이고 소소한 방식의 놀라움을 가져온다. 이제는 주변 환경과 다른 사물들과의 조화까지 고려해 올라가는 건축물의 양태로 보건대 몇십 년 뒤, 몇백 년 뒤의 한중일 건축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지니게 될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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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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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 퍼런 총구 위에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앉아있는 사진을 보는, 그런 서사인 건가? 이 층짜리 보육원 건물 '아이들의 집'을 나간 베르너는 또 다른 아이들의 집에서, 거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사는 장님 소녀 마리로르는 폭격을 피해 옮긴 작은할아버지의 집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만든다. 두 아이를 관통하고 이어주는 것은 라디오. 100만 개의 귀를 단 하나의 입으로 결박하는 빌어먹을 라디오다.(1권 p.104) 마리로르는 6시 방향에 감자가, 버섯은 3시 방향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베르너는 자신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만 한다ㅡ 한쪽에선 라디오가 불법이며 한쪽에선 그 라디오를 찾아내야 하는 거리(영원히 볼 수 없을 다이아몬드는 언제쯤 빛을 발할까?). 탄광촌의 고아가 군사 학교에 들어가 매일을 실험실에서 보내고 있을 때, 자물쇠 장인의 어린 딸은 아버지가 만들어 준 마을의 모형을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동네의 라디오를 손볼 수 있는 꼬맹이 재주꾼이 이제는 총을 든 채 그 (불법적인) 라디오들을 찾으려는 순간, 베르너와 마리로르의 평행선은 서서히 교차될 준비를 시작한다. 마리로르가 라디오로 읽어주던 책이, 검은 줄이 죽죽 그어져 온전히 읽을 수 없던 베르너의 (여동생과 주고받았던) 편지처럼 그의 귀에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한 순간 ㅡ 얇은 판벽 하나를 사이에 둔 남녀가 서로를 확인하고 ㅡ 거기 있어요? ㅡ 티끌보다도 작은 세포에서 나뉘고, 증식하고, 더해지고 덜어지며, 분자들이 빙글빙글 돌고, 미세한 전기가 모이면서 그들 존재가 비로소 시작된 뒤(2권 p.368) 서로의 모습을 보고 손을 만질 수 있는 거리에 다가서서 ㅡ 베르너는 줄곧 라디오를 통해 마리로르의 목소리를 들었고, 마리로르는 이제 옷장을 치워 베르너의 존재를 확인한다. 새로운 문짝을 열어 생긴 탈출인가, 아니면 드디어 요새가 낯선 방문객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건가. (어린이 여러분,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론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나니아의 옷장은 현실의 판타지가 되어, 어지러운 수학 공식 위에서 그들이 볼 수 없었던 모든 빛을 끄집어낸다. 복숭아 통조림 속에서 손가락을 맞부딪히고, 서로의 발자국과 지팡이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각자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그들이 볼 수 있을 것만 같던 빛이란 건 찰나인가 영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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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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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당한다. 사회 정의를 고취하거나 불평등을 타개하고자 이런저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매번 그런 일은 무위로 그치고 나 자신조차도 종종 그럴 마음 또한 없어 보인다. 그런 와중에 일단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약간 놀라게 된다. 기회의 불평등과 결과의 불평등.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건 다들 동의할 텐데, 여기서 결과의 불평등이 간섭하게 된다. 예컨대 똑같은 출발선에서 경기를 시작하지만 결과에 따라 서로 다른 상이 돌아간다는 것. 또 특히 어떤 개인이 무료 급식소에 죽을 서게 된 것이 환경 요인 탓인지 노력 부족 탓인지 따진 후 그에 따라 수프를 나눠준다는 조건은 도덕적으로 혐오스럽다는 거다. 과거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3명 도와주기'가 결코 현실성이 없다는 데에 동의했지만 경기 결과나 급식소의 차등 시상과 조건부 무료의 '결과의 불평등'에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매번 당한다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정의와 불평등 구조에 관한 책을 읽을 적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돌아서면 곧 공허한 외침이라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이윤이 가파르게 늘어났다고 해서 노동자의 임금 또한 그에 따라 비슷한 비율로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개인이 일생 동안 유지한 부(富)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환원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가족과 세대에만 대물림되었기 때문이며, 국가의 각종 경제 지표 상황이 좋아졌음에도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그대로이거나 이전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매한가지다(따라서 앳킨슨이 자본소득의 역할과 소유권의 균형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고 있긴 하나 책을 덮은 뒤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소름이 끼친다. 기업 이익의 상당 부분은 재투자를 위해 유보되지 않던가? 누진 과세와 최고 세율이 언제 우리의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었나?). 빠르게 결론으로 가자면 앳킨슨은 불평등의 크기가 줄어들기를 바라며 말한다. 우리가 경제적 결과의 불평등을 줄이면 이는 민주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여겨지는 기회의 평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범죄와 질병 같은 여러 사회적 악은 오늘날 사회의 매우 불평등한 특성에 기인한다. 이런 것들은 빈곤과 불평등 수준을 낮춰야 할 수단적인 이유를 제공한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두려움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앳킨슨처럼 지금과 같은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좋은 사회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유로 염려하든 간에 질문은 그대로다…….(p.418) 그가 덧붙였듯이 이 책은 공상적 이상주의의 실행 방안은 아니다. 그러나 '불평등 회귀'는 언제고 또 올 것이며, 심지어 내가 불평등한 기회와 결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활인이라 나는 생각한다). 일자리 보장이 우리를 가난에서 탈출시킬 수 있을까? 소득 격차의 확대에 따른 소득 불평등을 확고하게 인지할 수 있을까? 단순히 빈곤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불평등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까? 『불평등을 넘어』는 크게 어렵지도 않고 많은 전문가적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앳킨슨이 미래를 낙관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도운 3명의 사람들이 각각 또 다른 3명씩의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한들, 그 이전에 나부터 다른 사람에게 먼저 도움을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3명 도와주기'가 시작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서다. 달리 말하면 불평등을 불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기득권층 또한 많고 굳건하다는 우려에서일 텐데, 앳킨슨의 여러 가지 제안들이 실질적인 개혁과 진보적인 방향성을 띠기 위해선 분명 행동하려는 욕구와 정치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ㅡ 불평등과 정치의 상호관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p.425) 그가 말미에 써놓은 19세기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마크 해나의 말을 들으니 다시금 어깨가 축 처지긴 하지만 말이다. 「정치에는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돈이고 두 번째는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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