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와 반문화 - 60년대,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추억
크리스티안 생-장-폴랭 지음, 성기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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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제의 불평등적 문화와 모순이 반문화를 등장시킨 것일까, 아니면 신좌파의 경향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문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어차피 같은 의미일지도). 어쨌든 지극히 사적이고 대안적이며 대항적인 히피가 하나의 부류 혹은 부족의 개념으로 대두되었던 것은 사회불안과 청년들의 실의에서 촉발했다ㅡ 역사와 문화가 돌고 도는 것이라면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새로운 히피들이 탄생하기 딱 좋은 시점이리라. 자유스런 옷차림과 사고방식, 섹스 또는 난교, 약물, 반전(反戰)의 아이콘, 그리고 학생과 청년. 히피(hippie, hippy)가 아무 곳에나 엉덩이(hip)를 깔고 앉는다 하여 얻은 명칭이므로 1.아무것도 하지 않음, 2.쓸모없음의 쓸모, 3.무용지물의 중시ㅡ 이러한 맥락이니 '필요' 혹은 '필수(적)'란 단어의 사용은 다소 거리끼게 된다. 물론 유행 따라가기, 시류에 편승하기, 어쩔 수 없이 따른 소비사회의 습성으로 보건대 그들은 목가적이라기보다 질풍노도의 청소년 쪽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플라스틱 시티를 거부하고 플라워 시티(플라워 파워)를 추구하며 집단유희, 열린 공간, 계급(화)의 부정ㅡ 그들 스스로도 그렇거니와 그들이 벌였던 모임과 회합, 축제의 성격 역시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동시에 또한 소비(소모, 일회)적이어서 내부로부터 발생한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폭력과 약물, 그 인공낙원, 환각세계ㅡ 이 또한 정치적 억압과 기성문화에 저항하고 새로운 쾌락과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서였다지만 결국 폭력과 마약은 그들 자신을 현실세계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수단으로도 작동하지 않았던가. (비틀스의 광팬이던 찰스 맨슨이 교도소에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고, 그런 비틀스는 「LSD」를 불렀으며, 또한 찰스 맨슨의 성을 딴 마릴린 맨슨이 「IDLTD[I Don't Like The Drugs(but the drugs like me)]」란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또한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에 의하면 오렌지주스 4분의 1컵과 설탕 1컵을 마시면 LSD의 환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단다) 전립선암으로 생을 마감한 프랭크 자파, 특이하게도 베이스가 없었던 도어스, 기타 화형식을 벌인 지미 헨드릭스 등, 1967년 미국에서 팔려나간 음반의 3분의 2가 록이었다고 할 만큼 반문화(혹은 프린지컬처에서 대중문화로의 이전)를 말하며 록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고,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지금도 빠르고 명백히 읽히는 것 또한 청년과 해방이라는 맥락에서 버릴 수 없는 주제들이다. 그러므로 반문화가 기존의 대중문화와 대치되면서도 그것에서 얻는 이점(특히 기존 지침의 틀 위에서)이 있었고 동시에 자유를 추구하던 투쟁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영원히 뒤죽박죽이면서도 매혹적인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 자기모순도 있었으나 다만 결과를 예측하지 않고자 했다는 점 또한 독특했다. 해방, 확산, 혁명, 부흥, 발전, 진보. 이 모든 것이 반문화의 결정(結晶)이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미국(에만 한정)의 6, 70년대는 그야말로 에너지틱하고 다이내믹한 맛과 멋이 있었고, 내가 나고 자란 8, 90년대만 하더라도 꽤나 흥미로웠던 것에 비해, 밀레니엄 후 10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은 영 아름답지 못한 것투성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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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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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저 유명했던 격문에서 '부끄러운 공포'를 언급했다. 용감한 자와 겁쟁이, 배신자, 부패한 인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자……. 그런가하면 만델라는 권력의 이름으로 자유인 신분을 얻을 수 있었을 때 ㅡ 「나는 나가지 않겠다. 당신들에겐 나를 석방할 힘이 없다.」 ㅡ 자신의 자유 의지를 굳건히 했다. 그리고 이 『자발적 복종』의 역자는 라 보에시의 주장을 위해 프랑스 혁명기의 웅변가 피에르 베르니오의 연설을 인용한다. 「독재자가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 위에 있지 않을 것이다.」 라 보에시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종종 사고뭉치, 불평분자, 사회부적응자, 빨갱이라 부르곤 하나, 이것은 그와 같은 자들이 냉소, 무질서, 빈정거림 등으로 점철되어 있을 때에만 비아냥거릴 심산으로 내뱉을 수 있는 단어들에 불과하다. 반대로 전대미문의 뻔뻔함과 역겨운 입놀림은 독재자를 한층 비열하게 하는 동시에 침묵하는 대중으로 하여금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러나 보라, 무엇인가 정의로운 것(들)을 실현키 위해 움직이는 투쟁은 이처럼 시대를 건너 영원히 썩지 않을 좋은 사례가 된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ㅡ 본문 p.81




라 보에시는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하기만 한다면 취득할 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p.50) 자유란 이 담배에서 저 담배로 불을 옮기듯 마음대로 조몰락거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욕을 당하고, 믿음이 꺾이고, 분노에 휩싸이며, 위선의 권력을 목도한 채 항의하지 않는 것은 그저 먼발치에 서서 시시껄렁한 야유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때때로 정의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죄악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지금의 세계는 우리에게 재갈과 안장에 길들여진 말 흉내를 내도록 한다. 「피리로 새소리를 내는 사냥꾼에 속아 쉽게 잡히는 새와 맛있는 지렁이를 끼운 낚시꾼에게 더 빨리 입질하는 물고기가 사람들 중에는 없다고 생각지 마시라.」(p.94) 왜 그런가? 독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수작을 걸며 접근하여 그들(우리)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런고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선거철이 되면 '투표 호갱'이 된다. 본디 우리의 것이었음을 망각한 자들이 달큼한 것을 대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동시에 벌어지는 일ㅡ 아주 끔찍한 일이다ㅡ 자발적 복종을 뿌리치려는 사람들은 권력과 독재에 반항하는 불순분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로 그들과 같은 국민(대중)으로부터 말이다. 과거 박정희가 유신(維新)을 계획하고 결과를 물어보자 망설임 없이 유신(幽神)이라고 답해 정부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 어느 유명한 점술가의 일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폭군이 나눠준 미약한 선물은 사실 독재자가 먼저 그들에게서 탈취해간 것을 일부 돌려주는 것일 뿐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ㅡ 본문 p.96




불꽃에 달려든 나비는 결국엔 타 죽고 만다. 이것은 독재와 그것에 자발적 복종 태도를 취하는 쪽 모두에 해당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타 죽기 전에 먼저 적응한다. 이 적응은 대단히 위험한 물건으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재롱부리는 말을 자처하면서 무시무시한 철퇴만 아니라면 감히 발버둥 칠 마음을 먹지 않게 된다. 그와 동시에 독재자는ㅡ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하고,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p.65)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자. '득도' 혹은 '달관'이란 단어가 성인(聖人)의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앞서 말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적응'과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주저 없이 동의할 수 있다. 지긋지긋해 얼른 끝내버리고 싶다는 순 엉터리 같은 위축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충실한 노예임을 증명케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누구 말마따나 '오른손으로 주는 척했던 것을 왼손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판단하지 못한 채 자발적인 복종에 발을 디밀고 마는 기이한, 아주 기괴한…… 이 빌어먹을 복종!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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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풋라이트
찰리 채플린.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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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반듯한 콧수염과 중절모로 해학과 풍자의 신화가 된 찰리 채플린. 『채플린의 풋라이트』는 그의 전기도 아니며 온전한 삶의 궤적을 두루 훑지는 않으나, 그가 제작했던 영화 《라임라이트》의 모태가 된 소설 『풋라이트』를 통해 채플린의 고단한 생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자전)소설에는 왕년에 잘나가는 배우였던 남자 칼베로와 그가 자살의 늪에서 구한 어린 여인 테리가 등장한다. 칼베로의 보살핌에 테리는 발레리나로서의 삶을 피우게 되지만 정작 그를 구해준 남자는 시들어가기만 할뿐 좀처럼 자신의 삶을 깨고 나아가지 못하고, 훗날 생애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죽어가는 칼베로의 눈에는 관객 앞에서 춤을 추는 테리의 모습이 달의 여신 디아나로 현현된다. 그러나 끝내 광대 칼베로의 머리엔 의사의 손에 의해 조용히 흰 천이 덮인다. 이처럼 소설 『풋라이트』는, 그리고 영화 《라임라이트》는 관객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물간 배우의 고달픔을 그린다. 예전엔 위세를 떨쳤으나 지금은 초라한 광대일 뿐인 칼베로, 채플린은 칼베로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했다. 두렵고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ㅡ 오래전 DVD를 구해서 보았는지 어쨌는지ㅡ 칼베로의 대사로 기억한다ㅡ 이 '시간'에 관한 문구가 어렴풋이 기억나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기어이 찾아내고 말았다. 「Time is the best author. It always writes the perfect ending.」 한국어로 옮기자면 「시간은 최고의 작가이지. 늘 완벽한 결말을 쓰거든.」 정도가 될 듯싶다. 이 말을 글로 쓰고 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채플린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보편성이 얼마나 슬픈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꼭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숨을 거둔 채플린은 생전 '영화는 나무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무를 흔들어대면 모든 느슨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떨어져 나가고 결국 본질적인 형식만 남게 된다는 의미다.(p.271) 비단 영화(제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는지 모른다. 『라임라이트』에서 흐르는 구슬픈 「테리의 테마」와 함께 채플린의 ㅡ 그의 영화와 삶, 그리고 우리의 삶 ㅡ 희비극은, 찬란함과 애달픔을 모두 지닌 오늘날의 우리로 하여금 화려한 조명 뒤 쓸쓸한 뒷모습을 되살려낸다. 과거 코미디언 박명수가 끄집어낸 역발상 또한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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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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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이맛살 같은 등고선을 죽 따라 내려가면 별의별 것들이 다 보인다. 카페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고, 아파트를 흉내 낸 고시원과 원룸도 보이고, 학교도 보이고, 교회도 보이고, 사람도 보인다. 꼿꼿이, 영원히 수그러들지 않을 것만 같은, 그래서 우리를 현기증 나게 하고 때때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도 하는, 고층빌딩들은 페니스처럼 잔뜩 열이 올라있다. 이 시점에서 문득 제목에 있는 ‘작동’과 ‘소진’이란 타이틀과 부제의 단어들이 하나로 겹쳐 보인다. 왜 그런가. 작동했으므로 끝내 소진되는 것인가, 아니면 한쪽에선 작동을 한쪽에선 소진을 동시다발적으로 가져가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작동하기도 전에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는 의미인가. 알 수도 없고, 좀처럼 머릿속에서 내보내기도 힘든 물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반대로 생각해온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한다. 어떤 이의 소진으로 발생한 믿기 힘든 은유와 한계가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으로써 스스로를 작동케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다룬 서울의 장소들은 반드시 특정 공간일 필요도,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장소일 필요도 없다 (...) 그러므로 이 책은 서울에 관한 책이지만 서울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서울이란 것(곳)이 어떤 대표성, 아니 대표성이란 말을 갖다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의 또 다른 의미의 대표성을 띤다고 가정해보아도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생활과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가는 것’이며, 나는 당신을 쫓고 당신은 제삼자를 쫓으며 제삼자는 다시 나를 쫓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여기서 작동과 소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공간이 슬며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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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사드 전집 1
D. A. F. 드 사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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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 있던 뫼르소가 사제를 울려 내보냈던 것처럼, 혹은 종교인들은 종종 그들이 의탁하고 있는 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비종교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믿지 않도록 하려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없다고 하듯이, 초월적인 경험을 주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에 스스로 복종하라고 말하거나 우리 자신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에는 귀를 틀어막으라던 히친스와 같이, 결국엔 사제와 죽어가는 자가 서로 뒤바뀌고 마는(「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무신론적 태도를 견지하던 사드를 우리는 종종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단지 고립된 성채에서의 넉 달간의 통음(通淫이든 痛飮이든)만을 기억하곤 한다. 그러나 자연이 스스로 뿜어내는 에너지 혹은 운동능력에 의한 활성(活性) 물질이라던 그의 주장은, 때로는 인간의 속성을 초라한 개체로 몰아가는가하면 그것을 방지할 공감으로서 종교나 신이 아닌 선량한 마음을 외치고 있다. 「같은 인간을 해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깨달아야 하는 것이네. 아울러 같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기쁨이라는 걸 우리 자신의 마음을 통해 느껴야 하는 것이지.」 그에 의하면 '갈색으로 염색된 리본을 실제로 갈색이라고 단정하는 건 매우 경박한 짓'이며ㅡ 당신이 누군가에게 신을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에게 어떤 개념도 제공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소한의 실질적인 논증조차 들이대지 않는 한, 그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그의 상상 속에 주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맹인에게 리본을 내밀면서 '이것은 갈색이오'라고 입을 놀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구라'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신에 대한 사색」). 하여간 우리는 언제고 이 불운한 6번 선생을(한때 뱅센 요새의 6번 감방에 있었음) ㅡ 그와 생트펠라지 감옥의 같은 층에 있었던 아무개의 표현을 빌리자면 ㅡ 그야말로 '부담스러운 짐짝'으로 여겨왔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거 하나만 인정하시지. 눈가리개를 착용한 자와 그것을 벗어버린 자 둘 중에서 진짜 장님은 엄연히 전자라는 사실 말일세 (...) 자네가 설교하는 그 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굳이 기적, 순교자, 예언 따위가 필요할까? 자네 말마따나 인간의 심장이 신의 작품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신이 자신의 법을 위해 선택했을 성소(聖所)가 아닐까?


ㅡ 본문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중




하여 이 사드 전집으로 기획된 제1권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가 사드 입문용이라거나 앞으로 나올 전집의 신호탄이라는 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드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글이 사드를 온전하게는 설명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인데, 외려 아폴리네르에 의해 작성되었던 장문의 해설로 하여금 다소나마 그 역할을 수행케 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만 같다. 그가 사드에게서 발견한 미덕이라면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 충만한 리베르탱(libertin)의 모습이었을 터다. 정신병원 의사에게마저 혀를 찰 만큼, 혹은 내두를 만큼의 '불길한 영향'과 '고질적인 패악'으로 말미암은 '끔찍한 인간'으로 비친 사드를 아폴리네르는 '19세기 내내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되었던 이 남자는 20세기를 확실히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칭찬하는데(그 역시 익명을 사용해 사드에 비견할 만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 ㅡ 물론 당장에 불살라버리고픈 심정도 들었을 것이지만 ㅡ 그에게 사드의 글을 읽는 것은 제철 과일을 어석거리며 한 움큼 베어 먹는 것처럼 부들부들한 감촉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독자 된 입장에 선 나로서는 사드라는 인간을 하나의 거대 담론 속에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으나, 언어의 조탁과 탁월한 발상 그리고 도전, 자유, 그가 가진 사상(그저 '사고'라고만 해도 된다)에 있어서만큼은 아폴리네르가 지녔던 애정에 못지않다.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라면 역자가 첫머리에 쓰길 '거북함'과 '희귀한 쾌감'이라 표현한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소돔의 120일』에서 블랑지스 공작이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악덕이야말로 쾌락의 원천이라 확신하며 종교는 그저 망상일 뿐이다, 나는 창조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기질을 억제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르는 죄악은 자연에 도움이 될 것인데, 자연이 내게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죄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런 판국이니 그간 사드가 '부담스러운 짐짝' 취급(현실에서도 그랬다)을 받아왔던 것은 당연한 처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색을 밝히는 면모와 함께 때때로 이죽대며 궤변도 늘어놓는다. 그러니 거북살스러우면서도 희귀한 쾌감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온전한 이성의 존재인 당신도 이참에 한번 느껴보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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