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그래도 희망의 씨앗을 놓지 않으리


'빗나간 내 인생' '호밀밭의 파수꾼'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대지가 일찍부터 얼어붙었습니다. 삶의 조건과 시간의 흐름조차 냉동고에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춥다”는 호들갑이 입에 매달린 고드름이 됐네요. 신문 들추기가 두려울 만큼 세상은 치사해졌는데요, 하얀 이력서를 앞에 놓고 아직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올해도 또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하며 소태같은 담배를 질겅거리는 분도 있겠고요.

하긴 욕망을 붙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젊은 기수인 주세페 쿨리키아(Giuseppe Culicchia)의 장편 ‘빗나간 내 인생’(Tutti Giu Per Terra·낭기열라)을 권해 드립니다.

주인공 발테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립니다. 피아트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였던 아버지도 무능합니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아들이 출세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식 농담으로 “불도 안 때주고, 냉골 타령”입니다. 발테르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자신을 속이고 ‘외국인 이주자와 부랑자 상담 센터’에 대체 복무를 지원합니다. 이 기관의 약자는 CANE인데, ‘개’라는 뜻입니다. 발테르는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대학에 청강생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곳도 그가 발붙일 영토는 없습니다. 부자 친구들에게 그는 겉도는 사람일 뿐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 이런 음악을 쿵쿵거리게 합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프로블럼스(Problems)’, 혹은 데드 케네디즈(Dead Kennedys)의 ‘할리데이즈 인 캄보디아(Holidays in Cambodia)’ 같은 노래들입니다. 발테르에게 친구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애인은 섹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요즘도 미국 본토에서만 한 해에 40만부씩 팔린다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D. Salinger)의 명저 ‘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나 낙제 점수를 받은 주인공 홀든 코필드는 12월의 사흘 반 동안을 뉴욕의 언더그라운드를 배회하지요. 그가 볼 때 거짓투성이에 오염된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홀든의 입에서는 이런 말밖에 나올 말이 없습니다. “인생이 경기(競技)라고? 빌어먹을, 경기긴 하지. 우수한 놈들이 줄지어 서 있는 쪽에 나도 붙어있기만 한다면.”

얼마 전 프랑스 전역을 화염과 최루가스로 뒤덮이게 했던 폭동 기사가 기억 나십니까. 그 사건들도 이 시대적 암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리에 있었을 때, 교외의 빈촌으로 내몰린 그들의 삶을 그려서 상을 여러 개 받았던 90년대 영화 ‘라 앤’(La Haine)을 심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증오’라는 뜻이지요.

‘빗나간 내 인생’의 주인공 발테르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서점에 일을 얻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몇 푼을 월급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삶이라는 궁핍한 암흑, 그 구덩이 속에서 목마른 자 누구인가? 그는 그 구덩이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찾으려고 평생을 허비했다”(5쪽), 고요.

벗(But)! 혹시 압니까. 처음에는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전위미술)라고 불렸던 것들이 지금은 세련·교양·재산이 됐듯이 이 세상 모든 치사한 것들이 전도(顚倒)된 가치로 ‘헤쳐모여’를 할지요.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희망을 버릴 필욘 없겠죠. 그러려면 일단 입에 달린 고드름부터 풀려야겠네요. 어,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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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한동안 이 셋이 절대 '강호'처럼 사랑받는 외국작가 그룹을 형성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 문학과는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녔고 그 매력을 잊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기에 이들의 이름은 하나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자리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얼굴이 잊혀져가고 있으며 아멜리 노통브와 무라키미 하루키는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절대 강호가 없는 춘추전국시대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심상치 않은 파괴력을 자랑하는 이가 독주체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알랭 드 보통의 등장은 연애소설과 함께 시작됐다. 불치병과 숨겨진 가족사 등 뻔하고 뻔한 방식으로 눈물샘을 쥐어짜는 연애소설들이 억지스럽게 시대를 이끌어가던 때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등장은 이색적이었다. 불치병 따위의 소재를 촌스럽게 만들며 등장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기발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왜 기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동안 뻔한 연애소설들이 '첫 눈'에 반해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한다는 정말 소설 같은, 믿기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는 동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사랑하는지를 심층적이고도 철저하게 물고 늘어졌다. 때문에 이 작품을 연애소설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어쨌거나 이 기발함은 열광적인 반응으로 불멸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남긴 작가는 많고 그것만으로는 강호가 될 수 없다. 알랭 드 보통도 마찬가지. 전작만큼이나 화려한 후속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놀라울 정도로 기대치를 만족시켰다. 기대치를 채운 첫 번째 주인공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었다. 여자친구의 전기를 쓰는 것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 또한 이색적이었다. 빠른 사랑이 '작업의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 '느리지만, 깊게' 사랑하려는 주인공의 시도는 이색적일 수밖에 없던 것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알랭 드 보통은 자신만의 신선한 연애소설의 계보를 이어갔다.

후속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특히 요즘 개정판으로 등장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알랭 드 보통의 이름을 연애소설의 영역에서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사소한 버릇이나 좋아하는 책의 장르 등에 따른 남녀의 자잘한 갈등까지 확대 조명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사랑의 힘!'으로 어떤 갈등도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세상의 연애소설들을 단번에 고루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랬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낭만'도 보이지 않고, '환상'을 만들어주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특별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현실을 너무나 쏙 빼닮은 나머지 <우리는 사랑일까>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은 이렇듯 달랐다. 시대와 달랐고 그 세계의 관습과도 달랐는데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차별성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말하지 않으려는 인간 사랑의 행태를 공개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영원한 사랑 운운하고 그 다음날 다른 사랑을 말하면 어떤가? 친구들 반응은 "급했구나?"로 나올 뿐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진실이었던 것인데 연애소설은 이런 사실을 꺼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당당하게 이 사실을 공개했다. 덕분에 그의 연애소설은 특별함 속에서 확고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제 그의 연애소설은 앞뒤내용 가리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작품 세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다르다는 건 연애소설에서만 국한 이야기다 아니다? 글쓰기의 세계도 달랐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이 아닌 다른 것도 썼던 것이다. 다른 것을 썼다는 걸 무슨 뜻인가? 다른 이들처럼 수필을 썼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는 정말 다른 것을 썼다. 철학 입문서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쓴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소크라테스, 니체, 쇼펜하우어 등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을 다루며 그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에서 쓰일 수 있을지를 말하는데 요즘 등장한 철학 입문서로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에게 물어보세요>에서 마르쉘 프루스트의 삶을 갖고 인생 상담을 해줬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 작품은 인생 상담서는 아니다. 일종의 평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작품의 중요성의 그 효능일 텐데 알랭 드 보통은 언제 죽을지 몰랐던 프루스트, 친구가 많았으며 아픈 몸에도 놀라울 정도로 긴 장편소설을 쓴 프루스트의 삶과 철학을 통해서 오늘날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제해줬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들을 콕콕 찍어 설명하더니 예술 등을 갖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예술가, 예술가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지성인으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3대 강호로 군림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통적인 특징을 떠올려보자. 기존의 것과 차별성을 보여야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선보여야 하며, 그 매력이 잊혀 지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떤가? 모두 충족한다. 뿐만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은 세 명보다 한발 더 앞서나갔다.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이 제공할 수 없는 유용한 정보까지 책임지는, 지식의 즐거움까지 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떻게 강호 대열에 합류하였는가?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활약을 보인 이가 강호가 아니라면 세상에 누굴 두고 강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의 시대, 그것은 이미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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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5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12-1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전출처 : 로쟈 > 어린 딸에게

 

 

 

 

'어린 딸에게'는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박인환(1926-195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이지만, 언젠가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그래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이미지에는 윤석산 교수의 평전이 올라와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이동하 교수의 평전 <박인환>(문학세계사, 1993)이다. 대표시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인데, 요절한 시인인지라 작품집이 한권으로 카바된다). 흔히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시와 노래(박인희)대표작의 감상성에 기대어(과거 음악다방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시인이 박인환과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었다. 혹 이런 시의 낭송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때까지

(...)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하여간에 이름은 카페로 돼 있는 다방에 앉아 있으면 누굴 기다리거나 말거나 들려오는 건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아니면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이었다(거의 유사한 목소리의 성우가 낭송했던 듯하다. 언제였던가? 스무살이 되던 무렵?). 아, 하나 더 있긴 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카페를 겸하던 서점의 이름조차 '홀로서기'였다(그 시를 내게 또박또박 적어서 보내준 여학생도 지금은 다 학부모가 되었겠군).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해서 연배는 다 제각각이지만 박인환, 이생진, 서정윤은 내게 한국시의 센티멘탈리즘 3인방이다('센치멘탈리즘'이라고 읽어야 한다). '어린 딸에게'는 그런 박인환이 남긴 몇 안되는 '리얼리즘' 시이다(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수록돼 있다).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내가 시를 다 암송하지는 못하는 대신에 자주 중얼거렸던 구절은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이다. 딸아이가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인데, 얼마전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던 '혁명'이 불발로 그친 뒤에 간혹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아니라 '전쟁'인 셈인가?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얼마전부터 집사람과 자주 '냉전'에 돌입하는 까닭에 나는 자주 딸아이의 '행복'에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지만(덕분에 딸아이는 '스트레스'란 단어를 내 방에 와서 써놓고 가기도 한다. '아빠 미워'란 말과 함께), 그런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다. 

20대 총각시절 나의 소망은 나중에 딸아이가 7살이 되면 한방 가득 도서관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딸아이도 한때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요즘은 '아빠처럼 책 좋아하는 남자는 안 만날 거야'라고 미리 선언을 한다. 적어도 한 여자에게서만큼은 존경받는 남자이고 싶었고, 딸이라면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얄팍한' 계산이었는데, 일이 만만치 않게 됐다(이러다간 인생 헛사는 게 시간문제겠다).  그 아이의 가장 최근 모습이다.

'조작' 시비가 있을까 하여 사이즈는 그대로 놔두었다. 스스로 발가락만 아빠를 닮았다고 하니까(더 추궁해야 입술도 닮았다는 정도의 얘기를 듣는다) 내가 기여한 바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하여간에 아이는 나의 DNA를 1/2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동료 인간이다. 책정리 기념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찍은 사진.

그리고 상당히 깨끗해져서 요즘은 '들어갈 수 있는' 나의 서재이다(사진이 흐릿하게 나와서 무슨 책들이 꽂혀 있는지는 다 염탐이 안 되실 듯하다).

아이 엄마가 야근을 한다는지라 좀 일찍 들어가서 아이와 놀아주어야 한다(외가에 가 있는 딸아이가 전화를 해왔다. 9시까지 데리러 오라고). '어린 딸에게' 아부 좀 하려고 했더니만 여러모로 안 도와주는군...

05. 12. 14.

P.S. OO야, 아빠는 OO이를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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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최인호
문학사상 2005.12 - 송년특집, 통권 398호
문학사상 편집부 엮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12월
품절


나는 젊었을 때부터 먼 훗날 내 묘비명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청년 시절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때도, 먼 미래의 눈에서 본다면 이건 모두 흘러가는 과거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는 미래의 시점에서 내 자신이 크는 것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수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53쪽

자신의 정신을 작가로서 뾰족하게 연마하려면, 타인의 평가에 대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런 평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오히려 글을 무디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모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가 사회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할 때 문제가 생기는 법이죠. 그건 작가에게는 무시무시한 덫입니다. 작가는 글 이외의 것으로 필요 이상의 존경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54쪽

작가는 피카소처럼 어제 그렸던 것을 스스로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꾸 어제 했던 것을 우려먹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거에 썼던 것은 버려야 할 유산에 지나지 않습니다. -55쪽

나는 하루에 적어도 30매씩 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엔 욕심이 너무 많았지요. 코드가 너무 많은 데 꽂혀 있어서 곧 누전될 전선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외부적인 것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술 마시는 것도 싫어요. 때로 유배를 당한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더 재미있어요. 오히려 혼자 있으면 제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들 때문에 무지하게 시끄럽다고나 할까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지금은 전선에 전압도 더 강해진 느낌이에요.


그는 작가는 글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자기희생이라기보다 자신의 예술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 가깝다. 그는 죽어가는 아내의 얼굴에서 통한의 슬픔을 느끼기보다 죽음의 색깔을 발견하고 색채의 변화를 관찰했던 화가 모네를 예로 들었다. 모네의 태도를 무시무시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가는 사적인 감정에 빠지기 보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응당 그러한 집중력과 냉철한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57쪽

사람들이 누구보다 낫다는 식의 비교급은 예술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58쪽

나는 일단 저 놈을 이기겠다고 생각하면, 나비처럼 날아서 한방에 때릴 거라고 미리 공표하는 스타일이죠. -59쪽

그건 저항영화입니다. 고인이 된 하길종 감독과 내가 작정하고 만든 영화였어요.

영화 검열에서만 30분이 잘려나갔습니다. 신문기자에게 미래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받은 젊은이들이 빈정거리는 침묵으로 응답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모두 다 가위질당하고 말았어요. 사라진 30분이 다 나왔으면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가 되었을 텐데. 너무 아까워서 하길종과 내가 중앙정보부실에서 몰래 훔쳐낸 필름 5분을 겁도 없이 살려냈다가, 나중에 다시 불려가는 고충을 겪기도 했죠.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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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新)사학을 대표하는 역사가의 한 사람인 조르주 뒤비(1919~1996)은 1980년 이후 만년을 여성사 연구에 바쳤다. 뒤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발표한 <12세기의 여인들>로 긴 학문적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여성사 연구에 앞장선 남성 역사가라는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2세기 여자들에 대한 사료가 희귀하여 <12세기의 여인들>에서 뒤비의 연구 대상은 프랑스의 여인들 중에 사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인 귀족 계층의 여인들, 즉 귀부인들에 국한된다. 그나마 이런 사료조차 주로 남성들에 의해 씌어진 글이 전부이다. 뒤비는 이런 한계를 감안하여 1권 서문에서 자신은 다만 글로 씌어진 증언에 반영된 이미지를 보여주려 할 뿐이라고 밝힌다.

1권에서는 12세기 여인들 중 그나마 이름이 알려지고 행적이 남아 있는 6명의 여인들을 소개한다. 이 중에서 당대의 실제 인물은 단 세 명뿐이다. 프랑스의 왕비였다가 영국의 왕비가 되었고,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의 어머니이기도 한 알리에노르 다키텐,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 아벨라르에게 사랑을 호소했던 엘로이즈가 그들. 여기에 성서에 나오는 여인 한 명, 기사도 소설에 나오는 여인 두 명이 더해진다.

2권에서는 상류 귀족 가문에서 전해져오는 가계문학을 통해 선조 여성들의 모습을 추적한다. 이러한 계보학적 작품들로부터 이 여인들이 영위했던 삶, 그들이 지닌 가치, 그리고 그녀들에게 불명성을 부여한 성직자와 작가와 기사도 작가들이 그녀들을 바라본 방식에 대한 그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3권에서는 12세기 유럽에서 여성과 교회 사이에 형성되었던 관계를 탐구한다. 원죄 개념에 어떻게 성(性)이라는 개념이 새로이 끼어들게 되었으며 어떻게 여성이 마술, 불복종, 음탕함 등과 같은 각각의 죄악들의 구현체이자 행위자로 손가락질 받게 되었는지를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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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2-1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군요~

stella.K 2005-12-1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긴한데 책 장수에 비해 넘 비싸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