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최인호
문학사상 2005.12 - 송년특집, 통권 398호
문학사상 편집부 엮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12월
품절


나는 젊었을 때부터 먼 훗날 내 묘비명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청년 시절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때도, 먼 미래의 눈에서 본다면 이건 모두 흘러가는 과거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는 미래의 시점에서 내 자신이 크는 것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수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53쪽

자신의 정신을 작가로서 뾰족하게 연마하려면, 타인의 평가에 대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런 평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오히려 글을 무디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모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가 사회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할 때 문제가 생기는 법이죠. 그건 작가에게는 무시무시한 덫입니다. 작가는 글 이외의 것으로 필요 이상의 존경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54쪽

작가는 피카소처럼 어제 그렸던 것을 스스로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꾸 어제 했던 것을 우려먹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거에 썼던 것은 버려야 할 유산에 지나지 않습니다. -55쪽

나는 하루에 적어도 30매씩 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엔 욕심이 너무 많았지요. 코드가 너무 많은 데 꽂혀 있어서 곧 누전될 전선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외부적인 것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술 마시는 것도 싫어요. 때로 유배를 당한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더 재미있어요. 오히려 혼자 있으면 제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들 때문에 무지하게 시끄럽다고나 할까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지금은 전선에 전압도 더 강해진 느낌이에요.


그는 작가는 글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자기희생이라기보다 자신의 예술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 가깝다. 그는 죽어가는 아내의 얼굴에서 통한의 슬픔을 느끼기보다 죽음의 색깔을 발견하고 색채의 변화를 관찰했던 화가 모네를 예로 들었다. 모네의 태도를 무시무시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가는 사적인 감정에 빠지기 보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응당 그러한 집중력과 냉철한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57쪽

사람들이 누구보다 낫다는 식의 비교급은 예술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58쪽

나는 일단 저 놈을 이기겠다고 생각하면, 나비처럼 날아서 한방에 때릴 거라고 미리 공표하는 스타일이죠. -59쪽

그건 저항영화입니다. 고인이 된 하길종 감독과 내가 작정하고 만든 영화였어요.

영화 검열에서만 30분이 잘려나갔습니다. 신문기자에게 미래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받은 젊은이들이 빈정거리는 침묵으로 응답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모두 다 가위질당하고 말았어요. 사라진 30분이 다 나왔으면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가 되었을 텐데. 너무 아까워서 하길종과 내가 중앙정보부실에서 몰래 훔쳐낸 필름 5분을 겁도 없이 살려냈다가, 나중에 다시 불려가는 고충을 겪기도 했죠.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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