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그래도 희망의 씨앗을 놓지 않으리
'빗나간 내 인생' '호밀밭의 파수꾼'
대지가 일찍부터 얼어붙었습니다. 삶의 조건과 시간의 흐름조차 냉동고에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춥다”는 호들갑이 입에 매달린 고드름이 됐네요. 신문 들추기가 두려울 만큼 세상은 치사해졌는데요, 하얀 이력서를 앞에 놓고 아직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올해도 또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하며 소태같은 담배를 질겅거리는 분도 있겠고요.
하긴 욕망을 붙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젊은 기수인 주세페 쿨리키아(Giuseppe Culicchia)의 장편 ‘빗나간 내 인생’(Tutti Giu Per Terra·낭기열라)을 권해 드립니다.
주인공 발테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립니다. 피아트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였던 아버지도 무능합니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아들이 출세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식 농담으로 “불도 안 때주고, 냉골 타령”입니다. 발테르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자신을 속이고 ‘외국인 이주자와 부랑자 상담 센터’에 대체 복무를 지원합니다. 이 기관의 약자는 CANE인데, ‘개’라는 뜻입니다. 발테르는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대학에 청강생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곳도 그가 발붙일 영토는 없습니다. 부자 친구들에게 그는 겉도는 사람일 뿐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 이런 음악을 쿵쿵거리게 합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프로블럼스(Problems)’, 혹은 데드 케네디즈(Dead Kennedys)의 ‘할리데이즈 인 캄보디아(Holidays in Cambodia)’ 같은 노래들입니다. 발테르에게 친구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애인은 섹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요즘도 미국 본토에서만 한 해에 40만부씩 팔린다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D. Salinger)의 명저 ‘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나 낙제 점수를 받은 주인공 홀든 코필드는 12월의 사흘 반 동안을 뉴욕의 언더그라운드를 배회하지요. 그가 볼 때 거짓투성이에 오염된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홀든의 입에서는 이런 말밖에 나올 말이 없습니다. “인생이 경기(競技)라고? 빌어먹을, 경기긴 하지. 우수한 놈들이 줄지어 서 있는 쪽에 나도 붙어있기만 한다면.”
얼마 전 프랑스 전역을 화염과 최루가스로 뒤덮이게 했던 폭동 기사가 기억 나십니까. 그 사건들도 이 시대적 암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리에 있었을 때, 교외의 빈촌으로 내몰린 그들의 삶을 그려서 상을 여러 개 받았던 90년대 영화 ‘라 앤’(La Haine)을 심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증오’라는 뜻이지요.
‘빗나간 내 인생’의 주인공 발테르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서점에 일을 얻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몇 푼을 월급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삶이라는 궁핍한 암흑, 그 구덩이 속에서 목마른 자 누구인가? 그는 그 구덩이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찾으려고 평생을 허비했다”(5쪽), 고요.
벗(But)! 혹시 압니까. 처음에는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전위미술)라고 불렸던 것들이 지금은 세련·교양·재산이 됐듯이 이 세상 모든 치사한 것들이 전도(顚倒)된 가치로 ‘헤쳐모여’를 할지요.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희망을 버릴 필욘 없겠죠. 그러려면 일단 입에 달린 고드름부터 풀려야겠네요. 어, 추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