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의 단막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20년만에 리메이크 됐다.
오리지널 때 주인공이자 며느리 역을 나문희 씨가 맡은 걸로 알고 있는데 20년이나 지난 지금 그녀가 다시 며느리 역을 맡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리메이크에선 원미경 씨가 그 역을 맡았는데 비교적 무난하게 해냈다.
무엇보다 원미경 씨를 보면 정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녀가 리즈 시절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요즘 젊은이들은 알까 싶다. 난 이 배우가 연기를 훌륭하게 잘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미모와 열심히 하는 점에선 싫지 않았다.
지금도 새삼 놀라운 건 지금 노희경의 나이가 50대 초반으로 알고 있는데 20년 전에 이런 드라마를 썼다는 것이다. 30대 초반 아닌가. 그 나이에 노인이나 중년의 심리를 어쩌면 그리도 잘 표현하다니. 작년에 <디어 마이 프렌즈>는 노배우들이 대거 많이 출연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노년에 대해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싶다.
20년. 그동안 나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이사를 했고, 연극 대본을 쓰기도 했으며, 사람들과 옥신각신 싸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의 주인공 역시 난소암으로 세상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서 오리지널 때와 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신음 같은 한숨을 쉬면서 봤던 것 같다. 보면서 어느 때 죽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가끔 드라마를 보며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이번만큼은 울지 않을 수도 있겠다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고 모르긴 해도 오리지널 때 울었을텐데 뭘 또 울겠는가 싶어서. 하지만 그걸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영화가 공학이듯 드라마도 공학이다. 적어도 작가는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을 그러모아 어디에서 터트려줘야 하는지를 계산에 넣었던 것 같다.
마지막회에 치매 걸린 시어머니에게 절구공이로 머리를 맞은 주인공 인희(원미경)가 그날 밤 약을 먹으러 주방으로 나왔다 방에서 자고 있는 시어머니를 측은한 눈빛으로 내려다 본다. 그러다 갑자기 이불로 질식시키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아니면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데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데 상황적으로나 감정적으론 너무나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설혹 그 살인이 성공했더라도 그 누구도 며느리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해도 크게 죄될 것도 없다. 이것을 그녀의 딸 연수가 발견하고 중지가 되지만, 이내 인희는 시어머니에게 나랑 같이 죽자고 울부짖는다. 그 장면이 왜 그리도 서글프던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난 그때 나의 할머니가 생각났던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쯤 있다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인생이 덜 떨어졌는지 나는 아버지의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할머니의 임종인들 제대로 지켰겠는가.
살아생전 할머니는 당신외엔 관심이 없으셨다. 언니나 오빠는 첫 손주고, 장손이어서 예뻐하셨지만, 나나 동생은 그다지 예뻐하시지 않으셨다. 그나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렇게 저렇게 할머니와 멀어졌고, 오빠가 있기도 했으니 특별히 임종이라고 해서 찾아뵈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당신에겐 다른 손주들도 있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년 넘은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요즘 자꾸 할머니가 생각난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도 나는 지켜야할 도리를 지켰어야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죄송함과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한번 무너진 감정은 이후의 다른 장면들에서도 계속해서 무너졌다. 주인공 인희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 주면 해 줄수록 나는 자꾸 뭔가가 치받히는 느낌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드라마다. 요즘 드라마가 막장인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착한 드라마가 있을 수 있나 싶다. 물론 조금씩의 이탈은 보여지고 있지만 그건 주인공이 죽음에 가까워 올수록 모든 것은 정상을 회복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난 속으로, '현실은 저렇지 않아. 현실은 저렇지 않아.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점 투성인데 현실은 안녕을 고해야할 때 제대로 고하지 못하며,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죽어가는 사람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가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바아냥거리고 싶었다.
드라마를 보고 우는 것처럼 바보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된 드라마라면 시청자들을 제대로 울릴 줄 알아야 한다. 솔직히 천재지변이 아니면 일상에선 울 일이 별로 없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그러니 드라마라도 보며 울어야 한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면 날아가버릴 눈물일지라도 안구정화를 제대로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드라마 잘 쓰는 노희경도 옥의 티는 있어 보인다. 개차반 같은 남동생을 올케한테 맡기면서 참고 살라고, 본시 악한 사람은 아니니 나이들면 잘할 거라고 유언처럼 말하는 장면이다. 자기 죽어간다고 아직도 인생이 창창한 올케에게 과연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동안은 그래도 시누이로 힘들면 의지처가 되게 했다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다. 차라리 그럴 땐 빈말이어도 동생 바라보지 말고 이제라도 인생 찾아가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왜 여성만 참아야 하는 것일까? 세상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이 (개차반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남자들이 온전한 정신을 찾고, 성실히 살아가는 삶을 지연시키거나 영원히 회복불능의 상태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봤을까? 오히려 참지 말아야 여성이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얻고, 그날을 더 앞당길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작가가 그 부분은 감정을 너무 많이 앞세웠다 싶다.
주인공 인희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웃는 때가 더 많아졌다. 물론 주위의 가족들이 그렇게 해 주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게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죽으면서까지 자기연민을 갖는다는 건 자기에게나 남아 있는 사람에게나 다 안 좋다. 어차피 정해놓은 시간만큼만 사는 것이다. 그걸 사느라 모르고 살았을 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자기 생에 감사하며 마감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어느 유명 아이돌 가수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인은 우울증이라고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게 얼마나 깊었으면 우울증의 표식이라고 하는 '블랙독'란 문신을 살갗에 새길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그가 꼭 그런 문신을 새겼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그게 자신이 우울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한 방편이기도 한다지만 그러면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이 침잠해 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우린 또 그러리만치 우울증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화려하고 멋있게 살았을 것만 같았는데도 단 일분일초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그런데 난 왠지 그가 단순히 자기 삶을 비관해서 자살했을 것 같지가 않다. 원래 삶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욕심히 없다. 오히려 그것이 많은 사람이 그것을 주최할 수 없어 결국 우울에 빠지고 자살하지 않나 싶다. 동물은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한다 한다.
지금은 너무 흔한 병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누가 암에 걸렸다고하면 너무 열심히 살았겠구나 싶어 측은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생의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고 생각한다. 살 사람은 그때 건강 회복에 전력해야 하고, 죽어야 한다면 생을 정리할 마지막 기회를 얻은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승자라는 말이 있듯, 드라마 속 인희처럼 마지막에 내 삶에 미소를 보내려면 자주 미소 짓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즉 나를 자주 끌어 안아주고, 수고했다고 다독거리고 화해해야 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에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어느 때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 위해 리허설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