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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그러고 보니 김훈의 책을 세번째로 읽었다. 첫번째는 그 유명한 <칼의 노래>. 두번째는 <밥벌이의 지겨움> 그리고 <강산무진>. 나는 그의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리뷰를 재대로 써 볼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왜 나는 그의 책들을 좋아는 것일까?
내가 그의 책을 가지고 리뷰를 써 볼 생각을 못했던 건 글쎄, 게을러서 이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명징하면서도 응축된 그의 글발에 가위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인지도 모른다. 이 책 역시도 그런 느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 만큼은 읽은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기어코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무조건 내 눈으로 읽어내린 책은 리뷰를 꼭 쓰도록 하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막상 쓰려고 하니 막막하다. 나는 역시 예의 그의 글발에 채이고 가위 눌리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좋다고 말하는 건, 메저키즘은 아닐까?
그런데 그의 글이 이전의 작품 보다 많이 허무주의에 젖어든듯 하여, 작가도 이젠 늙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칼의 노래'만 하더라도 실존의 시퍼런 칼날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칼의 노래'도 허무주의는 있었다. 단지 이 '강산무진' 에서는 유난히도 도드라진다고나 할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모든 헛되다고 토로했던 건 성경 전도서의 저자가 말 했었다. 김훈은 바로 이 전도서 저자의 허무의 깊이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기사 그의 나이를 어림해 볼 때 모르지는 않겠지. 나는 이 책을 누구에게로부터 거져 얻었다. 내가 '강산무진'을 하도 탐을 내니 준 것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탐을 내니 무안해졌다. 그래서 예의상 몇번 거절했었는데, 그는 "아녜요. 전 김훈의 이 전 작품이 좋긴한데 이건 별로 더라구요. 그냥 읽으세요."하며 더 이상 욕심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는 받은지 몇 달 만에 읽었으니, 나는 이제야 그가 그때 왜 이 책에 욕심을 내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모름지기 책이라면 재미나, 짜릿함, 뭔가의 자극적인 느낌 또는 감동 등이 있어야 할텐데, 이 책에 수록된 각가의 중단편들은 하나 같이 건조하고 인생의 쓴물과 단물을 다 경험한 마초들의 쓸쓸함만이 베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젊음피를 유지할 법한 나이의 그 사람이 읽기엔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했을까? 나 역시도 한창 팔팔한 나이에 이 책을 붙잡았더라면 한장 넘기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이 나이에 그의 책을 붙들었다는 것은.
비록 예전의 그런 느낌은 없는 듯 하지만 그의 작품에선 여전히 삶의 연륜의 베어있고, 무엇보다 그의 문장력은 여전해 보인다. 꽤 건조해 보이는데도 작업상 그 일에 대하여, 또는 그 상황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여 정말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작가가 작중인물을 통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고는 하지만, 작가는 '언니의 폐경'을 통해 또는 '화장'을 통해 어떻게 그리도 여성의 폐경을, 또한 뇌종양에 걸린 아내를 그처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또한 직업에 관하여서도 더 이상의 묘사가 필요없을 듯 잘 표현이 되고 있었다. '화장'에서의 화장품 마케팅. '항로표지'에서의 등대지기의 일이나, '머나먼 속세'에서의 권투선수 등
하지만 역시 그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문장에 그의 주특기인 실존의 그림자를 잘도 교직시킨다. 특히 이 책의 표제작인 '강산무진'을 보면 죽음을 앞둔 주인공이 자기가 없을 죽음 이후를 위해 자신이 살아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들을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감정의 선을 드러냄이 없이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으로만 담담하게 표현함으로 그것만으로도 실존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또한 '고향의 그림자'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통해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의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며 실존을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허무 자체만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실존없이 허무를 얘기할 수 있을까?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왜 작가는 작품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지 않고 허무를 말하려 했을까 하는 것이다. 희망을 얘기했더라면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가? 세상은 사는 것이 퍽퍽하고 힘들어도 희망을 말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얻고 싶어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 비록 거짓이고 허구라도 말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질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 보인다. 이상을 말하지 않고, 세상은 이래. 그러니까 잔말 말고 그냥 살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희망적인 것에, 이상적인 것이 빚을 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독자의 어떠한 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자기 글씀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심산만 엿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인가? 진취적이며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작가와 세상은 이런 것이니 잔말 말고 살라고 말하는 작가. 독자 또는 평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안달이 난 작가와 남이사 뭐라거나 말거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쓰는 작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