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라. 누가 했던 말일까?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라도 그렇게 못하기도 한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다시 주일학교에 복귀해서 나름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여자 아이가 팀에 들어왔다. 선생도 사람인지라 모든 아이에게 사랑과 정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사랑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불행하게도 그러질 못했다. 그 아이는 나를 참 많이 신경 쓰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산만하고 부산스러웠다. 팀원이라면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잘 지낼 생각을 해야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즉 이 아이를 잠깐 동안만 모임에 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잠깐이 얼마가 될지는 모른다. 한 두 달될 수도 있고, 짧게는 2, 3주 동안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건 그 아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 난 따로 기한을 두지 않았고 단지 그 아이에게 쉬면서 네가 드라마팀으로서 이 모임에서 어떻게 있어야할지 생각해 보고 그 마음이 서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시무룩하게 알겠다고 말하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누가 나에게 가르쳐 줬는데, 내가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이제부터 나오지 말라는 뜻과 같은 거란다. 순간 놀랐다. 이걸 두고 세대차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난 그저 아무런 사심없이 액면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게 왜 같은 뜻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나는 예전에 목사님이 몇 달 후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말이다. 그럼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을까? 문득 내가 그 아이를 대했던 태도가 과거 누구와 닮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시중에 돌아다니는 말중에 '똘끼'라는 말이 있다. 별로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이것의 사전적인 정의가 있기는 한데, 남들이 못하는 걸 하는 사람의 끼가 그중 꽤 괜찮은 뜻으로 파악된다. 글쎄,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눈치 보지 않고 덤비는 것. 또는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몸을 날리는 것? 뭐 그런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또라이의 특성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교양과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닌 존재다. 하지만 때로 사람은 뭐 하나에 만큼은 품위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고 똘끼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런 때가 오면 지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욕을하든 흉을 보든 돌파해야 할 땐 돌파해야 한다. 내가 부서지고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나에게 그때 그 일은 그런 것이었다. 품위와 자존심만 생각하면 결코 돌아가지 말았어야 하고 다시하지 말았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돌아갔는데 그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그 녀석이 내 말을 그렇게 받아 들였다면 그건 선생인 내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 오는 것일게다. 그리고 어쩌면 녀석은 아직도 순수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더 살다보면 자존심 지켜가며 할 수 있는 일이 몇 안 된다는 걸 아는 때가 올 것이다. 내가 그걸 단순히 세상을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만으로 구구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그 아이는 배우를 할 아이가 아니다. 

똘끼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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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건데, 그 아이는 같은 팀에 있었던 선배 오빠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아이의 부산스러움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즉 제사엔 관심없고 젯밥에만 관심있다고 그 아이는

연극에 관해선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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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2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17-06-02 13:55   좋아요 0 | URL
네, 지난 번 주신 문구에 그런 내용들을 더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