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둘째 조카 지0이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다녀갔다. 뭐 딴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고 언니네가 강릉에 살고 있고, 서울 서 친구들이랑 자취를 하고 있으니 일 년에 한두 차례 언니를 시켜 철 지난 옷들과 당장 입어야 할 옷들을 교체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에 대한 맞교환 장소를 이번엔 녀석의 외가인 우리 집으로 정한 것그럴수밖에 없었던 건, 언니는 얼마 전 집에서 쓰던 믹서기가 고장났고 마침 우리 집엔 안 쓰는 믹서기가 있어서 그것도 얻어 갈겸 하루 날 잡아 온 것이다. 그외 다른 볼 일도 있고.  

 

형부와 우리집이 절연되지만 않았어도 녀석과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언니와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집은 형부를 무던히 품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내 집 식구도 때론 품어지지 않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의 집 사람을 품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형부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형부와 절연이 되니 언니도 멀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조카 녀석들만큼은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솔직히 미운 거야 언니 내외지 아이들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애들이 부모 따라가지 누굴 따라가겠는가. 하지만 녀석들이 외가를 나몰라라 하니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차치하고라도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들이 녀석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러고 나오나 옛말이 하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싶었다. 하늘로 둔 머리 검은 짐승 거두지 말라는.

그래도 그렇게 되고 한동안 지0이한테만큼은 몇 번 문자를 보내긴 했었다. 성격대로라면 할머니와 외삼촌들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본데없이 구냐고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고, 나름 점잖게 외할머니에게 전화 좀 하라고만 했다. 물론 녀석들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외가고 뭐고 다 끊어야 하는 것 같기는한데 엄마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는 오빠가 생각지도 않게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고, 그런 와중에 맏딸 내외와 절연을 해야했으니 노인네가 참 복도 지지리도 없다 싶었다. 그러니 이럴 때 조카 녀석들이라도 가끔씩 전화라도 하면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텐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문자를 보냈는데도 녀석은 답신은커녕 아예 내 문자를 씹는 것이었다. 나도 참 오지랖이다 싶었다. 물론 오기로 녀석에게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이다. 과연 녀석이 얼마만에 연락을 할 건지 두고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건 또 무슨 스토킹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대신 어떻게 애들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언니와 형부한테 더 강한 혐오와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작년엔 느닷없이 엄마가 대장암에 걸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요즘엔 의술이 좋아서 좀 늦게 발견해서 그렇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수술 직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생을 시켜서 언니한테만큼은 이 사실을 알리라고 했다. 물론 처음엔 연락하지 말라고 단속을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딸에게 알려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사위에게까지 알려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장모도 부몬데 사위가 알면 뭐가 어때서 그러는가 싶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위를 홀대해서 장모가 벌받는 거라고 생각할 것 아니냐는 거다. 그런 식으로 엄마는 원망인지 자책인지도 모를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막상 수술을 받고 나오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위가 미운 거지 딸이 무슨 죄인가, 사위 때문에 딸조차 못 봐서야 쓰겠는가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땐 또 뭐 때문인지 동생도 크게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찬성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엄마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고비를 넘겼는데 이제와 새삼 무슨 연락인가 싶었다. 하긴 저렇게 고비를 넘겼어도 노인네 밤새 안녕이라고 엄마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무조건 반대하기도 뭐했다. 나야 언니와 한 배에서 나왔지만 엄마야 언니를 직접 낳지 않았는가. 
 

결국 엄마는 수술 직후 언니와 지0이를 병실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그때 나는 집을 지키고 있느라 감격적인 상봉(?)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그렇게 지0이와 엄마를 만나게 해 주려고 문자질을 해도 안 되더니 때 되면 이렇게도 만나는 걸  그동안 나는 무슨 뻘짓을 했던 걸까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후 오래지 않아 나도 언니를 곧 만나긴 했지만,  지0이를 만나기까지는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녀석은 뭐 하느라고 바쁜 건지 그때 병원을 다녀간 이후 외가엔 도무지 코빼기도 비치 않았다. 솔직히 언니와 난 자매지간이어도 어렸을 때부터 그리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만났다고 반가울 리는 없었고, 녀석에 대해선 막상 만나면 반가울 수도 있을텐데 그 때 내가 했던 뻘짓 때문인지 녀석은 선뜻 외가엘 못 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니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동안 녀석은 나름 바쁘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던 관계로 그동안 미처 다 이수하지 못한 과목의 학점을 따느라 비번 때면 그 먼 강릉을 오르내려야 했고, 그런 와중에 갑상선 항진증에도 걸려 그야말로 피똥을 싸고 살았나 보다. 그러니 외가에 언제 오겠느냐는 거다.    

 

그런데 지난봄, 엄마의 생일을 맞아 녀석이 축하전화를 했다. 물론 내가 받은 건 아니지만 곁에서 들으니, 우리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께 부쳐 드렸으니 찾아 쓰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엄마는 입이 귀에 걸린 것이 안 봐도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그 말이 왠지 나에겐 들어보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리도 이렇게 할머니 생각하고 있다구요.'라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전화를 끊을 때쯤 뜬금없이 이모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엄마는 위로 반, 이해시키는 것 반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마음이 묘했다. 그동안 그 뻘짓으로 인해 내가 녀석에게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싶었던 것이다. 단순히 짐작으로 아는 것과 이렇게 정확히 말로 들으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게 어른 노릇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가끔씩 녀석을 생각나면 불쾌해지곤 했다. 자식도 품 안에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이모 조카 지간도 다 어렸을 때나 그런 거지 크면 별것도 아니다 싶었다. 어떻게 제 따위가 나를 두고 감히 외할머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괘씸하면 지는 거다. 지금쯤 녀석은 외할머니 생신 날 이모인 나를 두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날 녀석은 불쑥 우리 집엘 쳐들어 온 것이다.

 

4년만에 만났지만 녀석은 여전히 예뻤다. 어느덧 20대 말에 접어들었는데도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큼하고 싱그러웠다. 그래도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나이 때 내가 더 이상 젊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부디 녀석의 젊음이 오래가기를 빌어주고 싶었다. 녀석은 조카 셋 중 제 엄마도 아버지도 닮지 않은 유일한 아이이기도 했다. 닮았다면 제 친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돈어른을 두 번 정도 뵌적이 있는데, 여성스럽고 고운 인상이 젊었을 때 미인이란 소리 꽤 듣고 살았을 것 같았다. 물론 난 형부도 언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둘 중 아무도 닮지 않은 녀석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두 녀석도 싫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만큼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맏이는 남자아이라 멀쑥했고, 막내는 늦둥이로 태어나 제 부모는 어떨지 몰라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조카라 그런지 특별히 정이 갔던 것은 아니다. 성격도 제 부모를 닮아 어딘지 뚝뚝하기도 하고. 그런데 비해 녀석은 상냥하고 싹싹했다. 

언니 모녀는 바통터치라도 하듯 하나는 들어오고 하나는 나가는 형상으로, 언니는 일찌감치 안녕을 고했고 
녀석도 바쁜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했다. 그날은 또 엄마가 때이른 김장을 해 김치 속 쌈을 따로 떼어 놓고 수육 대신 돼지고기를 구워 같이 곁들여 먹었다. 녀석은 젓갈이 적당히 들어간 외할머니나 제 엄마가 한 김치를 좋아했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친구들은 젓갈 들어간 김치를 안 좋아해 오랜만에 할머니의 김치 속 쌈을 빠져들듯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던 중 나는 지난여름 책을 낸 사실을 녀석에게 불쑥 꺼내고 말았다. 이건 아직 언니한테도 알리지 못한 거였다. 그걸 녀석한테만큼은 털어놓는 것을 보면 내가 아직도 녀석을 좋아하긴 좋아하는가 보다.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마음은 또 어쩌고.  사실 지난번 추석 때 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언니한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이건 엄마도 아직 몰라." 
그러자 녀석은 시쳇말로 대박사건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했다.
 "책 제목이 뭐예요?"
 "네 멋대로 읽어라."
 "오, 제목 좋은데요? 절대로 안 잊어버리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말 많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녀석을 깔깔대며,
 "에이, 그 말 제가 제일 먼저 했었어야 하는 건데... 이모 책 서점에서도 팔겠죠?"
녀석이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면 저자 증정본에 저자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의 책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몰랐다. 책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 되지도 않은 원고료를 내 책을 사는데 다 탕진해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했었으니까.  

 "꼭 한 번 사 볼게요."
녀석은 예의가 바른 건지 아니면 내가 어려운 건지 웬만하면 이모인 나에게 책 동냥을 할 만도 한데 그러질 않았다. 그게 또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과연 말대로 녀석은 자기 돈을 내고 내 책을 사 볼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나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 축하는 해도 아직까지 사 보겠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친분있는 블로거들이 사서 보겠다고 해서 좀 놀랐다. 나도 그렇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가에게 공짜로 책 선물 받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녀석이 그러는 걸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꼭 읽겠다고 하면 한 권 줄 수도 있어."
 그러자 녀석은 눈을 더욱 빛내며 그제야 한 권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늦더라도 꼭 읽을게요. 제가 원래 책을 빨리 읽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나는 속으로 그건 나를 닮았구나 했다. 나는 결국 온전히 내 책으로만 담겨 있는 책 박스에서 한 권을 꺼내 첫 장에, '사랑하는 조카 지0에게. 이모가.' 그리고 그날의 날짜를 적어 한 권 줬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이란 닭살 돋는 멘트를 쉽게 날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녀석한테만큼은 하고 싶었고, 속으로 이로써 이모와 조카 지간의 지난날의 어색함은 퉁치자 했다. 나는 책을 녀석의 손에 넘겨 주면서,
 "SNS에 꼭 올려라. 친구들한테도 이모가 책을 냈다고 선전도 하고."
녀석은 방금 내 책의 홍보 요원이 된 것도 모르고 그러겠다며 좋아라 하며 친구를 만나야한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언니와 그다지 친하진 않지만 언니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다면 조카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것 하나만큼은 잘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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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7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7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6-12-1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조카처럼 저도 작가님과 이렇게 sns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stella.K 2016-12-17 18:03   좋아요 1 | URL
아유, 쑥스럽습니다.
전 쿠키님처럼 겸손하시고 친절하신 분을
이웃으로 둬서 그저 감읍할 다름입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6-12-17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근 차근 정경을 그리며 읽게 돼요. 그 어떤 미화된 표현보다 스텔라님의 조카에 대한 마음이 진솔하게 다가왔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가요. 제 조카 이름도 지~이라서 더 와닿아요.^^

stella.K 2016-12-18 17:4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쓰고 보니 제가 그 조카를 참 좋아하고 있었더라구요.
어른도 똑같은 마음이란 걸 그 조카가 훗날에라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른도 사랑에 반응이 없으면 아무리 나이 어린 조카에게라도
삐질 수 있다는 걸.ㅋㅋㅋㅋ
짧지 않은 글 읽어 줘서 고마워요.
브랑카님 조카님도 지자가 들어간다니 저도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