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전] 헉! 카드 명세서에 여관 이름이…


▲ 김애란 / 소설가
이따금 나는 나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실리는 상상을 한다. 기사의 내용은 김 작가가 다른 작가들에게 ‘해외 문학 기행’을 가자며 모은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몇 년 후, 신문에는 ‘종적을 감춘 작가, 알고 보니 나이지리아에서 총기 매매업 중’이라는 보도가 나간다. 얼마 후 다른 지면에는 ‘사실은 그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일곱 쌍둥이 중 한 명’이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은, 실제로 문학사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이 살다 간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베고 누워 작가들의 사생활을 그려본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얼마나 시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름 돈을 잃고 나올 때 발음한 러시아식 상욕은 어떤 억양이었는지, 귀부인과 통정(通情)한 발자크는 저택 뒷문을 빠져나오며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누군가는 그것은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고도, 또 누군가는 방해한다고도 말한다. 그 중에는 플로베르와 같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없애려 노력한 작가도 있고, 사라진 흔적들을 찾아 헤매느라 일생을 바친 연구자들도 있다. 작가와 작품에 관한 논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플로베르보다는 개인의 흔적을 삭제하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크고 작은 계약들과 각종 세금 계산서, 휴대전화, 은행 거래 명세서까지. 그러니 훗날 누군가 한 작가의 삶에 대해 연구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방법들과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 그 중 카드 명세서는 결제 시간과 날짜, 장소가 분명하게 찍히는 매우 구체적인 사료가 될 것이다. 만일 어느 집념의 연구자가 죽은 작가의 ‘카드 사용 명세서’를 침침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다고 치자. 그는 그것으로 작가의 취향이나 생활수준, 동선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주로 어느 동네에서 맥주를 마셨는지, 어느 인터넷 서점을 이용했는지, 동료작가에게 왜 송금을 했는지, 그 스스로도 피하려 했지만 불가피하게 찍혔을 이 여관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러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로 송금된 돈이 성인용품 구매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황할지도 모르리라.

현금카드. 가끔은 이 작고 납작한 플라스틱이 내 삶을 저장하는 이동식 드라이브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매출 전표가 지지직… 기기를 빠져나올 때 나는 내 삶의 한 순간이 인쇄되는 소리, 인생의 한 장면이 잽싸게 크로키되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비밀이 사라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에게는 소비의 목록만으론 절대 기록할 수 없는 삶의 디테일과 진실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연구가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1937년 이상이 일본에서 쓴 편지 ‘살아야겠어서,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라는 자료(김연수 소설 ‘굳빠이 이상’)에 비해 ‘김 작가 2006년 1월 14일 22시 34분 24초 룰루치킨에서 24000원 일시불’이라는 말은 어쩐지 퍽 부끄럽게 느껴진다. 과거, 관계자마다 진술이 달랐고, 때로는 독자의 요구나 판타지에 의해 재구성되고 낭만화됐던 작가의 사생활은 이제 ‘구체적 남루함’만을 가지는 듯하다. 그것이 개인과 문학의 역사를 발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이따금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것은 세상의 작은 비밀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알 수 없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애란 · 소설가
 김애란이라면 달려라 아비를 쓴...
글 재밌게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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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6-02-0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특한 생각을 하는 작가네요. <달려라 애비>는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끌리는 단편들이 수록되 있더라구요. 좋았어요^^